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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뉴스와 시각 게재 일자 : 2018년 10월 05일(金)
대통령 움직이는 은밀한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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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민 정치부 선임기자

문재인 대통령은 ‘사시 차석 합격-사법연수원 차석 졸업’의 이력을 가진 우수한 두뇌의 소유자다. 오랜 변호사 생활에 공당의 대표도 지냈다. 그런 문 대통령이 정상회담이나 나라 안팎의 주요 행사에서 짧은 모두발언조차 A4 용지를 보고 읽는 모습을 자주 보게 된다. 정상의 발언 한마디 한마디 신중을 기해야 한다는 측면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지만 민망하다는 여론도 적지 않다. 적어도 너무 잦은 ‘A4 보고 읽기’는 일국의 대통령이 자기 생각을 넘어 다른 이의 생각을 전달하려 하는 데서 비롯된 것 아닌가 하는 오해도 가능하게 한다.

자연스럽게, 비대화한 청와대 조직에 눈이 쏠린다. 대통령 뒤에 일국의 정상을 통제하는 은밀한 힘이 있는 걸까. 이런 의구심을 부를 만한 여러 사례가 있다. 굵직한 것들만 추려도 “종전선언 취소 가능”(9월 25일 미 폭스뉴스 인터뷰), “경제정책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다”(8월 25일 더불어민주당 전당대회 축사), “김기식 출장은 국회의원의 평균 수준”(4월 13일 김기식 사태 입장 표명) 발언 등이 떠오른다.

국제적으로 민감한 이슈를 담을 선언문을 만들어내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를 생각한다면 “종전선언은 언제든 취소 가능” 발언은 뜬금없다. 종전선언은 주문했다가 금세 “취소요” 할 수 있는 자장면 배달 같은 게 아니다. 북한이 종전선언을 얻어내기 위한 비핵화 초기 조치에서 ‘핵 리스트 신고’를 빼겠다는 건 ‘언제든 취소 가능한 종전선언’이 빚어낸 역설이다. 문 대통령은 지난해 내놓은 저서 ‘대한민국이 묻는다’에서 대통령이 지켜야 할 가치로 ‘안보’를 지목할 만큼 이 문제의 엄중함을 잘 알고 있다. 그 머릿속에서 이렇게 가벼운 발언이 나왔을까.

“경제정책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말 역시 문 대통령 본인의 소신이라고 보기 어렵다. 적지 않은 ‘문재인 친화적’ 원로들조차 소득주도성장의 한계를 지적했고 경제지표가 그 실패를 말해주는 상황에서 문 대통령도 현 경제정책이 몰고 올 후과(後果)에 대한 위기감이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를 고집하는 건 특정 이념을 기반으로 한 현 경제팀에 대한 뿌리 깊은 의존성을 말해주는 것이다. 김기식 금융감독원장 조기 낙마를 부른 피감기관 지원 해외출장 논란 당시 문 대통령이 “국회의원의 평균 수준” 운운한 것도 마찬가지다. 국회의 국정 비판에 대해 비도덕성 폭로로 대갚음하듯 하는 게 의회주의자인 대통령 머릿속에서 나왔을 리 만무하다. ‘청와대 정부’ 내 둥지를 틀고 국가주의적 국정 운영에 젖은 누군가의 생각에 물든 결과일 것이다.

이렇다 보니 온·오프라인에서는 문 대통령의 ‘역할극’ 논란이 뜨겁다. 누군가 각본을 쓰고 연출을 하면 문 대통령이 ‘대통령역’을 하는 것이라는 억측도 나돈다. 미 블룸버그통신의 ‘문재인=북한 수석대변인’ 표현이 도마 위에 오르고, 문 대통령을 ‘가게무샤’로 부르는 그룹도 생겼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 며칠 전 중간선거 지원 유세에서 미국의 대통령 노릇이 쉽지 않다고 설명하면서도 “(남들처럼) 대통령 노릇 하는 건 아주 쉬운 일”이라며 우스꽝스러운 표정으로 A4 퍼포먼스를 연출했을 때 뜨악했지만, 한편으로는 그게 문 대통령이 남긴 인상일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minski@
e-mail 허민 기자 / 정치부 / 부장 허민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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