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민담에 담긴 ‘무의식의 세계’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민담은 무의식의 세계를 읽은 지도이며, 의식과 무의식의 건강한 통합을 위한 지혜를 담고 있다. 그림은 19세기 독일의 화가 알렉산더 지크가 그린 ‘헨젤과 그레텔’ 삽화. 자료사진

- 민담의 심층 / 가와이 하야오 지음, 고향옥 옮김 / 문학과지성사

그림동화 10편·日 민담 등
융 심리학 이론 통해 분석

‘헨젤…’‘백설공주’속 모친
무의식 속 잠재된 공포 표현

권선징악 아닌 이율배반 내용
그 자체가 인간 마음 드러내

19세기 독일의 그림(Grimm) 형제가 편집한 200편의 민담집 ‘그림 동화’에 실린 ‘게으른 세 아들’은 임종을 앞둔 왕이 세 아들 중 가장 게으른 사람을 골라 왕위를 물려주는 내용이다. “밧줄에 목이 매여 죽을 처지에 있을 때, 누군가 밧줄 자를 칼을 손에 쥐여준다 해도 손을 들어 올리느니 차라리 목이 매달리는 편이 낫다”고 말한 셋째 왕자가 행운을 잡는다. 그림 동화 중 ‘실 잣는 세 여인’이나 ‘게으름뱅이 실 잣는 여인’도 지독하게 게으른 여자아이와 부인이 각각 황당한 우연과 교활한 속임수로 종국에 왕자와 결혼하거나 편하게 살게 된다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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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담에서 권선징악적인 교훈을 읽어내려 한다면 역설이나 이율배반성으로 당혹감을 느끼게 된다. 게으름뱅이가 왜 성공담의 주인공이 될까. 민담에 옛적 중노동에 시달리던 민중이나 여인들의 게으르고 싶은 강한 소망이 반영된 것으로 흔히 풀이할 수 있다. 융 심리학자인 이 책의 저자는 아주 깊이 들어간다. 게으름뱅이 민담에서 ‘게으름’은 일종의 ‘퇴행’으로, 사람의 의식과 무의식이 만나 새로운 ‘창조’와 ‘성장’을 이루기 위한 고도의 준비 상태다. 왕권의 교체는 이제껏 의존해왔던 ‘의식’의 규범에 의지할 수 없게 된 상황으로, 게으름은 ‘무의식’과의 통합을 위한 창조적인 퇴행이라는 것이다. 의식과 무의식의 갈등은 건강한 자기실현을 돕는다.

저자 가와이 하야오(河合準雄, 1928∼2007)는 1962년 스위스 취리히 ‘융 연구소’에서 융 학파 정신분석가 자격을 얻은 임상심리학자로 문학, 철학, 예술, 교육 등 다방면에 걸쳐 일본 지성계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그의 저서 여러 권이 국내에서도 번역돼 소개됐다. ‘개인적 무의식’에 집중한 프로이트와 달리, 그의 제자로서 ‘보편적 무의식’을 제창하며 갈라선 카를 구스타프 융은 인간 무의식의 심층에 인류에게 공통되는 보편성, 곧 ‘원형적인(archetype) 존재’가 있다고 보았다.

저자는 이 책에서 ‘트루데 부인’ ‘헨젤과 그레텔’ ‘두 형제’ 등 대표적인 그림 동화 10편을 융의 학설인 ‘자기실현(혹은 개성화)’ 과정이라는 틀로 분석한다. 민담을 인간의 내적 성숙 과정에서 어떤 한 단계를 그려낸 것으로 보는 것이다. 저자는 그림 동화뿐 아니라 일본 등 동서양의 민담, 구체적 임상경험 등을 종횡무진하며 삶과 죽음, 자아, 모성과 부성, 아니마와 아니무스, 그림자 등 융의 이론을 쉽게 풀어준다.

민담에는 전율을 느끼게 하는 끔찍한 스토리가 적지 않다. ‘트루데 부인’은 고집 세고 건방지지만 호기심이 가득한 소녀를 나무토막으로 변신시켜 불 속에 처넣는다는 어이없고 무시무시한 이야기다. 트루데 부인은 여성이면서 어머니다. 널리 알려진 ‘헨젤과 그레텔’이나 ‘백설공주’ ‘들장미 공주’ 등은 계모가 아이들을 위기로 몰아넣는 내용인데, 원래 민담에서는 친모였다. 고대인에게 흙 혹은 대지로 상징되는 어머니는 생명의 원천이면서 또한 모든 것을 삼켜버리고 죽음에 이르게 하는 부정적인 측면도 갖는다. 어머니가 아이를 끌어안는 힘이 지나치면 아이의 자립을 방해해 결국은 정신적인 죽음으로 내몰기도 한다. 민담에 담긴 무의식의 어머니는 이 같은 잠재된 공포를 보여준다.

민담의 이율배반성은 본디 인간의 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는 서로 대립되는 수많은 원리가 작용하는데, 운명에 적극적으로 맞서는 남성 원리와 받아들이는 여성 원리도 그중 하나다. 이는 옳고 그름이나 선택의 문제가 아니며, 단지 사람의 인격 속에 통합적으로 존재한다. 아무리 좋은 어머니를 두었더라도 사춘기 소녀가 어머니를 지겨워하는 경우가 흔히 있다. 이는 개인적인 성격의 문제라기보다 여성의 마음속에 있는 남성이 모성을 적대시하는 단계에 이른 것으로, 성장 과정에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저자는 과학으로 무장된 자아의식이 사람과 자연의 관계를 단절시키고 뿌리 잘린 식물과 같은 상태로 만들면서 현대인과 자연에 여러 해악을 불렀다고 말한다. 의식 세계를 확고하게 다지기 위해서는 무의식의 세계로 내려가야 하며, 민담에는 그 같은 가르침이 숨겨져 있다. 의식인 망치와 무의식인 모루를 서로 이용해 다져지는 쇠(자기실현)가 단단하다는 융의 통찰이 현대인에게 필요하다는 것이다. 399쪽, 1만5000원.

엄주엽 선임기자 ejyeob@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