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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Her Story 게재 일자 : 2018년 11월 07일(水)
“천장의 쥐도 무서워했던 분이 자결 결심… 그분 내면이 궁금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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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명기 작가가 지난 1일 서울 종로구 평창동 아파트 단지 내 산책로를 걷고 있다. 그는 72세에 첫 장편소설을 썼고, 1년 뒤 또 하나의 장편을 내놨다. 김호웅 기자 diverkim@
두 번째 장편 ‘죽지 않는 혼’펴낸 민명기

평소 병약하고 겁 많았던 성품
치욕적인 을사늑약 체결되자
정치가·외교관으로 괴로워한 듯
목숨 바친 역사 알리려 작품化

美·韓서 평생 직장맘으로 살다
55세 은퇴뒤에 꿈 다시 떠올려
좋아하는 작품 보며 소설 공부

자신의 어머니 이야기 담아낸
첫 장편 ‘하린’작년 먼저 출간
호응에 충정공 원고 다시 작업
가문속의 韓역사 생생히 표현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표현은 분명 민명기(73) 소설가를 두고 하는 말 같다. 1945년생인 그는 72세이던 지난해 그의 첫 장편소설 ‘하린’을 발표했고, 연이어 올해 또 하나의 장편 ‘죽지 않는 혼’을 펴냈다. 70대에 묵직한 장편 2편을 연속 발표한 것이다. 아무리 ‘100세 시대’지만 고희(古稀)를 넘긴 나이에도 불구하고 창작을 불태우는 열정에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끝없는 호기심과 상상력, 몇 시간씩 책상 앞에 앉아 집중할 수 있는 체력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지난 1일 서울 종로구 평창동에 있는 민 작가의 자택으로 찾아가 그를 만났다. 찬바람을 가리는 갈색 스카프 위로 은은한 은발이 고운 그는 낙엽을 헤치고 온 기자들에게 먼저 따뜻한 커피를 권했다. 거실 테이블과 떨어져 앉은 카메라 기자를 위해 커피를 따로 받칠 수 있는 찻상을 챙겨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민 작가가 늦깎이 소설가가 된 데에는 그의 집안 내력과 깊은 관계가 있다. 그는 일제강점기 치욕적인 을사늑약(1905)에 항거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충정공 민영환(1861∼1905)의 증손녀다. 그는 “어려서부터 집안 어른들로부터 충정공에 관한 이야기를 자주 들었어요. 나도 모르게 내 몸속 어딘가에 민영환의 후손으로서의 책임감이 스며 있었던 것 같아요”라며 “언젠가는 충정공의 이야기를 써야겠다고 마음먹었는데 그게 이제야 이뤄진 셈입니다”라고 말했다.

평생을 ‘직장맘’으로 살았던 민 작가는 사실 소설가의 삶과는 거리가 멀었다. 조선시대 왕비를 여러 명 배출한 명문가인 여흥 민씨 민영환의 후손이었지만 어려서 부친을 일찍 여의고 가세가 급격히 기우는 바람에 한가하게 전통을 잇고 말고 할 여유가 없었다. 이화여대를 졸업하고 코리아헤럴드에 잠시 취직했다가 1968년 당시 대학원생이었던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를 만나 결혼했다. 그리고 두 딸을 낳았고 시카고대로 먼저 유학을 떠난 남편을 따라 1976년 미국으로 건너갔다.

“무슨 용기가 있었는지 모르겠는데 그때는 남편을 따라가고 싶었어요. 애들까지 데리고 가면 공부하는 남편에게 오히려 방해될 거라고 친정 어른들이 만류하는데도 갔어요. 생활 경비에 쓰기 위해 살던 집마저 팔아 무작정 떠났죠.”

아무런 계획도 없이 떠난 미국 생활이 순탄할 리 없었다. 남편 유학을 따라가면서 받은 ‘F2’ 비자로는 원칙적으로 취업활동이 불가능했다. 당장 생활비가 쪼들렸다. 구인광고를 뒤져가며 수소문한 끝에 시카고대 인근의 ‘미국변호사협회(ABA)’를 찾아가 사정을 설명하고 겨우겨우 일을 얻었다. 변호사들의 산더미 같은 서류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하는 일이었다. 말이 ‘오피스 잡(Office Job)’이지 중노동에 가까웠다. 육아와 업무로 매일 파김치가 됐다.

그러다가 사내 경리부에 자리가 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인사부장을 설득해 기어이 자리를 옮겼다. 업무상 부족한 부분을 보충하기 위해 시카고대가 개설한 특별과정에서 틈틈이 회계 공부도 했다. 그렇게 남편과 아이들을 뒷바라지하면서 그 후로 7년간 미국에서 지냈다.

“소설과의 연결고리를 말한다면 1970년대 말 우연히 한국일보 LA 지사에서 주최한 신춘문예에 단편소설로 입상한 적이 있어요. 그러나 아이들을 키우고 남편을 뒷바라지하느라 더 계속할 엄두는 못 냈죠. 일을 해야 했으니까요. 늘 마음속에만 담아뒀다고 할까요.”

그러다가 귀국한 게 1983년이다. 하지만 생활은 나아진 게 없었다. 또다시 취업의 문을 두드렸다.

“돌아왔지만 취직은 해야겠더라고요. 이번엔 미국에서 배운 걸 경력 삼아 국내 회계법인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미국의 대형 회계법인인 아서 앤더슨이 국내에 세운 액센츄어(구 앤더슨 컨설팅)로 옮겨 2000년 은퇴할 때까지 일했어요. 그때가 55세였어요. 아이들을 유학 보내고, 출가까지 시키고 나니 비로소 제 꿈을 떠올리게 되더라고요. 아마 그때부터 속으로 품었던 충정공의 이야기를 구체화한 것 같아요.”

그러나 당장 소설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도 몰랐다. 약 30년 전 아이 둘을 업고 남편을 따라 용감하게 떠났을 때처럼 이번엔 좋아하는 해외 작가들의 작품을 교과서처럼 꾸준히 읽었다. 존 쿠체, 앨리스 먼로, 이시구로 가즈오(石黑一雄)의 작품이었다.

“쿠체는 인간 심리를 그리는 데 날카로워요. 먼로는 아무것도 아닌 내용을 멋진 이야기로 만드는 재주가 있고요. 그런 소설을 보면서 저도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을 더욱 굳혔어요. 최근엔 지난해 노벨상 수상자인 이시구로 가즈오의 책을 많이 읽었습니다. 일본인의 피를 지녔지만 거기서 어린 시절을 보낸 적이 없는 그가 소설의 공간적 배경인 일본을 마치 살았던 것처럼 치밀하고 섬세하게 묘사하는 걸 보고 큰 감명을 받았어요.”

민 작가는 그렇게 조금씩 충정공 이야기의 뼈대를 맞춰갔다. 집안에 전해 내려오는 일화를 정리하고 외부 자료를 수집했다. 하지만 증조부이기에 앞서 한국 역사 속의 큰 인물인 민영환을 불러내는 데 부담이 적지 않았다.

그래서 충정공보다 먼저 자신의 어머니 김성린의 이야기를 쓰기로 했다. 충정공의 손자며느리인 어머니의 이야기는 누구보다 자신 있게 쓸 수 있었다. 말하자면 굳이 자료조사가 필요하지 않았다. 그가 듣고 본 사실에 상상력을 더해 당시 종가 며느리의 삶을 자세히 묘사했다. 매일 아침을 먹고 오전 9시 30분쯤 방에 들어가 3∼4시간씩 하루도 빠짐없이 썼다. 그게 바로 지난해 출간한 ‘하린’이다.

“그때 그 세대가 그러하듯 어머니는 시집살이를 많이 했어요. 할머니의 별명이 ‘호랑이 마님’일 정도로 엄청나게 무서운 분이셨는데 그 밑에서 얼마나 어려웠겠어요. 더구나 남편이 일찍 세상을 떠났으니 평생 시어머니와 딸을 부양하고 살아야 하는 엄마의 심정은 오죽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장편 ‘하린’은 처음에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첫 원고를 국내 유력 문학상에 출품하기도 하고, 출판사에도 보냈다. 하지만 집필 이력이 전혀 없는 ‘70대 할머니 소설가’의 글을 관심 있게 봐주는 데는 많지 않았다. 그러다가 주변 지인의 소개로 우연히 중앙북스에 원고를 전달했고 글의 깊이와 재미를 알아본 편집자들에 의해 단행본으로 출간됐다.

“제가 장편 소설을 썼다고 하니까 친한 친구들도 잘 믿지 못하는 눈치였는데 출판사 같은 곳에서 제 원고를 선뜻 받아들이지 못한 것도 무리는 아니겠죠. 이해할 수 있어요. 상큼한 아이디어를 가진 젊은 작가도 많은데 나이 많은 할머니의 소설이 눈에 들어오기 힘들었을 거예요.”

출간 반응은 기대 이상이었다. 주변에서 격려와 응원의 메시지가 줄을 이었다. 이에 용기를 얻어 미뤄뒀던 충정공의 원고를 다시 꺼냈다. 그게 두 번째 장편 ‘죽지 않는 혼’이다.

소설에서 묘사했듯이 충정공은 일본이 1905년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자 ‘을사 5적’의 처형을 요구하는 상소 운동을 벌인다. 그러나 상소는 받아들여지지 않고 오히려 고종의 명에 의해 붙잡혔다가 풀려난다. 상황을 돌이키기 어렵다고 판단한 충정공은 서울 종로구 전동(현 견지동) 자택에서 조금 떨어진 청지기 이완식의 집(현 공평동)에서 11월 30일 ‘2000만 동포에게 고함’이라는 내용의 유서를 남기고 자결한다. 그의 나이 44세. 나라와 국민에 대한 사랑, 일본에 대한 저항을 담은 의로운 죽음이었다.

“짧은 시간에 장편 2권은 쉽지 않은 일이죠. 오랫동안 충정공 관련 자료를 수집하고 연구했으니까 가능했습니다. 충정공 이야기는 사실 ‘하린’보다 먼저 쓰려고 했던 것이고요. 그래도 워낙 역사적 인물이어서 정확한 날짜와 공간 등을 확인해야 했고, 사건 사이의 인과관계를 알기 위해 자료를 더 뒤져야 했어요. 국사편찬위원회가 펴낸 ‘민충정공 유고’, 계명대 교수였던 마이클 핀치의 ‘민영환’을 참고했어요.”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든 민 작가가 흔들림 없이 글에 집중할 수 있었던 건 뭐니뭐니해도 가족의 힘이었다. 지금은 미국에서 생활하고 있는 두 딸과 최장집 교수가 항상 따뜻한 지지와 응원을 보내줬다.

“남편이 그런 말을 하더군요. 서양에서는 무거운 정치사를 쓰면서도 문학작품에 비유하고 그걸 또 인용한다는 거예요. 언제나 철두철미한 남편이 그런 말을 해주니 힘이 됐어요. 가족 말고는 제가 소설을 쓴 원동력을 설명하기 어렵네요.”

충정공부터 그의 손자며느리까지 100여 년 충정공 가문의 역사는 민 작가를 통해 어느 때보다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상상력을 발휘하되 사료에 근거하고, 등장인물을 실명으로 묘사해 치우침이 없도록 했다.

이 소설이 마음에 닿는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는 민 작가가 자신의 집안 내력을 꺼내놓으면서도 철저히 중립적 관점에서 서술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2권의 소설에서 민씨 일가를 두둔하거나 미화하지 않고 냉정한 관찰자의 시선을 유지했다. 탐관오리로 불렸던 충정공의 아버지 민겸호가 임오군란(1882) 때 성난 군졸들에게 살해된 일, 충정공 동생 민영찬의 친일 행위, 민 작가의 조부 민범식의 방탕한 생활 등을 숨기지 않았다.

민 작가는 오히려 “집안 당숙들이 아시면 큰일 날 소리겠지만…우리 집안이 안 망하고 있었으면 지금도 웃기는 행태를 계속하고 있을지도 몰라요”라며 우스갯소리를 했다.

민 작가는 책이 좋은 평가를 받는 것에 부끄럽다는 표정이었다. 저명한 정치학자의 아내에서 역사소설의 작가로 변신한 자신을 대견스러워하면서도 겸손을 잃지 않았다.

“평소 병약하고 겁이 많아 방 천장에 쥐가 돌아다니는 것도 무서워했다는 분이 어떻게 자결을 결심했는지 그 내면을 좀 더 더듬어 본 겁니다. 충정공은 정치가이자 외교관으로서 양심에 괴로움을 느꼈던 것 같아요. 러시아 니콜라이 황제 대관식과 영국 빅토리아 여왕 즉위 60주년 기념식을 다녀오면서 외교의 힘이 얼마나 중요한지도 깨달았을 테고요. 자신의 목숨을 바쳐 국내외에 큰 충격을 주자는 생각이 아니었을까요? 이런 역사를 보다 친근하게 알리고 싶었어요. 충정공 후손으로서 부끄럽지 말아야죠.”

인터뷰 = 김인구 차장(문화부) clark@
e-mail 김인구 기자 / 문화부 / 차장 김인구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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