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과 권력이 만나…‘정교한 파시즘’의 시대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지난 1월 아이티 시위대들이 스탈린, 히틀러, 무솔리니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나란히 그린 그림을 들고 항의하고 있다. 앞서 트럼프 대통령은 아이티와 아프리카 국가들을 겨냥해 “우리가 왜 거지소굴 같은 나라 사람들을 받아야 하느냐”고 밝혀 격렬한 반발을 일으켰다. AP 연합뉴스

- 친절한 파시즘 / 버트럼 그로스 지음, 김승진 옮김 / 현암사

선진자본주의 기업·정부 결탁
자유·인권 등 앞세운 화법으로
기득권 세력, 이익 추구에 혈안
교묘하게 ‘경제 불균형’ 더 심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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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그마치 38년 만이다. 지난 1980년 미국에서 출판된 이 책이 이제야 첫 한국어 번역판으로 출간됐다. 한 세대 전에 나온 뿌옇게 먼지 덮인 책을 현재의 시간으로 단번에 소환해낸 것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새로운 형태로 등장하는 파시즘의 위험을 경고하는 이 책이 트럼프 대통령 재임 중일 때 다시 불려 나왔다는 것은 의미심장한 일이다.

이 책이 새삼 다시 화제가 되고 있는 것은 작금의 현실, 미국의 정치적 상황과 유럽을 중심으로 한 극우 포퓰리즘에서 저자가 38년 전에 예측했던 ‘파시즘의 징후’가 느껴지고 있기 때문이다. 놈 촘스키 매사추세츠공대(MIT) 명예교수도 2016년 연말, 미국의 한 비영리 인터넷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이 책 얘기를 꺼냈다. 촘스키 교수는 트럼프가 이끄는 미국 정치의 우경화와 유럽에 창궐하던 극우 민족주의를 ‘히틀러 시대’에 빗댄 뒤 “들끓는 대중의 공포와 분노를 교묘히 이용한 ‘친절한 파시즘’이 현실이 될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파시즘이면 파시즘이지, ‘친절한 파시즘’이란 무슨 얘긴가. 책의 설명에 따르면 이렇다. 20세기 세계대전의 와중에 이탈리아, 독일, 일본 등에서 창궐했던 것이 잔혹한 무력을 동원한 고전적 형태의 파시즘이라면, 선진자본주의 국가에서 기득권과 정부가 결탁해 교묘한 관리와 조작으로 자유를 박탈하는 것이 바로 새로운 의미의 파시즘이라는 것이다. 법의 테두리 안에서 합법적으로, 또 신사적인 모습으로 작동하는 이런 파시즘을 저자는 ‘친절한 파시즘’이라고 규정했다.

이런 친절한 파시즘은 고전적인 파시즘과는 달리 독재자가 특정한 목적으로 정교하게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층위의 기득권 세력들이 연합해 자신들이 맞닥뜨린 위기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결과에 가깝다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특권과 권력을 확장하려는 권력자들이 저마다의 이익을 추구하며 연합하는 과정에서 파시즘이 발동하는 것이란 얘기다. 그렇다면 친절한 파시즘이란 목적과 계획 아래 실행되는 게 아니라, 상황 논리에 따른 결과로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저자의 주장대로 ‘친절한 파시즘의 시대’가 도래한다면, 과연 그 폐해는 어떤 모습으로 드러나는 것일까. 저자가 그려 보여주는 ‘친절한 파시즘의 세상’은 이렇다. 기득권 세력들은 자유와 해방, 민주, 인권 등을 앞세운 화법을 쓰며 권력을 확장하고 자신의 이득만을 탐한다. 이 과정에서 초래되는 환경오염이나 물자부족, 실업, 인플레 전쟁의 피해는 수많은 보통사람에게 전가된다. 조직의 구조조정은 상시화되고, 조직의 이익보다 양심이나 정의를 앞세우는 이들은 변방으로 쫓겨난다. 폭력은 장려되지는 않지만, 사회가 구성원들에게 언제든 행할 수 있는 준비가 돼 있음을 과시하는 것만으로도 ‘두려운 분위기’가 만들어진다. 케케묵은 것으로 여겨졌던 매카시즘, 감시와 사찰 등도 기득권 핵심부에 뿌리를 두고 ‘공산주의’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 불안정하거나 기술적으로 적합도가 떨어지는 사람, 고용되기에 부적절한 사람들을 솎아내는 방식으로 더 정교하게 작동한다. 저자는 이러한 과정을 통해 시민의 자유와 권리는 교묘하게 박탈당하고 경제 불균형은 심화하며, 저항은 무력화된다고 봤다.

저자가 예측한 사회가 작금의 정치적 현실과 비슷한 모습이라 해도, 한 세대 전에 출간된 이 책의 이야기에는 억측과 과장도 있고, 빗나간 주장도 적잖다. 그렇지만 저자가 지목하는 ‘파시즘을 구축하기 위해 진격하는 다섯 개 대열’ 이야기는 주의 깊게 들여다 볼 만하다. 그 대열의 첫 번째에는 광적이고 극단적인 신조를 내세우며 약자를 억압하는 무리가 있고, 두 번째 대열에는 전쟁을 책동하며 폭력을 미화하는 ‘광범위한 자살부대’가 있다. 세 번째는 막대한 부를 가진 특권 부대이며, 네 번째 대열은 정책과 제도를 통해 헌법을 훼손하는 무리다. 마지막 다섯 번째 대열에는 앞서 네 개의 대열을 정당화하고 독려하는, 가공된 신화다. 그렇다면 진격하는 이 대열을 어떻게 막아낼 것인가. 저자는 답을 지배층이 아닌 다수 지도자의 행동 지향적인 비전에서 찾았다. 그러므로 이 책은 파시즘의 위협을 말하지만, ‘더 진정한 민주주의’에 대한 얘기다. 720쪽, 3만 2000원.

박경일 기자 parking@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