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신사도 청소년도… 한마음으로 초를 켰던 ‘그해 겨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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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속에는 / 차재혁 글, 최은영 그림／노란상상

초겨울 밤, 서울 거리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장면 중에 같은 방향으로 걷는 앞사람의 뒷모습이 추가됐다. 그해 가을과 겨울을 휩쓸었던 공동의 기억 때문이다. 초를 켜는 일에 대해서도 조금 다른 감각을 갖게 됐다. 바람 속에서 낯선 이에게 불빛을 나누어주는 두 손의 그림자는 돌이켜보아도 따뜻하다.

‘내 마음속에는’의 첫 장면은 이른 저녁, 남산타워가 바라보이는 사무실 창문에서 시작한다. 낡은 라디에이터 한 대, 썰렁한 어느 프리랜서의 작업실에는 강아지 한 마리가 유일한 동료다. 다들 앞으로 나아가는데 혼자만 길을 잃은 것 같은 주인공은 오늘도 별다른 소득 없이 하루를 마감하려는 참이다. 짙은 함박눈은 세상을 멈출 것처럼 밤하늘을 채운다.

시간은 오후 6시 24분, 주인공은 꼭 가야 하는 곳이 있다며 같이 가자고 몇 군데 전화를 걸지만, 번번이 거절당한다. 각자에게 이 밤은 ‘눈도 많이 오고, 할 일도 있고, 춥기도 한’ 것이다. “그럴 시간이 있으면 차라리 네 일이나 하라”는 충고도 날아온다. 망설이다가 사무실을 나서고 강아지는 기다렸다는 듯이 일어서서 배웅한다. 골목 하수구에서 하얗게 올라오는 뜨거운 공기도 주인공의 잰 발걸음을 지켜본다.

이 그림책은 2016년 11월에 열렸던 촛불집회의 하루를 재현했다. 정확히 말하면 촛불집회에 참석하기 직전까지 한 시민의 마음속에서 일어난 일을 다룬다. 주머니에 손을 넣고 바삐 걷는 사람들은 지하철 승강장에 각각 혼자 서 있지만, 한마음이라는 것을 그림에서 알아볼 수 있다. 안내견의 도움을 받아 나온 시각장애인도, 중절모의 노신사도, 방울 달린 털모자를 쓴 청소년도 옷을 단단히 챙겨 입고 한 방향의 지하철을 탄다. 주인공은 어쩌면 이 사람들이 자신과 같은 곳에 가는 것이 아닐까 짐작하지만, 독자는 더 먼저 그들의 행선지를 알아차린다. 어린이의 가방에 달린 노란 리본, 5호선 광화문역을 암시하는 지하철 역사 곳곳의 ‘5’라는 숫자가 주인공의 목적지를 설명해준다.

“오길 잘했어”라는 주인공의 혼잣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그날을 회상하는 독자들이 많을 것이다. 그래 봤자 달라지는 것이 없다는 말로 다 함께 만든 이 어려운 변화를 무기력하게 만들지는 말아야겠다고 그림책은 말한다.

2016년 볼로냐 아동도서전에서 올해의 일러스트레이터로 선정됐던 최은영 작가의 잔잔하지만, 힘 있는 그림이 읽는 내내 안도감을 준다. 낙망보다는 씩씩한 한 걸음을 격려하는 작품이다. 68쪽, 1만4000원.

김지은 어린이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