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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김효정의 에로틱 시네마 게재 일자 : 2018년 09월 11일(火)
외도하는 아내 죽이고 완전범죄 노리는 실직 남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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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피엔드

보라(전도연 분)는 퇴근 후 집이 아닌 어딘가로 향한다. 그의 구두 소리에서 촌각을 다투는 조급함이 느껴진다. 초인종을 누르자 한 남자(주진모 분)의 손이 문을 열어준다. 집으로 들어온 보라는 남자의 눈을 잠시 응시하더니 옷을 벗기 시작한다. 이 남자의 품을 그리워했던 것이 틀림없다. 남자 역시 서둘러 옷을 벗고는 보라와 입을 맞춘다. 남녀의 손이 분주해진다. 무언가에 쫓기듯 남녀는 서로의 몸을 만지고, 기다려 왔던 순간을 맞는다. 숨이 넘어갈 듯한 절정을 나눈 후, 보라는 서둘러 옷을 입고 딸과 남편(최민식 분)이 있는 집으로 향한다. 구두 소리는 게을러지고 초인종을 누르는 손은 주저한다. 문을 열어주는 남편을 보는 순간, 숨이 막혀온다.

보라는 대학 때부터 자신을 좋아했던 남자, 일범을 만나고 있다. 남편 민기는 실직상태에, 낮에는 헌책방에서 소설이나 읽으며 시간을 보낸다. 그런 남편이 보라는 넌덜머리가 난다. 태어난 지 몇 달 안 된 딸까지도 버겁기만 하다.

정지우 감독의 1999년 연출작, ‘해피 엔드’(사진)는 실직한 남편이 아내의 외도를 알게 되면서 벌어지는 복수극을 다룬 스릴러다. 한국이 금융위기(IMF)를 맞은 시기에 개봉된 ‘해피엔드’는 나라 전역에 팽배한 불안과 위기를 복수와 치정서사를 통해 신랄하고도 절묘하게 그려내 호평을 받았다. 영화학자 곽한주는 포스트 IMF 영화들에서 공통적으로 ‘우울의 무드’가 지배적으로 보인다며 이 영화들을 ‘우울의 영화’라고 일컫기도 했다. ‘해피엔드’는 이 시기에 탄생한 ‘우울의 영화’의 전형으로, 추락한 남성을 통해 사회적 상실을 치밀하게 보여준다.

민기는 실직당했지만 보라가 운영하는 영어학원은 호황을 누린다. 학원이 잘될수록, 보라는 남편에 대한 분노와 경멸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이들의 차이는 경제적인 계급뿐만 아니라 보라가 각각의 남성과 성관계를 맺는 태도로도 보인다. 일범이 적극적으로 보라를 리드하고 여자의 전신을 조종하는 반면, 민기는 부동(不動)에 가까운 포즈로 보라의 몸 위에 얹혀(?) 있을 뿐이다. 보라가 꾸려가는 가정에 기생하는 민기의 형편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  김효정 영화평론가


그럼에도 민기는 자신의 천성대로 꼼꼼하고 꿋꿋하게 해야 할 일들을 해 나간다. 빨래와 장보기는 물론이고 보라가 오는 시간에 맞춰 저녁 식사를 준비하는 일도 그의 몫이다. 문제는 그의 꼼꼼함 때문에 보라의 외도가 들통나버렸다는 것이다. 충격을 극복하지 못해 안절부절못하는 중, 사건이 일어난다. 아내가 일범을 만나러 가기 위해 어린 딸에게 수면제를 먹이고 외출을 한 것이다. 민기는 분노한다. 그동안 참아왔던 멸시와 수치는 광기로 탈을 바꾸고, 민기는 보라를 죽일 완전범죄를 계획한다.

정지우는 인물을 설정하는 방법에 있어 탁월하다. ‘은교’에서도 그랬지만 그의 장기는 ‘해피엔드’에서 가장 두드러진다. 민기와 보라를 단순히 성격적으로 대비되는 인물로만 그리는 것이 아닌 그들의 직업과 취향으로 대조적인 음영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예를 들어, 민기가 완전범죄를 구성할 수 있는 치밀함은 그가 은행에서 근무했다는 전적으로 유추가 가능하다. 또한, 그가 소심하고 꼼꼼한 인물임에도 틈만 나면 고서점에 들러 연애소설과 추리소설을 읽는 것이 취미라는 설정은 그가 완전범죄를 계획하는 데 필요한 서사를 구축하는 것이 어렵지 않았을 것이라는 추론을 할 수 있게 한다. 반대로 보라는 정리해고가 무성하던 시기에 영어학원을 운영할 정도로 이해타산이 빠르지만 영수증 한 장을 제대로 챙기지 못해 외도를 들키게 되는 경솔한 인물이기도 하다.

‘해피엔드’는 민기가 아내를 살해하고 일범의 집에서 가지고 나온 가짜 증거들로 누명을 씌운다는 결말로 씁쓸하게 끝을 맺는다. ‘씁쓸한 결말’이라 여겨지는 이유는 살인이 처벌되지 않아서가 아니라 1990년대 후반을 지배했던 절망과 패배의 기운이 인물들의 비극으로 체화되는 듯한 징후로 보이기 때문이다.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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