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미국 할리우드 배우 에단 호크가 영화 ‘본 투 비 블루’에서 쳇 베이커 역을 맡아 트럼펫을 연주하고 있다. 미국의 재즈 뮤지션이자 트럼페터인 쳇 베이커는 1950년대 쿨 재즈를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음악적 성공에도 불구하고 약물중독으로 자기파괴적 삶을 살았다.
■ 윤성은의 스크린 인물학 - ④ ‘본 투 비 블루’의 쳇 베이커
꿈의 재즈무대 ‘버드랜드’서
영화의 오프닝과 클로징 장식
매력 발산했던 音樂 공간이자
열등감에 藥에 빠져들었던 곳
외상 약값탓 갱단에 폭행당해
1년간 음악 손에서 놓았지만
한 여성에 대한 사랑으로 재기
‘위대한 사랑의 힘’ 신화 완성
난장판이었던 실제 삶과 달리
불운아·순애보의 남자로 묘사
에단호크가 열연한 쳇의 우울
퇴폐미·순수미 적절히 잘 표현
제임스 딘을 닮은 외모 덕분이었을까, 보호본능을 유발하는 특유의 분위기 때문이었을까. 어쩌면 단지 백인 재즈 연주자였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재즈의 역사를 놓고 볼 때, 결코 찰리 파커나 디지 길레스피, 마일스 데이비스 같은 선배들만큼 위대한 뮤지션으로 평가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쳇 베이커(Chet Baker·1929∼1988)의 인기가 한때 그들을 앞질렀다는 사실, 그가 부른 노래들이 지금까지도 대중에게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은 그에 대한 갖가지 환상을 불러일으킨다. ‘본 투 비 블루’(감독 로버트 뷔드로, 2015)는 그런 신화적 상상의 자장 아래 만신창이였던 쳇 베이커의 실제 삶을 어떻게든 이해해 보려는 애정 어린 시도라고 할 수 있다.
◇1954년, 뉴욕 ‘버드랜드’
‘본 투 비 블루’에 감명을 받은 관객들, 혹은 이 영화를 보면서 쳇 베이커(에단 호크)에게 (다시금) 심취하게 된 이들에게는 멋쩍은 정보가 될 수 있겠으나 이 작품은 사실상 실제 그의 삶과는 동떨어진 내용으로 점철돼 있다. 축소, 과장, 변형 정도가 아니라 숫제 지어낸 내용이 많다는 얘기다. 또한, 마약과 폭력으로 자기 자신은 물론이요, 가족과 주변인들까지 삶의 나락으로 끌어내렸던 인간 말종으로서 쳇 베이커의 모습은 거의 묘사되지 않는다. 1973년부터 그와 10년 동안 연인으로 지냈던 ‘루스 영’도 “그에게 20초 만에 사로잡혔지만, 바로 그때부터 내 인생은 쉴 틈 없이 돌아가는 지옥과 같았다”(‘쳇 베이커’, 제임스 개빈)고 언급한 바 있으니, 그의 매력이란 문자 그대로 마성(魔性)적인 것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신 영화는 못 말리는 약물중독자에 난봉꾼이었던 그가 한 여자를 진정으로 사랑하게 되면서 약을 멀리하고, 피나는 노력 끝에 다시 뉴욕 ‘버드랜드(Birdland)’에서 연주하게 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물론, 마지막 장면은 그 무엇도 약에서 그를 구원하지 못했다는 것을 암시하지만, 그를 바라보는 태도는 비난보다 연민에 훨씬 가깝다.
‘본 투 비 블루’는 쳇 베이커의 인생 중 1954년과 1966년, 두 개의 시점을 대비시키며 흘러간다. 흑백으로 구현된 1954년은 미서부에서 연주하던 쳇이 뉴욕에 입성했던 해로, 그가 일생을 통틀어 가장 큰 인기를 누리던 시절이다. 영화는 1분짜리 오프닝 신 바로 다음에 브로드웨이의 유명한 재즈클럽, ‘버드랜드’에 선 쳇 베이커 쿼텟의 연주를 보여준다. 여기서 찰리 파커의 별명을 딴 이름의 버드랜드 클럽은 영화의 초반부와 마지막 신을 장식하는 의미심장한 공간이다. 먼저, 찰리 파커는 쳇의 음악적 우상이었을 뿐 아니라 그에게 마약이라는 세계를 열어준 인물이었다. 그리고 두 번의 버드랜드 신 모두에서 쳇은 마일스 데이비스와 마주하게 되는데, 그에 대한 열등감(초반부)과 불안감(후반부)으로 약에 손을 대게 된다. 즉, 쳇에게 음악과 약이 동일시되고 있음을 당대 재즈 뮤지션들의 꿈의 무대를 배경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버드랜드의 사회자는 쳇을 ‘재즈계의 제임스 딘, 쿨 재즈(Cool Jazz)의 왕자, 웨스트 코스트 스윙(West Coast Swing)의 창시자라 불리는 뮤지션’으로 소개한다. 쿨 재즈란 1930년대 스윙과 1940년대 비밥(Bebob)의 시대를 거쳐 1950년대 미국의 서부 해안을 중심으로 나타났던, 보다 차분하고 감성적인 재즈를 말한다. 쳇의 담백한 창법처럼 기교가 배제된 쿨 재즈는 동부의 비밥과는 달리 백인 뮤지션들을 중심으로 발전했다. 웨스트 코스트 스윙의 창시자라는 수식어는 연주 파트너였던 바리톤 색소포니스트 ‘제리 멀리건’에게 붙는 것이 더 정당하겠으나, 잘생긴 트럼페터이자 우수 어린 목소리를 가진 보컬로서 쳇은 뭇 여성에게 정말 왕자님 같은 존재였다. 비록 콧대 높은 동부의 흑인 뮤지션들에게는 ‘예쁘장한’ 연주라며 저평가당했지만 1954년에 발매된 ‘쳇 베이커 싱스(Chet Baker Sings)’는 2001년 그래미 명예의 전당에 헌정된 명반이다. 저 유명한 쳇의 커버곡, ‘마이 퍼니 밸런타인(My Funny Valentine)’과 ‘난 너무 쉽게 사랑에 빠져요(I Fall in Love Too Easily)’ 등이 바로 이 앨범에 담겨 있다. 쿨 재즈에서 화려한 비브라토 같은 것은 기대할 수 없다 해도, 쳇의 음정은 아마추어처럼 불안하다. 그러나 듣고 있으면 어느 순간 연인이 가까이에서 속삭여주는 것 같은 달콤한 노래가 돼 끊임없이 귓가를 맴돈다. 그러고 보면 쳇 베이커는 그가 빠져나올 수 없었던 헤로인만큼이나 중독성 강한 음악을 내놓았던 뮤지션이다.
◇1966년, LA와 예일
1954년 뉴욕 신들은 쳇이 찍고 있는 자신의 전기 영화 속 장면들과 연결되면서 자연스럽게 컬러 화면인 1966년의 LA로 넘어온다. 영화 속 영화에서 쳇의 부인 역을 맡은 배우 ‘제인’(카르멘 에조고)은 1966년 현재 쳇의 애인이 된다. 그러나 쳇은 1966년에 영화를 찍은 적이 없고, 제인도 가공된 인물이므로 이러한 형식을 택한 데는 설명이 필요하다. 우선, 1966년은 쳇 베이커가 버드랜드에서 첫 무대를 가졌던 1954년과 가장 대비되는 시점으로 선택됐다. 재즈는 죽어가고 있었고, ‘비치 보이스’가 웨스트 코스트 사운드를 대표하게 됐으며, 무엇보다 쳇이 돈을 받으러 온 갱들로부터 입 부위를 폭행당해 틀니 신세를 지게 된 시기이기 때문이다. 무용담이 그렇듯 시간이 흐를수록 그의 증언은 과장되고 왜곡돼서 이 끔찍한 사건을 정확히 기술할 수는 없지만, 확실한 것은 쳇이 ‘외상’ 마약값 때문에 트럼페터에게 치명적인 ‘외상(外傷)’을 입고 약 1년 동안 음악을 손에서 놓았다는 사실이다. 이 시기에 아무런 희망 없이 살던 그를 채근한 것은 세 번째 아내였던 ‘캐롤’이었다. 그러나 ‘본 투 비 블루’는 그의 곁에 제인이라는 여성만을 등장시킨다. 용감하게도, 로버트 뷔드로 감독은 쳇 베이커의 삶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쳇 베이커에 대한 환상을 만들어내기로 작정한 것이다. 이것은 그의 음악에 담긴 ‘낭만성’을 그의 삶에까지 옮겨오고자 하는 시도로 볼 수 있다.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윤성은 영화평론가
◇에단 호크에 의한 ‘본 투 비 블루’
그러나 실제로 1966년은 버드랜드가 이미 문을 닫은 후였고, 쳇은 1973년에야 다시 ‘해프 노트’라는 클럽에서 공연하게 된다. 14년 만의 뉴욕 귀환이었다. 그의 히트곡들인 ‘지금까지 난 사랑에 빠져본 적이 없었어요(I’ve Never Been in Love Before)’와 ‘난 너무 쉽게 사랑에 빠져요’ 가사의 간극만큼 당황스러운 현실과 영화의 차이지만, 사실 쳇은 그때 외모도 음악도 너무나 망가진 상태라 중년의 관객들이 충격을 받을 정도였다고 한다. 어쨌든 결말부에서 영화는 다시 버드랜드로 돌아와 도입부와는 달리 클라이맥스의 긴장감을 선사하며 씁쓸한 진실에 다가선다. 한 인간의 연약함과 그로 인한 몰락, 뜨거웠던 사랑의 종말과 연인의 이별을 목도하는 일은 가슴 아프지만, 마지막 신이야말로 자기파괴적이었던 쳇 베이커라는 인물의 실체와 가장 닮아 있다고 할 수 있다.
마약에 절어 평생을 보냈던 뮤지션을 적극적으로 감싸고 있는 이 작품에 대해 어떤 평가를 내려야 할까. 과연 그는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인간이었던가. 지나친 애정이 감독의 눈을 멀게 한 것은 아닐까. 그러나 아티스트의 작품과 그의 삶이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본 투 비 블루’가 추구한 허구의 세계를 어느 정도는 납득할 수 있을 것이다. 쳇 베이커의 진짜 삶은 그에 관한 다큐멘터리, ‘레츠 겟 로스트(Let’s Get Lost)-쳇 베이커의 초상’(브루스 웨버, 1988)에 잘 드러나 있으므로, 로버트 뷔드로 감독은 보다 그의 음악과 닮은 느낌으로 쳇 베이커를 기억하고자 했을 뿐이다. 그리고 그런 의도가 영화에 얄밉도록 훌륭하게 반영됐을 뿐이다. 두말할 것도 없이 우리 시대의 배우, 에단 호크가 그 중심에 있다. 그는 퇴폐미와 순수미를 적절히 블렌딩해 각 장면에 꼭 필요한 만큼 발산한다. 그래서 ‘블루’라는 감성을 표현하는 데 에단 호크만큼 어울리는 캐스팅은 아직도 잘 떠오르지 않는다. ‘본 투 비 블루’는 그렇게 철저히 쳇 베이커를 위한, 에단 호크에 의해 완성된 작품이다.
윤성은 영화평론가 (문예지 ‘쿨투라’ 편집위원·‘윤성은의 스크린뮤직’ 팟캐스트 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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