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생각하며>운동장 ‘주민 장터’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박동우 홍익대 공연예술대학원 교수, 무대미술가

안 쓰는 물건 파는 차고지 세일
우리는 ‘운동장 세일’ 어떨까

주말에 공립학교 운동장 빌려
주민 장터 열면 모두에게 도움

판매금 기부하고 공연도 열고
축제 분위기 속 자원절약 효과

나는 평론가와 관객들로부터 ‘미니멀리스트’라는 평가를 자주 받는다. 무대에서 불필요한 장식들을 제거해 본질적인 요소를 강조하는 성향이 있기 때문이다. 작품의 핵심 개념을 강화하기 위해 ‘최소화’ 과정을 거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정작 나의 작업실과 주거지는 ‘미니멀’하지 않다. 쓰지 않지만 버리기 아까운 물건, 앞으로도 쓰일 것 같지 않은 물건, 기능이 중복되는 물건, 구입 당시의 고생과 가격을 생각하면 버릴 수 없는 물건…. 비활성화된 그 많은 물건에 세계에서 가장 비싼 서울 도심 공간을 내주고 그 물건들의 주인인 나는 비좁게 지내고 있다.

물건들이 차지하고 있는 공간을 위해 많은 비용을 감당하고 있는 것이 나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어찌 보면, 대량생산 시대의 우리 현대인들은 물건을 구매하기 위해 살고 있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든다. ‘버리면 된다’고 한다. 그런데 병적으로 물건을 버리지 못하는 사람도 있지만 평범한 사람들도 여러 가지 이유로 그것들을 버리지 못한다. 그들을 대신해 쓰지 않는 물건들을 버려주는 회사도 있다. 마치 압수수색 하듯이 집안을 샅샅이 뒤져 물건들을 분류하고 버려준다. 그런데 그렇게 남의 손에 맡기지 않고도 한때 내게 소중했던 물건들이 다시 소중하게 여겨줄 누군가에게 가게 되는 방법이 있다면 기꺼이 헐값에라도 팔고 싶어질 것이다.

우리보다 훨씬 더 물자가 풍족한 미국이나 유럽에서는 내가 쓰지 않는 물건들이 요긴한 사람들에게 갈 수 있도록 싸게 판매하는 경우가 많다. 독자들도 잘 알고 있는 ‘차고 세일’이 그것이다. 자신의 주택 차고와 그 앞마당에 쓰지 않는 물건들을 내놓고 파는 것이다. 세일의 종류도 다양하다. 통상적인 차고 세일 외에도 이사 가면서 새집으로 가지고 가지 않을 물건들을 처분하는 ‘이사 세일’, 고인이 사용하던 물건들을 (우리처럼 불태우지 않고) 판매하는 ‘유산 세일’ 등이 있다. 이러한 행사들은 비전문 개인이 여는 일시적인 가게라는 점에서 벼룩시장이나 자선바자회, 교회시장 등과 구별된다.

우리나라에서도 이러한 행사가 일반화하면 좋겠다는 말을 하면, 인터넷 중고시장에 팔면 되지 않느냐는 주위의 반응이 일반적이다. 물론 온라인 중고시장의 장점도 많고, 나도 여러 차례 이용한 적이 있다. 하지만 물건들을 훑어보는 과정이 직관적이지 않고, 쓰던 물건들을 직접 확인하지 않고 사기도 꺼려진다. 게다가 신뢰도의 문제도 있고, 환불이나 교환도 어려운 데다 거래 교통비나 배송료보다 싼 물건을 거래할 경우에는 합리적이지도 않다.

우리나라에서는 차고 세일이 불가능할까? 전체 주택의 60% 이상이 아파트인 주거 환경에서 미국식 차고 세일은 현실적으로 어렵다.

그렇다면 ‘운동장 세일’은 어떨까? 전국 곳곳에 있는 공립학교의 넓은 운동장에서 매달 2회씩 ‘일요 주민 장터’를 연다고 상상해보자. 물건을 팔 사람들은 미리 인터넷에서 판매인 등록을 하고 판매인 차량 입장료를 낸 후 자동차에 물건들을 싣고 운동장으로 가서 예약한 구역의 번호를 찾아 주차한 후, 매대와 차량 보닛, 지붕, 트렁크 등을 이용해 물건들을 진열하고 판매한다. 차량 대신 소형 운반 수단으로 물건을 가져온 판매자들도 예약한 소형 판매 공간에서 면적에 비례한 입장료를 내고 물건을 판다. 운영자 측에서는 공동 탈의실(피팅룸)을 제공하고 매대도 임대해준다.

구매자들의 경우 보행 입장이나 자전거 입장은 무료로, 차량 입장은 주차료를 낸다. 판매 참가자들은 자신의 물건들을 파는 판매자이자 남의 물건들을 구경하고 사는 구매자이기도 하다. 일반 직거래 매대와 병행해 경매시장도 열린다. 일정 시간대에 지역의 대중적 인사들이 자신의 물건들을 경매하고 판매 금액의 일부를 자선기금으로 기부한다. 신청자가 있다면 여러 가지 형태의 공연이 개최될 수도 있다. 이 모든 행사는 축제 분위기 속에서 현대식 오일장처럼 나타났다 사라진다. 학교는 장소와 편의시설을 제공해 준 만큼의 비용을 받는다. 아무도 손해 보는 측이 없어야 지속 가능하다. 아주 덥거나 추운 계절은 피한다. 비가 오면 취소하거나 규모를 축소해 체육관 등 실내로 옮길 수도 있다.

‘일요 주민 장터’가 활성화되면 여러 가지 순기능이 유발될 것으로 생각된다. 자원의 효율적 재배치라는 본질적 기능 외에도 자원 절약, 쓰레기 감소, 청소년 교육, 자선금 기부, 대면 접촉 증가, 생산적 휴일 보내기 등 수많은 부대 효과가 있을 것이다.

지역에 따라서는 관광자원으로 활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가평 자라섬의 내방객 수는 바로 옆 춘천 남이섬의 연간 300만 명에 비해 너무 적어서, 가평역이라는 교통 거점을 남이섬에 제공하면서도 가평군의 관광 수입에 큰 도움이 되지 못하고 있다. 남이섬 방문객의 상당수를 자라섬에 들렀다가 가게 할 방법으로 자라섬 중고장터를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자라섬에는 수백 대의 차량을 수용할 수 있는, 잘 구획된 모터 캠핑장이 이미 마련돼 있고 잔디 광장과 일반 주차장, 여러 편의시설 등이 완비돼 있어서 중고장터를 관광자원화하기에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자라섬 재즈페스티벌과 자라섬 뮤지컬페스티벌은 일시적 행사들이지만, 자라섬 중고장터는 봄가을 주말마다 개최할 수 있는 장기적 관광자원이 될 수 있다.

인터넷에서 잘생긴 연예인들이 이상한 표정을 짓는 사진들 밑에는 ‘그 얼굴 그렇게 쓸 거면 나 줘’라는 댓글이 달린다.

‘그 물건 그렇게 버려둘 거면 내게 팔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