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워인터뷰>“文정부, 김정은 비핵화 선의만 믿고 무장해제… 안보 구멍”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북한 엘리트 외교관 출신인 태영호 전 영국 주재 북한대사관 공사가 지난 23일 문화일보에서 파워 인터뷰를 하고 김정은 정권의 대남전략과 문재인 정부의 대북전략을 비교 설명하고 있다. 태 전 공사는 “김정은의 최종 목적은 대북제재 해제로 어느 정도 먹고사는 경제를 일구고 핵도 보유해 역내 발언권을 갖는 독재자가 되는 것”이라며 “지금까지는 그 시나리오대로 진행되는 중”이라고 말했다. 신창섭 기자 bluesky@

태영호 前 영국 주재 북한대사관 공사

北정권 폭압·폭력 변함없는데
우리만 급격하게 변하고 있어
남북군사합의, 核 그대로 두고
南 전력 약화… 北에 끌려다녀

경제 협력하면 北이 核 포기?
미군 철수해도 절대 포기안해
김정은 노림수는 제재 해제로
먹고살 만한 경제수준 만들고
核도 보유해 영향력 강화하기

태영호 전 주영(駐英) 북한대사관 공사가 남쪽으로 온 지 2년이 넘었지만 그가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게 있다. 대한민국 진보세력의 의식구조다. 남쪽의 인권 문제엔 예리하게 반응하는 이들이 북의 인권 탄압에는 왜 침묵할까, 남쪽의 국정농단에는 극렬히 저항하는 진보가 왜 북한의 권력 세습에는 입을 막을까, 이런 게 풀리지 않는 의문이다. 태 전 공사는 “왜 대한민국 진보 정권의 인권은 휴전선 앞에서 멈추나”라고 묻는다. 태 전 공사는 문재인 정부의 비핵화 견인차 역할, 안보관, 남북관계와 한·미 동맹의 운용에 대해서도 불안한 시선을 감추지 못한다. 그는 “문재인 정부가 김정은 정권의 선의만 믿고 먼저 무장해제를 하는 건 잘못됐다”고 우려했다. 그는 “한국은 북한에 뭔가를 주면 핵을 포기할 것이라고 믿는데, 순진한 생각”이라고 말했다. 북쪽의 폭압성과 폭력성이 하나도 바뀐 게 없는데도 남쪽만 급격히 변하는 건 위험한 평화로 이어질 수 있다는 걱정도 했다. 태 전 공사와의 인터뷰는 지난 23일 오후 문화일보에서 2시간 반가량 진행됐다. 권력의 횡포에 독한 회의를 품고 자유를 찾아 사선을 넘은 북한 전직 외교관이 지금 느끼는 건 자유를 찾았다는 유포리아(다행감)일까 아니면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아포리아(난관)일까.

―태 전 공사는 대한민국에서 북한의 내부 사정을 가장 잘 아는 분 중 한 명일 거다. 정말 궁금한 것은 북한 내 대남·대외전략의 실질적인 디자이너가 누구냐 하는 것이다.

“총디자인을 어느 누가 한다고 보기 어렵다. 한 사람을 꼽기는 힘들다. 집단적 결정으로 봐야 한다. 북한 대외전략은 각 부문 내 엘리트들의 집단토론을 거친 산물이다. 대남·대외협상과 전략을 짜는 인맥이 오래 유지돼 온 것도 자산이다. 북한은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라인과 사람이 안 변했다. 김영철은 1991년 남북합의서 때 북측 수석대표였는데 지금도 여전히 대표다. 핵 협상은 외무상인 리용호가 1993년 북핵 협상 때부터 지금까지 한다. 그동안 한국은 수십 명이 바뀌었다. 팀을 자꾸 바꾸고 베테랑을 내몰면 전문성과 일관성을 보장하기 어렵다. 북한은 죽지 않는 한 그 팀과 성원이 계속된다. 옛날부터 하던 인물들과 새로 대학을 졸업한 라인까지 다 살아 있다. 그게 집단 결정의 힘이고 북한 대외협상의 힘이다.”

―요즘 당 통일전선부장인 김영철이 워낙 두드러져서 하는 얘기다.

“그건 이렇게 이해해야 한다. 지금은 핵 협상 국면이다. 원래 핵 협상은 외무성이 담당했다. 미국과의 협상이니까. 그렇다면 최고 책임자는 리용호여야 한다. 그런데 왜 김영철이 하느냐. 혹시 대남·대외전략이 다 김영철한테 간 거 아니냐, 이런 의문이 들 거다. 이게 착각이다. 북한의 전략과 전술을 들여다보면 김영철이 쥘 수밖에 없는 구도다. 올해 초 김정은의 신년사를 보자. 전반부에서 북이 핵보유국 됐다면서 현실임을 인정하라고 했다. 후반부에는 평창동계올림픽과 민족 공조가 나온다. 즉 2018년 김정은 신년사의 핵심은 ‘핵을 인정하는 조건에서 민족 공조로 가자’는 거다. 그에 따라 과거와는 달리 지금은 핵 협상에서 한국을 앞세우고 간다. 우리 정부 입장도 북한의 비핵화를 견인한다는 것이고.”

―미·북 사이에 한국이 중재자, 견인차 역을 하다 보니 대남전략을 담당하는 통전부가 나섰다는 뜻인가.

“그렇다. 비핵화 견인차의 운전사인 한국과 연계를 가지려면 통전부가 나서야 한다. 그러니 김영철이 협상을 총괄하는 건 당연하다. 미·북 1차 정상회담이 깨지는 걸 막은 것도, 미·북 2차 정상회담을 만든 것도 문재인 정부다. 그때마다 김영철의 통전부가 나선 거다. 외무성이 나설 일이 아니잖나. 나중에 미·북 두 나라만의 협상 국면으로 갈 때는 리용호가 나서겠지만. 한국이 비핵화 견인 기관차에 북한의 핵 보유 차량을 달고 핵보유국 정거장으로 운전해 가게 만든다는 게 현시점 북한의 전술이다. 실제로 지금 그렇게 가고 있고.”

―북의 ‘조선반도 비핵화’가 선대의 유훈이라는 건 맞나.

“맞는다. 그러나 용어 개념 정리부터 해야 한다. 용어 개념이 불명확해 북한과의 모든 문건, 협상 등을 애매하게 해놨다. 제네바 기본합의(1994년)도 9·19 공동성명(2005년)도 그래서 깨졌다. 우리가 생각하는 비핵화 개념과 북의 조선반도 비핵화는 전혀 다르다. 조선반도 비핵화는 핵무기를 갖는 군대가 없어져야 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북한군과 미군이다. 핵을 가진 미군의 존재가 있는 한 북이 핵무기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조선반도 비핵화는 곧 미국이 한반도에서 나갈 때까지 북핵이 존재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앞으로 협상에서는 ‘한반도 비핵화’가 아니라 ‘북핵 폐기’라는 정확한 용어를 사용해야 한다.”

―그럼 미군만 철수하면 북 정권은 진짜로 핵을 포기할 수도 있는 건가.

“미군이 나가도 북은 핵을 포기하지 않는다. 절대 핵은 포기할 수가 없다.”

―북이 핵 보유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하는 근거가 있나.

“예를 들겠다. 북한의 경제적 어려움은 여러 원인이 있지만 특히 에너지 문제가 크다. 1970년대에는 한국과 경제적으로 큰 차이가 나지 않았다. 당시 북은 소련으로부터 핵발전소를 들여오게 돼 있었다. 소련은 두 가지 단서를 달았다. 소련이 사용후핵연료를 다 가져가는 것,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찰을 받아 핵 개발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북이 그때 소련으로부터 핵발전소를 들여왔다면 에너지가 해결됐을 거고 경제도 얼마나 발전했겠나. 그런데 안 했다. 경제 발전과 핵 보유 둘 중에 김일성은 핵무기를 갖는 쪽을 택한 거다. 경제 발전에 지장이 있더라도. 그러니까 1970년대에 벌써 ‘선 핵 보유, 후 경제 발전’이라는 큰 방향을 정한 것이다.”

―김정은의 궁극적 목적은 뭘까. ‘경제부국의 독재자’가 되는 건가.

“경제부국이 될 수 없다. 핵을 포기하지 않는 한. 김정은 본인도 그걸 안다. 그럼 김정은이 핵을 포기하면 되지 않느냐고 하는데 그렇게 못한다. 김정은의 목적은 대북 경제제재를 해제해 ‘어느 정도 먹고살 만한 경제를 만들고 핵도 보유하는 것’이다. 그래야 역내 영향력과 발언권을 키울 수 있으니까. 한국이 착각하는 게 북한에 돈 주고 투자하고 경제협력하면 핵을 포기할 것이라고 믿는 것이다. 순진한 생각이다.”

―북한이 과연 얼마나 제대로 개혁·개방을 할 수 있을까.

“북은 베트남식, 중국식 개혁·개방을 절대 못한다. 경제적으로 성공한 나라들은 필수 요인이 있다. 대중의 정보 접근을 허용하고 이동의 자유를 보장하고 정치조직 생활구조를 해제해야 한다. 중국이나 베트남은 이 세 가지를 실행하고 개혁·개방으로 나아갔다. 북은 그럴 수 없다. 그게 안 되면 경제부국은 불가능하다.”

―북한 체제가 지속가능성이 있을까. 어떻게 보나.

“북한의 신분사회 구조를 봐야 한다. 북한은 세습통치라는 특이한 정치 구조를 가졌다. 북한 주민을 핵심계층, 기본 군중, 적대계층으로 등급을 매겨 사회를 신분화·성분화했다. 김일성 가계 권력 세습뿐 아니라 상층부 핵심계층의 특전과 특권도 세습된다. 일종의 카스트제도다. 신분사회의 조선이 사대부에 의해 유지됐듯 북한도 이들 핵심계층이 유지하고 있다. 지금 내 나이 50대는 1960년대에 태어나 1970∼1980년대에 최절정기를 경험했다. 이 세대는 쉽게 이탈하는 경향이 드물다. 우리 아이들은 북한의 시스템과 이념이 작동하는 걸 보지 못했다. 따라서 북한 체제는 내 동년배가 퇴직하는 향후 10년가량 더 갈지 몰라도 후세대들이 주역이 되는 시기가 오면 어떻게 될지 모른다. 난 북 체제가 앞으로 20년 이상은 못 간다고 본다.”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의 4차 방북 때 김정은 옆에 김영철도 아니고 김여정 혼자 앉았다. 김정은은 왜 김여정에게 의존하나.

“김정은이 그만큼 김정일 정권보다 지반이 약하다는 걸 보여준다. 최측근인 김영철도 못 믿겠다는 것이다. 미국과 협의하면서 융통성을 가지려 해도 혈육이 아닌 다른 사람이 보는 게 부담스러웠을 거다. 지금 북한은 ‘김정은-김여정 체제’로 재편 중이다.”

―강경화 외교부 장관이 북한의 핵 리스트 신고 검증을 종전선언 뒤로 할 수도 있다는 뉘앙스로 발언했다.

“본인은 딱 부러진 발언이 아니었다고 말하지만 그런 뉘앙스를 풍긴 것 자체가 전략적 실수였고, 북 비핵화 과정을 지체시키고 지연시킨 꼴이다. 핵을 가진 나라의 비핵화 협상 출발점은 핵 리스트 신고다. 핵 리스트 신고를 뒤로 미루고 일부 시설을 폐기하면서 보상을 요구하는 건 비핵화 협상이 아니라 핵 군축 협상일 뿐이다. 군축을 시작하면 핵보유국으로 인정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유럽 방문 중에 ‘북한의 비핵화가 되돌릴 수 없는 상황이 되면 제재도 해제해 주자’는 제안을 했는데, 핵무기가 있는 상태에서 부분적으로 제재를 해제하면 유엔 제재의 법적 기초가 허물어지고 북핵 보유를 인정하는 모순에 빠진다. 핵 리스트 제출도 안 된 현 상황에서 핵 신고를 미루자, 부분적으로 제재를 해제하자, 이런 발언은 대단히 위험하다.”

―대북제재의 해제, 어느 단계에서 시작해야 하나.

“북한의 진정성이 중요하다고 본다. 일단 핵 리스트를 내놓고 미국이 ‘우리가 가진 정보와 거의 맞는다. 진정성이 보인다’며 ‘OK’를 하면 거기에 연동해서 제재 해제를 할 수 있다. 문재인 정부가 출범 당시 발표한 한반도 정책 4대 전략 중 두 번째 항목인 ‘남북관계와 비핵화의 병행 추진’이 1년 만에 수정되는 형국이다. 대단히 위험하다.”

―북의 핵 리스트에 올라가야 할 아이템이 대략 몇 개나 될까.

“최소 몇 백 개는 된다. 2005년 9·19 공동성명 채택 후 IAEA가 영변 5개 핵 시설을 사찰·검증하는 데 1년 반 걸렸다. 지금 영변에 390개의 시설이 새로 생겼다. 핵 리스트 제출 없이 그냥 북이 하자는 대로 하면 아마 검증·사찰만 해도 100년, 200년이 걸릴 거다. 수백 개 리스트에 대해 전면적이고 동시적인 사찰·검증을 진행해야 한다.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모르고 찔끔찔끔하는 건 핵 군축 과정에 불과하다. 이렇게 되면 비핵화는 못한다.”

―추론의 영역인데, 문재인 정부는 ‘완전하고 검증가능하며 불가역적인 비핵화(CVID)’를 할 수 있다고 볼까 아니면 그렇게 되면 좋지만 안 돼도 할 수 없다고 보는 걸까.

“문재인 정부 입장이 진정 CVID를 하자는 건지, 이것이 불가능하다고 보고 ‘핵 있는 공존 평화’로 가자는 건지는 솔직히 판단하기 어렵지만, 북의 핵을 인정해 주면서 서서히 비핵화로 견인한다는 전략인 것은 분명하다.”

―일각에서는 북이 얼마간의 핵을 가져도 사용하지 못할 것이다, 따라서 핵은 ‘미닝리스(의미 없는) 서브젝트’다, 라고 얘기한다.

“이런 식으로 가면 북한의 핵 보유로 이어지는 수밖에 없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나. 미국의 핵우산에만 기댈 수 있나. 최소한의 억지력이라도 가지려면 재래식 전력을 고도화, 현대화해야 한다. 국제시장에서 무기값은 천문학적으로 올랐다. 핵 있는 북한과 공존하려면 엄청난 세금을 써야 한다. 안보 비용이 천문학적으로 증가할 것이다. 그리고 북이 핵을 보유해도 절대 쓰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 동의할 수 없다. 김정은이 올 신년사에서 분명히 말했다. ‘핵 단추가 있고 이건 위협이 아니다’라고.”

―그래도 적잖은 국민이 전쟁에 대한 위협에서 벗어났고 평화가 유지되고 있다고 평가하지 않나.

“올 들어 북한 도발이 없었고 평화가 유지된 건 사실이다. 그렇더라도 이 상태가 지속해 ‘핵 있는 평화’로 가는 게 옳은가. 핵 있는 평화는 진짜 평화가 아니다. 그건 위험한 평화이고, 굴종적 평화이며, 엄청난 안보 비용을 치러야 하는 평화다.”

―북한 비핵화의 왕도(王道)를 간단히 정리하면.

“일단 대북제재를 확실히 해야 한다. 제재는 평화를 깨는 게 아니라 오히려 북에 대한 군사 옵션을 막는 가장 효과적이고 평화적인 수단이라는 인식을 가질 필요가 있다. 그러면서 핵 리스트 신고·제출·검증의 절차를 밟아 거기에 대한 반대급부를 주는 식으로 가야 한다. 비정상적 코스로 가면 해법을 찾을 수 없다.”

―올해 벌어진 미·북 정상 및 고위급 회담을 종합적으로 평가하면.

“미·북 회담은 큰 실수였다. 시행착오가 많은 회담이었다.”

―중간선거를 앞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조급함이었을까?

“트럼프의 정책적 기조와 심리를 보면 북의 비핵화보다 안정된 북핵 관리 쪽을 더 신경 쓴다. 핵실험을 안 하게 하고 미국에 위협을 주는 상황이 오지 않도록 위기관리를 하는 게 트럼프의 최대 관심사로 보인다.”

―그건 미국엔 어떨지 몰라도 한국엔 별로 좋은 시나리오가 아닌데.

“한국엔 비극이다. 안정된 핵 관리라는 건 핵을 가진 평화이고 그건 굴종적 평화니까. 우리가 진정한 비핵화 중재자이자 견인차가 되려면 북한의 핵 리스트 신고를 뒤로 미루자고 할 게 아니라 하루 빨리 제출하도록 해야 한다고 북과 미국을 재촉했어야 했다.”

―조만간 북핵을 인정하는 트럼프 독트린이 나올 수도 있겠네요.

“트럼프가 비핵화 안 서두른다, 북한과 공존해서 가겠다, 이런 걸 트럼프 독트린의 핵심으로 이야기하는 것 같다.”

―탈북의 진짜 동기는 뭔가. 아이들과 헤어져야 한다는 것에 대한 불안감이 컸던 것 아닌가.

“그게 다가 아니다. 세습에 대한 회의를 오래도록 품었다. 북한 권력층에도 권력 세습에 대한 비판적 생각을 하는 사람이 아주 많다. 최고위층 자녀들 사이엔 우리 할아버지도 항일투쟁하고 북한 정권 만들 때 공을 세웠는데 김일성 가계만 왕처럼 사느냐는 이런 심리가 깔려 있다.”

―올 들어 세 차례의 남북정상회담을 총평한다면.

“잘한 점도 있고 잘못된 것도 있다. 북한에 대해 대화도 하고 간여도 하는 정책을 편 것, 김정은이 핵미사일 실험 안 하고 이산가족상봉도 하게 하고 이건 잘했다. 북한 표준시를 서울과 같게 만든 것도 정말 잘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비핵화 노상에서 북한의 전략에 너무 말려들었다. 우리식대로 견인해야 하는데 우리가 오히려 끌려가지 않나 생각한다. 북한은 한국과의 관계에서도 ‘선 남북관계 개선 후 비핵화’ 도식을, 미국과도 ‘선 신뢰 구축 후 비핵화’ 전략을 썼다. 비핵화가 항상 뒤에 놓이는데 이제라도 정신 차리고 병행 추진으로 가야 한다.”

―지난 9월 평양에서 발표된 남북 군사합의서는 어떤가.

“상당히 부정적이다. 군사합의 목적은 전쟁 방지와 평화로 가기 위한 징검다리를 놓는 것이다. 핵심은 핵이다. 비핵화 내용은 전혀 없고 남쪽 재래식 무력만 약화했는데, 이건 정상적인 군축 합의가 아니다. 양측 우세를 모두 약화해야 했다. 북핵은 건드리지도 못하고 우리의 대북 정찰 기능을 마비시키는 비행금지구역 설정, 북방한계선(NLL)을 무력화하는 서해 평화수역 설정 이런 건 한참 잘못됐다. 남북 군사합의는 핵은 그대로 두고 우리만 무장해제시켜 안보에 구멍을 뚫은 거다. 핵을 가진 국가의 핵은 비켜 두고 핵 없는 국가의 재래식 무력만 줄이는 것은 완전히 절름발이 군축이다.”

―문재인 정부가 왜 그랬을까.

“이 정부가 북 정권에 포획됐다고까지는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비핵화를 하겠다는 김정은의 선의를 너무 믿고 우리가 먼저 움직여 냉전 구조를 허문다는 기조가 문제다. 문재인 정부는 김정은 정권의 선의를 믿고 출발했지만 그의 저의에 끌려다니는 형국이다. 한반도 냉전 구조의 원인은 북한의 대내 폭압성과 대외 폭력성에 있다. 이를 외면하고 김정은과 화해 협력하면 냉전 구조가 허물어지는 것처럼 여기는 건 현실 기피다. 그러다간 큰 전략적 우를 범할 수 있다. 북의 폭압성과 폭력성이 하나도 안 변했는데 우리만 급격히 변하고 있다. 남북관계의 역사는 북한의 선의가 계속 바뀌었다는 걸 실증한다. 2007년 10·4 정상선언의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천안함 폭침, 연평도 포격, 6차 핵실험이 있었다.”

―문 대통령과 방북 수행단이 평양의 집체극 ‘빛나는 조국’을 직접 관람하고 좋은 평가를 했는데.

“뭐 현지에서 칭찬하는 건 이해해줄 수 있다. 그런데 돌아와서까지 그런 건 알 수가 없다. 정상적인 외국 정치인들 치고 북한 집체극을 칭찬하는 사람은 없다. 칭찬하는 순간 그 정치인의 자질이 드러나게 되기 때문이다.”

―한·미 동맹의 현주소는.

“불안한 상태다. ‘의견 조율’이라는 말만 되풀이하는데 그 속에 한·미 간 엇박자가 보인다. 동맹이 위험해질 수 있다. 안보는 북한의 선의가 아니라 자강 능력과 한·미 동맹 강화에 의존해야 한다.”

―신변에 대한 테러 위협이 있나.

“북측으로부터는 아직 없었다. 언제 벌어질지는 모를 일이다. 북한이 하는 게 눈에 보이겠나. (탈북했으나 북 공작원에게 피살된) 이한영 사건도 그렇고. 황장엽 선생 암살하려던 북한 공작원도 잡혀서 아직 감옥에 있지 않나.”

―문재인 정부의 대북 인권 정책에 대한 논란이 있다. 어떻게 보나.

“문 대통령이 김정은을 만나 협상하면서 인권 개선을 요구하는 것까지는 바라지 않겠다. 하지만 국내의 북한 인권 예산도 다 없애고 재단 사무실도 없애고 이건 문제다. 예산 108억 원 중 100억 원 덜어내고 겨우 8억 원 남겼다. 선진국은 진보 세력이 인권에 더 관심이 있는데 왜 대한민국 진보 정권의 인권은 휴전선 앞에 가서 멈추나. 탈북민 출신 기자 논란도 그렇다. 북한이 요구하지도 않았는데 우리 정부가 스스로 돌발 상황을 우려해 배제했다고 하던데 이해할 수가 없다. 스스로 알아서 북한에 잘 보이기 위한 행동을 한 건데, 대단히 잘못됐다고 본다.”

―한국의 진보가 북의 핵, 세습, 인권에 대해서는 너그러운 경우가 더러 있다.

“한국은 북한과 접경에 있는 반공의 최전선 같은 지역이다. 내가 유럽에서 오래 생활하지 않았나. 유럽의 사회민주주의나 진보 중에 북한을 지지하는 곳은 거의 없다. 유럽 공산당은 북한과 거의 단절했다. 진보는 반인권, 세습 이런 것과는 대척점에 있다. 세습과 불평등의 나라 북한은 공산주의의 완전한 이단 취급을 받는다. 그런데 한국의 진보는 용공도 아니고 거의 다 친공(親共) 쪽이다. 그게 참 특이하다. 외국 사람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북한 권력층도 내심 한국의 진보가 왜 저러는지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인터뷰 = 허민 정치부 선임기자 minski@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