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시를 삼킨 장미
1970년대는 순진한 시골 처녀가 도시로 상경해 술집 작부로 전락한다는 줄거리를 다룬 이른바 ‘호스티스영화’가 범람했던 시기다. 급격한 산업화가 이뤄지면서 농촌의 젊은 인력들이 서울에 집중됐고, 이들을 중심으로 한 소설이 영화화되기 시작했다.
1974년 ‘별들의 고향’(감독 이장호)을 필두로 ‘영자의 전성시대’ (감독 김호선·1975), ‘꽃순이를 아시나요’(감독 정인엽·1979) 등으로 이어지는 시골 처녀들의 수난기는 그 나름의 사회 고발적 메시지가 있었으나 1970년대 후반에는 시골처녀뿐만이 아닌 여대생이나 직업여성을 주인공으로 확장하면서 젊은 여성의 성적 타락에 집중하는 에로틱 통속물로 추락하고 말았다. 장르 전성기의 후반부에 개봉된 ‘가시를 삼킨 장미’(감독 정진우·1979·사진)는 엄청난 히트작은 아니지만 그해 대종상 감독상을 수상했고 마닐라국제영화제에 초청되는 등 주목할 만한 요소를 가졌던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줄거리는 호스티스영화의 기본 골자인 젊은 여성의 성적 타락과 그에 따른 주인공의 좌절, 죽음 등을 고스란히 답습한다. 주인공 장미(유지인)는 부잣집 외동딸이자 일류대학에 다니는 학생이다. 서울 한복판의 고급 아파트에서 남부러울 것 없이 혼자 사는 사치를 누리고 있지만 이유 없는 권태에 시달리고 있는 장미는 성적인 일탈로 이를 극복하고자 한다. 그는 자신을 짝사랑하는 고향 친구 규식(송승환)부터 과 동기들까지 주변 모든 남성을 자신의 성적 판타지의 대상으로 삼는다.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김효정 영화평론가
이 영화는 원시적일 정도로 단순한 플롯, 즉 여성의 점층적인 성적 타락과 그것을 처벌하는 순으로 내러티브를 구성한다. 따라서 장미의 성적 타락 정도에 따라 감금에서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처벌도 증강되는 셈이다. 수많은 영화에서 암시된 ‘밝히는 여자는 죽는다’는 구태의연한 서사적 공식이 또 한 번 실현된다.
그럼에도 이 영화의 ‘밝히는 여자’ 설정은 꽤 흥미롭다. 여성의 성적 욕구에 대한 구체적인 묘사는 대부분 장미가 남성들과 관계를 갖는 도중이 아닌 그가 혼자 있을 때 두드러진다. 카메라가 아파트에 혼자 누워 있는 장미의 발끝부터 벗은 몸이 비치는 잠옷, 그리고 무언가를 간절히 원하는듯한 눈동자까지 밀착해 훑는 장면에서 욕구불만에 시달리는 그를 착취적으로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진다. 남녀의 정사 신보다 이 장면에서 에로티시즘이 더 강조된다.
결국 이 영화에 등장하는 남성 캐릭터들은 크게 중요하지 않다고 봐도 무방하다. 이들은 여주인공이 해소해야 할 성욕의 대상이며 동시에 그런 행위의 말로를 경고하기 위한 상징적 지표로만 기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년 남성으로 등장하는 배우 고 신성일의 활약만큼은 간과하기 힘들다. 기차에서 우연히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되는 매력적이지만 위험한 ‘옴파탈’은 신성일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역할이다. 기차 창에 비친 중년 남성의 옆모습을 훔쳐보며 미소 짓는 장미의 표정은 신성일의 아름다웠던 중년의 마지막 자락을 기억하는 관객들의 그것과 중첩되며 긴 여운을 남긴다.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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