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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정준모의 미술동네 설설 게재 일자 : 2018년 11월 12일(月)
철계단 33개 내려가면 바다… 야만의 시대에 희생된 사상가 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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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만의 시대를 살다 간 베냐민을 기리는 조형물 ‘통로-발터 베냐민에게 경의를’.

‘통로 - 발터 베냐민에게 경의를’
침묵과 언어 교차하는 조형물


전쟁은 살아 있는 사람들의 삶을 황폐화한다. 목숨을 잃은 사람도 부지기수다. 어느 목숨이라고 중하지 않은 목숨이 있을까만 이렇게 희생된 사람 중 20세기 인간의 사유체계를 온전하게 지배한 가장 독창적이고 통찰력 있는 사상가로 알려진 발터 베냐민(Walter Benjamin, 1892∼1940)의 죽음은 어느 누구의 죽음보다도 짠하다.

독일에 귀화한 유복한 유대인 집안에서 태어나 남 부러울 것 없는 삶을 살았던 그는 정치와 예술, 문학, 사진, 건축과 영화 등 다방면에서 전방위적으로 창조적 사유를 했던 천재였다. 하지만 ‘20세기 가장 빼어난 산문가’라는 말을 들었던 그의 삶은 히틀러가 등장하면서 산산조각이 났다. 의사였던 남동생은 강제수용소에서, 사회복지학을 공부한 여동생은 병으로 사망했다. 베냐민은 1933년 히틀러가 독일을 장악하자 파리로 망명해 어려운 삶을 이어가면서도 공부에 몰두했고 문학잡지에 수필과 평론을 기고했다.

1940년 나치가 파리를 점령하자 미국으로 망명하기 위해 마르세유로 향했다. 하지만 그는 “마르크시즘 연구자라서 출국비자 발급을 정지한다”는 통보를 받는다. 그래서 그는 살기 위해 당시 중립국이었던 스페인으로 가려고 피레네 산맥을 넘는다. 그리고 8월 26일 저녁, 국경에 도착, 입국허가를 받기 위해 출두했지만 무국적자라는 이유로 프랑스로 강제송환될 것이라는 통보를 받는다. 이런 극한 상황에서 그는 다량의 모르핀을 털어 넣는 마지막 선택을 하고 만다.

그는 검은 가방과 손목시계, 파이프, 사진 몇 장, 안경, 편지 여러 장, 내용을 알 수 없는 원고들을 남겼다. 참 단출한 도망자의 삶이 집약된 유물이지만 그는 나치의 폭력으로부터 인간을 구원할 마지막 희망이라고 믿었던 스탈린이 ‘악마의 협약’이라고 불리는 ‘스탈린-히틀러 협약’(1939년)을 맺은 사실을 알고 실망한 나머지 이를 비판하면서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를 집필했다. 그는 진보는 늘 새로운 것처럼 가장하고 다가온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  정준모 큐레이터·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실장
결국 기다리던 새로운 천사는 오지 않았다. 오히려 천국으로부터 폭풍이 몰아쳐 왔다. 그래서 그는 “천국으로부터 폭풍이 자신의 날개를 꼼짝달싹 못 하게 할 정도로 세차게 불어오기 때문에 천사는 날개를 접을 수도 없다”고 적었다. 어느 시대건 참을, 진리를 멀리하고, 인간을 외면하는 진보는 폭풍이 될 수 있다. 여기서 천국은 미래이며, 폭풍은 진보를, 천사는 역사적 유물론자를 의미한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미래의 천국보다는 현재의 파국이었다. 그는 역사를 진보의 아름다운 가상, 발전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어두운 파국으로 보고 진보의 폭풍우에 마주 선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이런 독특한 생각을 파울 클레(Paul Klee,1879∼1940)의 ‘새로운 천사, Angelus Novus’(1920, 펜과 수채, 이스라엘미술관 소장)라는 그림을 빌려 설명한다.

이렇게 파국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천사 베냐민이 죽은 자리는 이스라엘의 조각가 대니 카라반(Dani Karavan,1930∼)에 의해 세워진 ‘통로-발터 베냐민에게 경의를’(Passages- Homage to Walter Benjamin, 1990~1994)이 지키고 있다. 그가 묻혀 있는 마을 공동묘지 근처 절벽에 세워진 코르텐강 재질의 사각형 구조물로 들어가 33개의 철계단을 타고 내려가다 보면 더 이상 앞으로 갈 수 없는 바다와 맞닥뜨리게 된다. 그리고 그곳에 서면 문득 말할 수 없는 침묵과 언어가 교차한다. 당시 베냐민의 심정을 그리고 파국의 현실을 바라봐야 하는 이들의 심정이 그대로 전해진다.

이 기념물은 그가 세상을 떠난 지 50년이 지난 1990년 독일 정부와 카탈루냐 지방정부가 세운 것이다. 그리고 지금 그는 없지만 그를 기리는 많은 이가 멀고 먼 길을 순례길처럼 찾아들고 있다. 물론 스탈린이 나치와 손을 잡으면서 반스탈린주의로 돌아선 비판적인 지식인과 혁명가들을 살해했고 따라서 베냐민도 스탈린이 살해했을 것이라는 설도 있지만 아무튼 그는 그곳에 잠들어 작은 트롤어선들이 드나드는 항구를 내려다보고 있다.

큐레이터·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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