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워인터뷰>“과학은 창의성이 생명인데… 우린 성과 집착 안전하게만 가려 해”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국양 삼성미래기술육성재단 이사장은 지난 21일 서울 서초동 사무실에서 “어려운 문제에 직면해 끈질기게 해법을 모색하기보다는 무리하지 않고 쉽게 가자는 분위기가 과학기술계 더 나아가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다”며 “이러한 풍토가 바뀌지 않으면 노벨상 수상이나 전 세계에 막대한 파급력을 가져올 연구 성과 혹은 기술개발은 기대하기 힘들다”고 강조했다. 김낙중 기자 sanjoong@

국양삼성미래기술육성재단 이사장

우리가 노벨상 못타는 이유
노력·투자 부족만은 아냐
과학하는 태도·마인드에 문제

내년 R&D 예산 20조 넘지만
돈 투입한다고 바로 되지 않아
과학계 전반 끓어올라야 가능

韓, 교수채용때 논문數에 점수
美는 생산성보다 창의성 중시
지금 우린 AI 연구하고 있지만
美 대학선 벌써 AI 이후에 눈길

실패도 과학발전의 자산인데
과학기술계는 너무 몸만 사려

‘노벨상 시즌’이 다가오고 있지만 아직은 한국 과학자의 수상을 기대하긴 힘든 게 현실이다. 최근 수년 동안 일본, 중국 등 인접 국가에서 노벨 과학 부문 수상자가 줄줄이 나오는 것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속이 쓰릴 지경이다. ‘세계 10위권 안팎으로 경제 규모가 커졌으니 이제 노벨 과학 부문 수상자도 나올 때가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은 여전히 안이한 기대일 뿐이다. 미국, 유럽, 일본 등 과학 선진국과 한국 간 수준차가 여전하고, 이러한 격차를 단숨에 뛰어넘을 만한 업적을 남긴 한국 과학자도 사실 찾아보기 힘들다. 국가 차원에서 과학기술 분야에 투자를 게을리하는 것도 아니다. 내년 국가 연구·개발(R&D) 예산이 20조4000억 원이며,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 R&D 투자 비중을 보면 이스라엘에 이어 세계 2위에 올라 있다. 물론 국가 R&D 예산이 전적으로 노벨상 과학 부문 수상을 위해 쓰이는 것은 아니겠지만, 돈은 돈대로 쓰면서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추석 연휴가 시작되기 직전인 지난 21일 서울 서초동에 있는 삼성미래기술육성재단의 국양(65) 이사장을 찾았다. 국 이사장은 이런 의문을 품고 있는 기자를 겸손하게 맞아 주었다.

인터뷰를 위해 자리에 앉자마자 ‘왜 한국에선 노벨상 수상자가 안 나오느냐’고 물었다. “과학을 하는 태도가, 문화가, 풍토가 배어 있지 않다”는 즉답이 돌아왔다. “창의성을 중시하는 과학계 풍토가 마련돼야 한다”는 지적도 했다. 나이보다 젊어 보이는 국 교수의 ‘진단’에는 거침이 없었다. 그는 AT&T벨연구소 10년, 서울대 27년 등 40년간 연구를 진행해온 세계적인 나노 과학 연구자다. 2014년부터는 국내 최대 민간 과학 학술기금 지원 기구인 삼성미래기술육성재단 이사장을 맡아 활동하고 있다. 학계와 기업을 두루 경험한 석학의 눈에 비친 한국의 과학은 더 모질게 길을 재촉해야 하는 ‘산 너머 산’인 것 같았다.



―단도직입적으로 여쭙겠다. 왜 한국에선 노벨상 수상자가 안 나오는가.

“어려운 문제다. 과학계에서도 고민이 많다. 10년간 R&D 분야에 160조 원 가까이 투자했는데 기초과학 분야에서 제대로 된 성과를 내지 못했으니 말이다. 과학계 지인들끼리 만나면 우리가 그동안 뭐했지라고 서로 묻기도 하고 많이 듣기도 한다. 물론 산업적 활용 면에선 뛰어난 성과가 많았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이쪽 분야에선 강점이 있는 것 같다. 하지만 기초과학이나 기초기술 개발에선 사실 한 게 별로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로켓 분야에서 획기적인 발전을 보여주지도 못했고 노벨 과학 부문 수상자를 내지도 못했다. 국민의 불만이 점점 쌓여가고 있다는 것을 피부로 절감하고 있다.”

―왜 투자만큼 성과가 나오지 않는 것인가.

“이런 예가 적절할진 모르겠지만, 축구를 예로 들어 보겠다. 영국 프리미어리그, 독일 분데스리가, 이탈리아 세리에A, 스페인 프리메라리가 등을 1급 프로축구 리그로 친다. 여기에 우리 K리그를 비교해 보자. 공이 움직이는 속도 자체가 다르지 않은가. 과학도 이와 비슷한 것 같다. 과학 선진국들의 과학계와 한국 과학계의 노는 물이 워낙 다르다. 스위스나 벨기에 국내 리그도 한번 비교해 보라. 우리보다 돈을 더 투자했는지 그렇지 않은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이 리그들은 영국, 독일, 이탈리아, 스페인 등에 실력 격차는 있겠지만 엇비슷한 수준으로 가지 않나. 적어도 한국 K리그보다는 나아 보이는 게 사실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축구가 우리에게 체력 면에서 어렵고 생소한 종목이 아닐까 하고 말이다. 과학은 우리한테 생소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과학은 1960~1970년의 시기에 100% 수입됐다. 과학적 마인드가 전반적으로 약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과학적 마인드가 없으니 돈을 쏟아부어도 안 된다는 얘기인가.

“과학하는 태도가 몸에 배어 있질 않은 것 같다. 과학적인 문화가 정착되지 않아서 그렇다. 우리나라에 과학을 들여온 선배들 세대에선 서양의 형태를 흉내 내고, 유사한 일을 하는 것이 과학이었다. 미국 하버드대나 스탠퍼드대에서 실험실을 이렇게 꾸미고 이렇게 하더라 하면서 따라 하는 식이었다. 열심히 노력하면 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돈을 넣는다고 바로 나오는 게 아니지 않은가. 아마도 학습지 광고와 비슷했을 것이다. 열심히 공부해서 노벨상을 탈 거야 하는 내용이었는데 실상은 열심히 공부한다고 해도 노벨상을 탈 수 있는 게 아니다. 단적인 예로 우리가 일상적으로 쓰는 언어를 봐도 우리 말이 과학에 많이 부적합하다고 느낀다.”

국 이사장은 언어 사용 습관을 예로 들었다. 음식점을 찾기 위해 길을 물어본다고 치면 한국 사람은 십중팔구 ‘이쪽으로 쭉 가서 사거리에서 왼쪽으로 가면 3층짜리 건물이 보일 것이다’라고 말한단다. 반면 미국 사람은 ‘이쪽으로 3.2㎞ 간 다음 왼쪽으로 꺾어서 1.2㎞ 가면 음식점이 나온다’라고 하든지, 아니면 ‘3개 블록을 지나 반쯤 가다가 왼쪽으로 가면 되는데, 블록이 상당히 기니 유의해야 한다’는 식으로 설명하는 편이란다. 미국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저명한 벨연구소에서 10년 동안 근무한 바 있는 국 이사장의 언어습관 체험이다.

―과학적 문화가 정착되지 않은 게 그렇게 큰 영향을 끼치는가.

“과학도 문화적인 측면을 많이 갖고 있다. 기술 개발도 마찬가지다. 일정 수준 이상의 크리티컬 매스(임계 질량)가 필요한 것 같다. 냉정하게 보면 우리 과학기술계 전체가 끓어오를 만한 질량을 아직 갖고 있지 못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문화적인 측면 말고 또 다른 요인은 없는가.

“미국이나 유럽 과학계에선 창의성을 가장 우선시하는 전통이 있다. 미국 대학들은 신규 교수를 채용할 때 생산성도 보지만 창의성을 더 높게 평가한다. 가장 유심히 보는 것이 교수 임용 신청자의 연구 계획이 지도교수 연구와 어떤 점에서 차별화됐는지 하는 점이다. 쉽게 말해 지도교수 연구를 계승한다고 하면 노벨 과학 부문상을 받지 못할 것 아니냐는 것이다. 적어도 상위 50개 대학에선 이러한 전통이 살아 있다. 정부 출연 연구기관 20여 곳도 비슷하다. 물리학과만 놓고 보면 한 학교에서 창의성이 넘치는 교수를 한 명씩 뽑는다고 치면 70여 명이고 10년이면 700여 명이 된다. 과학계 풍토가 창의성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흐를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 대학들도 그렇지 않은가.

“불행히도 그렇지 않다. 우리는 신규 교수를 채용할 때 창의성보다는 생산성을 많이 본다. 네이처, 사이언스, 셀 등 유명 잡지에 얼마나 많은 논문을 게재했느냐, 얼마나 많은 논문을 발표했느냐에 높은 점수를 주는 편이다. 물론 이들 잡지에 실리는 논문이라고 하면 창의성이 없는 논문이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 잡지에 게재된다고 해서 학계의 판도를 뒤바꿔 버리는 논문이라고는 할 수 없다. 또 박사학위를 D램 반도체로 받았다고 치자. 우리 같으면 당장 채용할 것이다. 반도체 산업이 잘 나가니까 말이다. 하지만 미국에선 그렇지 않다. D램 말고 다른 것, 그다음 것에 관한 연구에 더 높은 점수를 준다. 미국에선 쓸데없이 생산성이 높은 것에 대해 다소 경시하는 풍조가 있다. 생산성과 창의성 모두 추구해야 하지만 창의성에 우선순위를 두고 있는 것이다.”

―미국 대학들도 서로 실적 경쟁을 하지 않는가. 경쟁 지표 가운데 중요한 것 중 하나가 발표 논문 수인 것으로 알고 있다.

“물론 그렇다. 생산성을 아예 도외시하는 것이 아니라, 굳이 창의성과 생산성을 비교한다면 창의성에 높은 점수를 준다는 뜻이다. 미국 유수의 대학들은 창의성과 생산성을 적절히 조절하는 것 같다. 전체적으로 생산성이 떨어지지 않으면서 창의성을 살려주는 식으로 학교를 운영하고 있다. 유럽 과학계 역시 미국과 마찬가지다. 이공분야 학계에선 진취적이지 않으면 죽는다는 생각이 많다. 그런데 한 교수가 몇 년 동안 논문 한 편 쓰지 않다가 특정 분야의 흐름을 완전히 뒤바꾸는 연구를 완수했다고 치자. 일단 특정 분야에서 일가를 이루게 되면 생산성은 바로 따라붙는다. 창의성과 생산성이 함께 발현되는 행복한 장면이라고 할 수 있다. 노벨상위원회는 이런 점에 주목한다. 이런 과학자들이 주로 노벨상 수상자로 결정된다.”

―한국의 경우는 어떤가.

“어떤 대학이 서울대나 카이스트를 누르고 제1위 공과대학을 만들어야겠다는 포부를 가졌다고 해보자. 교수를 채용할 때 네이처, 사이언스 등에 논문을 많이 발표한 사람 위주로 채용할 것이다. 매년 발표 논문 수를 할당하면서 관리할 것이다. 하지만 그러고 만다. 서울대도 마찬가지다. 일본 도쿄(東京)대를 이겨야 하는데, 싱가포르국립대가 치고 나오는데, 그들보다는 잘해야겠다, 그런 압박을 많이 받는다. 무엇보다 생산성이 높은 교수를 우선적으로 채용하는 경향이 강하다. 당면한 경쟁에서 이겨야 한다는 생각이 많기 때문이다.”

―그런 이야기를 듣다 보니 우리 과학계의 풍토가 하루아침에 바뀌기는 힘들 것 같다.

“우리는 많이 배우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아직 미흡한 것이다. 인공지능(AI) 이야기를 한번 해보자. 우리나라에서 요즘 AI가 핫이슈다. 하지만 미국국립과학재단(NSF), 미국국방부고등연구계획국(DARFA), 그리고 일부 대학에선 ‘AI 이후’에 관한 이야기를 논의하고 있을 것이다. 지금 우리나라에서 ‘AI 이후’를 이야기하거나 연구하는 사람이 있는가. 미국이나 유럽 대학의 창의성을 강조하는 풍조는 연구비 배분이나 연구 과제 선정에도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다. 우리가 아무리 R&D에 돈을 쏟아붓는다 해도 제대로 된 연구 성과를 내지 못하는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대학이나 과학 관련 기관에서 창의성 위주로 교수 혹은 연구자를 선정한다고 해보자. 잠재성만 보고 채용하거나 연구비를 줬다가 성과를 내지 못하는 경우가 생길 수 있지 않은가. 그런 경우 누가 책임져야 하는데, 그 위험을 감수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맞는 말이다. 과학 관련 부처인 과학기술정보통신부나 산업통상자원부에서 고위직으로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몸을 사리는 것 같다. 외부에서 고위직으로 들어가도 이는 마찬가지다. 어느 정도 실패를 감내해야 하는데 안전한 길로만 가려고 한다. 그래서 당장 성과가 나올 수 있는 안전한 연구과제 위주로 연구비를 책정하고 연구자 역시 그에 순응하게 된다. 대학의 교수 채용도 마찬가지 아니겠나. 생산성이 높고 안전한 사람 위주로 선발하는 경향이 강하다. 괜히 실험한답시고 채용했다가 실패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미국에선 테뉴어 제도가 있어서 성과가 나지 않으면 거를 수 있는 장치가 있긴 하다. 재임용하지 않으면 되니까 말이다. 하지만 오랫동안 창의성 위주로 채용하다 보니 감별력이 생긴 것 같다. 잠재성을 정확히 짚어내는 안목을 갖추게 됐다고 해야 할까.”

―창의성을 감별하고 이를 관리하는 것이 결국 국가의 과학 정책 방향이지 않은가.

“삼성전자 반도체가 지금 잘나가고 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미국의 한 천재가 제안해서 전혀 다른 종류의 메모리 반도체를 만들어낼 수 있다. 생산성 측면에서 도저히 삼성전자를 따라잡을 수 없으니 게임의 판을 바꿔버리는 것이다. 그러면 삼성전자는, 아니 우리나라는 엄청난 위기에 직면할 수 있다. 자동차 산업에서도 한 번 위기가 있었잖나. 일본 기업을 중심으로 하이브리드 자동차가 밀고 들어왔는데 가까스로 막았다. 다행히 전기차 배터리 분야에서 우리가 잘하고 있지만, 이처럼 코앞의 생산성에만 주목하다가는 순식간에 밀려날 수 있다. 끊임없이 생각하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야 한다.”

국 이사장은 ‘과학하는 풍토’를 위해 창의성과 창의성 관리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한국 과학계에 가장 절실하고 시급한 과제 같았다.

“앞으로의 미래에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가진 몇몇에 권력이 쏠리고 상당 부분 기계로 대체될 것이라고 하는 것에 대해선 많은 사람이 동의하고 있다. 진짜 창의적이라고 하면 10명만 있어도 우리나라를 먹여 살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점에서 삼성전자의 성공 사례는 우리 사회에 여러 가지 긍정적인 영향을 많이 끼쳤지만, 역설적이게도 오히려 부정적인 영향도 있다. 삼성전자는 생산성을 극대화하는 방식으로 성공했기 때문에 ‘열심히 하면 안 되는 일이 없다’는 사회적 인식을 형성하는 데 공헌을 했다. 그게 결과적으로 우리 사회에 잘못된 메시지를 줄 수도 있다고 본다. 어느 날 갑자기 창의적인 성공 사례가 우리나라에 나타날 수 있다고 본다. 그러면 열심히 하면 다 된다는 신화가 바뀔 수도 있다. 더욱이 중국 변수도 고려해야 한다. 중국 대입 수험생이 930만 명이라고 한다. 우리나라는 60만 명이다. 지능이 비슷하다고 했을 때 아이큐 160 이상이 중국에 100명 있다고 하면 우리나라는 5명 이하다. 한 사람당 20명을 당해내야 하는데 보통 힘든 일이 아니다. 모든 산업이 중국에 종속될 가능성이 큰데 이를 막기 위해 창의성을 발휘해 고급 기술 위주로 지켜내야 한다.”

―삼성미래기술육성재단은 어떻게 만들어지게 됐는가.

“삼성의 본래 취지는 잘 모르겠다(웃음). 이사회에 들어오지 않겠느냐 해서 이사로 활동하다가 최양희 전 미래창조과학부 장관 후임으로 이사장을 맡게 됐다. 괴상한 생각을 하는 사람 위주로 이사회 멤버를 꾸린 것 같다. 최 전 장관이 그나마 가장 보수적이었다. 재단을 설립하는 과정에서 6개월간 난상토론을 했다. 이 과정에서 삼성의 간섭은 전혀 없었고 지금도 없다. 내가 알기론 재단 기금도 중간에 크게 증액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는 이 대목에서 삼성그룹 CEO들에 대해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다른 기업 CEO들은 많이 보지 못해 잘 모르겠으나 삼성그룹 CEO들은 매우 우수하더라. 개중에는 박사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많았는데 그 이유가 뭘까 생각해 보았다. 상대방의 무서움을 알아서 그런 것 같다는 결론을 내렸다. 삼성그룹 CEO들은 출장을 엄청 다닌다. 연구소도 많이 다닌다고 한다. 그 과정에서 눈이 높아진 것이다. ‘센 것’을 많이 본다는 것이 중요한 것 같다. 우리나라 정책 입안자들도 관광 말고 해외를 많이 돌아다닐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눈이 높아져야 높고 새로운 것을 추구하게 된다.”

―응용 분야의 생산성을 중시한다는 삼성에서 기초연구에 투자한다는 것이 다소 이상할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재단을 설립한 것은 전적으로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개인 의지였다. 짐작건대 이 회장은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고민이 많았던 것 같다. 현재는 사업이 잘되고 있지만, 한순간에 뒤처질 수 있다고 생각한 것 같다. 우리나라의 과학기술이 전반적으로 발전해야 삼성전자에도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삼성이 이 재단 활동을 통해 직접적인 이득을 얻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사회공헌 활동 차원에서 이미지 제고는 되겠지만 말이다. 재단은 지원만 할 뿐 특허 등 연구자의 기초과학 분야 성취 결과물은 전적으로 본인 것이다. 본인이 나중에 삼성전자에 기술을 팔 수도 있다. 다른 기업에도 제값 받고 팔 수 있다. 다만 삼성전자에선 조건을 내걸었다. 경쟁회사에 기술을 넘길 경우 삼성전자에는 무상으로 제공하는 것으로 말이다. 그 이외에 다른 조건은 없다.”

―재단의 목표는 무엇인가.

“우선 목표는 인재를 양성하고 학계를 깜짝 놀라게 하는 논문을 내는 것이다. 이를 통해 20∼30년 뒤에 노벨상 과학 부문 수상자를 내는 것이다. 연구비 지원은 적정하게 했다. 미국 유수의 대학에서 조교수 연구실을 만든 뒤 지원하는 금액만큼만 3~5년간 지원하고 있다. 통상 한 연구과제당 연간 3억∼5억 원이 지원된다. 성공하는 사람에게는 연장해서 연구비를 지원한다. 현재 430여 명이 지원대상이다. 이 중에서 20% 정도만 성공했으면 좋겠다. 일절 간섭을 하지 않는다. 1년에 한 번 1박 2일로 모이고 2장짜리 연구보고서를 제출하는 것 이외에 별도 조건은 없다. 5년에 1편의 기막힌 논문이나 특허만 내면 된다. 재단 운영을 통해 한국 과학기술계의 풍토가 바뀌었으면 좋겠다. 생산성만 중시하는 환경에서 창의성을 중시하는 풍토로 말이다.”

―재단을 5년 동안 운영하면서 소기의 성과를 얻었다고 생각하나.

“감히 그렇다고 생각한다. 최근 삼성경제연구소에서 연구자에게 최적의 연구 환경을 조성해준다는 평가를 받았다. 소장 과학자들에게는 우리 재단에 지원을 신청하는 것이 1순위다. 심사는 한국과 미국에서 엄격하게 진행한다. 당신은 특별한 연구를 하고 있으며 한국과 미국의 쟁쟁한 전문가들이 이를 인정하고 있으니 마음 부담을 갖지 말고 자유롭게 연구해 소기의 성과를 거둬달라는 마음만 전하고 있다. 우리 과학기술계에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을 것으로 생각한다. 이른 감은 있지만, 성공사례라고 하면 신의철 카이스트 의과학대학원 전임교수의 연구다. 신 교수가 지난 1월에 면역학 잡지에 논문을 썼는데 엄청난 관심을 받고 있다. 면역 백신을 맞으면 항체가 생기는 것은 상식이다. 또 살아가면서 몸에 각종 항체를 지니게 된다. 그런데 어떤 70대 노인이 A형 간염 바이러스에 감염돼 숨졌다. 간에 있던 천연두, 각종 감기 항체가 A형 간염 바이러스가 들어오자 과민 반응을 보이면서 숨진 것이다. 과민 항체 반응에 대해선 세계 첫 논문이다. 이러한 사람이 전체의 1%라고 한다. 이런 연구는 잘 성숙시키면 20년 뒤 노벨 생의학상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지원만 하고 간섭은 하지 않는다고 해도 운영에 어려움이 많을 것으로 보인다.

“모두 대학이나 연구소에 적을 두고 있는 사람이다. 승진도 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선 학교에서 정한 발표 논문 요건도 챙겨야 한다. 그러면 연구 역량이 분산될 수밖에 없다. 대학 총장들을 만날 때 이 같은 사정을 말한다. 우리나라를 위해 이들에 대해선 양적 평가가 아닌 질적 평가를 해줬으면 한다고 부탁한다. 하지만 대부분 거절당했다. 교칙을 위반할 수 없기 때문이다.”

―미래의 노벨상을 위해 우리 사회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우리 사회가 기다려 줘야 한다. 아무리 지원해줘도 불행한 일이지만 100명 모두가 보답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도 5명이 보답할 것이다. 그 5명을 보호하기 위해 우선적으로 100명을 보호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기에 공평성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과하다고 본다. 우리 사회가 자신감을 갖고 100명 혹은 1000명의 과학자를 보호해야 한다. 비난받는 한이 있더라도 정책 입안자가 이를 용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고도화된 사회일수록 이런 부분에 대해 용납하는 것 같다.”

인터뷰 = 유회경 차장(경제산업부) yoology@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