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건축으로 잃어버린 정든 공간… 기억 더듬어 추억 그리다

나의 둔촌아파트 / 김민지 글·그림 / 이야기꽃

오래전이지만 ‘수몰지역’이라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 받았던 충격은 지금도 생생하다. 장성댐 건설로 고향을 잃은 사람들의 사연을 다룬 소설 ‘징소리’를 ‘TV문학관’에서 드라마로 제작했다. 어렸을 때 그 드라마를 보면서 수몰지역이 무엇인지 알게 됐다. 누군가에게 안방이고 정든 골목이었던 한 마을이 개발 사업으로 통째로 물에 잠겨 사라진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요즘은 수십 년 전 건설된 서민 아파트를 허물고 수십 층 높이의 새 아파트를 짓는 재건축 사업이 곳곳에서 벌어진다. 투자 수익을 먼저 헤아리는 사람도 있겠지만, 구체적인 개인의 역사가 깃든 장소를 지워버리는 작업이라는 점에서 도심 재개발·재건축 사업은 여기서 한 시절을 보냈던 이들에게 ‘21세기의 징소리’라고 할 수 있겠다.

‘나의 둔촌아파트’는 둔촌주공아파트 재건축으로 성장기의 소중한 공간을 잃어버린 작가의 자전적 그림책이다. 1980년 1월에 준공된 이 아파트에서 143개 동에 5930가구가 살기 시작했다. 작가는 다섯 살부터 어른이 될 때까지 여기에서 자랐다. 아파트 단지의 은사시나무 잎사귀를 흔드는 바람을, 저녁 먹으라고 부르는 목소리를, 아파트 우편함에서 엄마의 손 냄새가 담긴 열쇠를 찾던 기억을 모두 둔촌아파트에 두고 왔으며 재개발로 철거가 진행된 지금은 그 무엇도 찾을 수 없다. 작가는 몰수된 기억을 한 장면씩 더듬어 손이 많이 가는 연필화로 그려냈다. 식탁의자 다리에 끼워 둔 테니스공, 잘 안 쓰는 나무쟁반이라도 들어 있을 것 같은 선반 위 틈새의 붉은 꾸러미, 빛바랜 지구본에 날리다 만 고무동력기까지 아파트 생활의 면면을 정교하게 재현한다. 그리고 이 상실의 감정을 마을이 물에 잠기는 이미지와 겹쳐서 상상한다.

이제는 단종된 포니자동차 앞에서 하얀 곰 인형을 꼭 안고 있었던 어린 시절의 작가는 어른이 돼서도 그때와 똑같은 달걀색 겉옷에 파란 원피스를 입은 채 곰 인형을 놓치지 않고 서 있다. 개발의 논리가 추억을 몰수하더라도 한 사람의 정체성은 소멸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찡한 장면이다. 둔촌아파트 1동 504호의 진정한 주인은 등기부등본상의 소유주나 개발 차익의 수혜자가 아니라 라일락이 피던 놀이터와 연필을 그어 키를 재던 문틀과 아무리 고단해도 복도에서 환한 인사를 잊지 않았던 이웃들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그림책이다. 어린이에게는 자신의 장소를 아끼는 마음을, 어른이 된 아파트 키드에게는 저릿한 공감을 안겨준다. 48쪽, 1만6000원.

김지은 어린이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