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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론-오승훈 부국장 겸 경제산업부장 게재 일자 : 2018년 09월 10일(月)
‘21세기 과제’와 거꾸로 가는 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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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승훈 부국장 겸 경제산업부장

유발 하라리의 ‘21가지 제언’
고장 난 자유·민주주의 비판
합리적 인간, 正義도 재정의

한국에선 ‘지구적 고민’은커녕
독선·도그마 난무해 最惡 상황
公衆 아닌 大衆 포퓰리즘 위기


“부족적인 사고방식을 포기하고, 지구적인 고민을 해야 한다”. 소장 역사학자이지만 세계적 영향력을 지닌 유발 하라리(42) 이스라엘 히브리대 교수가 신간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에서 주장하는 바다. 그런데 그 제언이 지구가 아니라 이 땅, 오늘의 한국에 던진 화두 같다. 인류의 과거(‘사피엔스’), 미래(‘호모데우스’)에 이어 ‘현재’의 문제를 다뤘다고 하니 더욱 그러하다. 그가 탐구해온 기술 진화의 미래를 걱정하자는 게 아니다. 그건 차라리 진화한 ‘선물’로 여겨질 정도다. 그가 나열한 20세기형 ‘이야기’(사고와 행동의 틀)들에 비치는 우리 사회의 퇴행성이 문제다.

하라리가 분석한 20세기 신화(이야기)는 세 가지다. 파시즘, 공산주의, 자유주의다. 더는 설명이 불필요한 파시즘과 공산주의 이야기가 무너진 이후, 자유주의 이야기가 인류의 필수적인 매뉴얼이 됐다. 정치적 자유주의와 시장 자본주의다. 위기의 순간마다 민주주의·인권·복지로 재단장하면서 패키지를 완성했고, 그게 유일한 해법이라고 생각했다. 인권을 보호하고 투표권을 부여하면, 사상과 상품이 세계 전역을 이동하게 하면, 모두의 평화 번영을 이룰 수 있는 것으로 봤다. 하지만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가 그 이야기에 회의를 갖게 했다. 자유무역협정(FTA)에 대한 반감, 부의 불평등에 대한 불만, 종교까지 가세해 반(反)자유주의와 독재 회귀의 경향이 나타났다. 이제 ‘고장 난 자유주의’는 전 지구적인 현상이다.

민주주의 신화도 무너졌다. 20세기는 합리적 인간에 대한 믿음을 키워왔다. 독립적이고 이성적인 주체 말이다. 정치에선 유권자가 가장 잘 알고, 자유시장에선 고객이 언제나 옳으며, 교육에선 학생들이 스스로 사고하도록 하는 게 최선이라고 가르쳤다. 그 과신이 실수였다. 인간은 스스로 생각하기보다 집단 속에서 사고한다. 행동경제학자들이 간파했듯이 인간의 결정은 이성적 분석보다 감정적 반응과 어림짐작이 절대다수다. 하라리는 “인간이 세상에 관해 아는 것은 창피할 정도로 적다. 생각이 같은 친구들로 가득한 반향실(反響室)과 자기 의견을 강화해주는 뉴스피드 안에만 갇혀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럴수록 권력은 진실을 왜곡한다. 현실을 그대로 보기보다 바꾸려는 데 관심이 있다. 모든 것에 개혁의 딱지를 붙인다. ‘손에 망치를 들고 있으면 모든 게 못으로 보이듯이, 수중에 권력을 쥐고 있으면 모든 것이 나를 부르는 것만 같다’. 공중(公衆)이 아닌 대중(大衆)이 좌우하는 시대가 포퓰리즘이 횡행하는 토양이다. 그런 현상의 주어를 인류 대신 한국으로 바꿔도 조금도 틀린 말 같지 않다.

정의(正義) 역시 흔들린다. 홀로 조용히 집에서 평화롭게 살아도, 우파 운동가에 따르면 북한의 인권 유린을 수수방관하는 협력자가 된다. 방금 내려 마신 원두커피가 향긋하게 느껴지는 그 순간에도, 좌파 운동가들은 어느 아프리카 나라의 노동 착취 현장을 외면한다고 다그친다. 그 모든 도덕의 기준에서 나는 정말 비난받아야 할까. 그저 생존하려 할 뿐인데,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복잡한 경제적·정치적 연결망 속에서 나는 의지와 상관없이 도마 위에 올려지고 만다. 알려고 노력하지 않은 사람은 행복하고, 정작 알려고 애쓰는 사람은 진실을 알기 힘들다. 하라리는 묻는다. “이제 공식적으로 ‘탈(脫)진실’의 시대로 진입한 것일까.”

이 혼돈의 정도를 따져보면 한국은 최악의 상황이다. 자유주의, 민주주의, 공중, 대중, 정의, 그 어떤 것에 관해서도 공통되거나 합의된 이야기를 만들어내지 못했다. 되레 저마다 정답이라며 윽박지르는 갈등이 더 크다. 자신만이 옳다는 독선(獨善), 실제는 외면하고 주의(主義)만 우기는 아집과 도그마가 난무한다. 우리의 자유와 민주의 이야기는 고장이 난 게 분명하다. 하라리가 정작 걱정하는 ‘디지털 독재’는 화성 이야기처럼 멀고 먼 일일 뿐이다.

참으로 맥(脈)없어 보이지만, 그래도 그가 던진 마지막 조언에 희망을 걸고 싶다. “인류는 자유와 민주의 이야기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다른 대안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앞으로 수십 년 동안에는 우리에게 선택의 여지가 있다. 노력을 기울인다면, 아직은 우리가 진정 누구인지 탐사할 수 있다. 지금 실행하는 것이 좋다.” 우리의 이야기에 대한 성찰을 시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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