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푸른 별에서 너와 나는>진짜 금칠한 금박액자의 금빛보다 더 金 같지 않아요?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자크 에밀 블랑슈(1861∼1942), ‘모차르트 ‘피가로의 결혼’의 케루비노’ 캔버스 위에 유채. 156.7 x 117.9㎝

구자명·김의규 부부 작가의 미니픽션 - (15) 금빛의 조건

바지의 경이로운 금빛에 매료
실제로는 누런색 바탕칠 위에
섬세한 붓 터치의 효과일 뿐

거품이 문명을 만들어내는 것
환상·환시…이런 것 없었다면
인류문화는 굉장히 따분할 걸

어둑신한 주점용 조명 아래서
술잔 일렁이는 금빛 환시 명상
뉴욕 밤 택시 노란색도 황금빛

그는 고개를 약간 외로 꼰 채 수그린 이마에 한 손을 얹고 구석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어스름녘 황금빛 잔광이 바로크풍 아치창으로 쏟아져 들어와 그의 얼굴 절반을 지나치게 부각시켰다. 마치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에 나오는 반가면을 쓴 팬텀 같은 야릇한 분위기가 연출된 그의 모습에 생각했던 이상으로 혐오감이 치솟았다. 그는 결코 진실을 말하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테이블로 향하던 발길을 돌려 도망치듯 그곳을 빠져나왔다.

카페 맞은편은 소호에서 가장 번화한 유흥가이다. 길을 건너자 화려한 네온 간판들이 거리의 여인들처럼 다투어 호객을 했다. 금요일 밤의 소호는 바람난 귀부인처럼 내숭을 던져버리고 자포자기적 해방감으로 들썩인다. 그녀는 그와 함께는 아니지만 두어 번 가본 적 있는 반지하 업소로 들어갔다. 일본식 선술집이다. 동양인인 그녀로선 안주를 곁들여 술을 먹을 수 있되, 혼자 앉을 수 있는 바테이블도 있는 이런 곳이 좋다.

지난주 그들은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열린 19세기 프랑스 미술 전시회에 갔었다. 유명 예술대학의 광고디자인과 교수인 그는 같은 학교 석사과정 유학생인 그녀를 뉴욕 문화에 적응시켜주겠다는 구실로 틈날 때마다 미술관으로, 연극과 뮤지컬 공연장으로, 오페라 극장으로, 다국적 맛집들로 끌고 다녔다. 물론 그 덕분에 이런저런 사교 모임에서 뉴요커들의 분방한 대화에 몇 마디씩이라도 끼어들 수 있게 돼 고맙기도 했다. 그런데 그 전시회에서 자크 에밀 블랑슈란 화가가 그린 ‘모차르트의 케루비노’란 유화를 보는 순간 그녀는 문득 그와의 관계가 오래가지 못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 그림은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에 등장하는 시종 소년 케루비노를 그린 것인데, 그녀는 다른 무엇보다 그 인물이 입은 금빛 새틴 바지에 깊이 매료되었다. 그 앞에서 자리를 뜨지 못하고 있는 그녀를 보고 다른 그림들을 앞서서 둘러보고 온 그가 물었다.

―이 그림 어디에 그렇게 끌리지?

―어, 금빛…. 저 소년이 입은 바지의 금빛이 정말 경이롭지 않나요?

―저 시대 화풍의 기법이지, 뭐. 신고전주의 작가들이 그런 데 능했어.

―아, 내 말은…화가의 기법이 어떻다기보다 붓 터치가 만들어낸 금빛의 환시(幻視)가 놀랍다는 거죠.

―환시? 왜 환시라고 하지? 금빛인데, 실제론 아니지만 그렇게 보일 뿐이라는 얘긴가?

―그렇죠. 사실은 누런색 바탕칠 위에 흰색의 붓 터치가 만들어낸 효과일 뿐이니까.

―그렇긴 하지. 하지만 진짜 금을 칠한 이 금박액자의 금빛보다 더 금 같지 않아?

―그건 그래요. 그래도 환시는 환시죠. 떨어져 봤을 때만 그 효과가 유지되는….

그는 왠지 좀 당혹스러운 듯한 눈길을 건네더니 평소 그녀와 있을 땐 잘 쓰지 않는 뉴요커 특유의 속사포 영어로 대꾸했다.

―자긴 너무 실제성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어. 건축 전공이라 그런가? 문화란 건 말이야, 사실 환상의 산물인 게야. 중세의 교회들을 생각해 봐. 면죄부를 팔아서 그렇게 미친 듯이 초호화판 교회 건물들을 짓지 않았다면 오늘날 유럽이고 어디고 문화재랄 게 뭐 그리 남아 있겠어? 거품이 문명을 만들어 내는 거지. 환상, 환시, 심지어 착각…뭐 이런 것들이 없었다면 인류 문화는 지금쯤 굉장히 따분할 거야….

그녀는 그가 그렇게 말하는 걸 들으며 좀 전에 스쳤던, 그들 관계의 종말에 대한 예감을 다시 떠올렸다. 그날 그녀는 리포트 과제 때문에 바쁘다는 핑계를 대고 그와 일찍 헤어졌다. 새로 연 이탈리아 레스토랑에 가서 같이 이른 저녁이나 하고 가라는 제의마저 사양하고 집에 돌아온 그녀는 일기장 겸으로 쓰는 수첩에다 이렇게 적었다. ‘환상 빼기 거리(距離)는 평범.’

그다음 한 주 동안 그녀가 다니는 대학은 수년간에 걸친 남녀학생 여럿과의 동시다발적인 부적절한 관계로 학교재단의 조사를 받게 된 그에 대한 소문으로 온통 난리였다. 종신 재직권 심사를 앞두고 징계처분을 받게 될 처지가 된 그는 소문을 그대로 믿으면 안 된다며 만나서 진실을 알리고 싶다고 전화를 해왔다. 그녀가 만나고 싶지 않다고 하자 그녀와 첫 데이트를 했던 소호의 카페에서 마지막이라도 좋으니 한 번만 더 보자고 호소해왔다. 2년 전 같은 카페 같은 테이블에서, 같은 시각의 황금빛 잔광을 받으며 그녀에게 구애했던 그는 제국의 운명을 걸고 사랑을 선서하는 로마의 안토니우스 같은 아우라를 발산했었다. 그것은 뭐랄까, 어떤 순정성의 가치 같은 것이어서 그 남자가 외모, 능력 따위의 무엇을 얼마나 지녔느냐 하는 소유의 가치와는 다른 것이었다. 그녀는 단번에 그에게 빨려들었고 그 후 두어 해 가까이 그에게 ‘소속’되어 행복감을 느꼈다. 그는 아주 교묘하여 한 번도 그녀에게 다른 관계들을 들키지 않았다. 그런데 ‘케루비노의 금빛 바지’가 해독제와도 같은 각성 효과를 가져올 줄이야 ….

그녀는 바테이블에 걸터앉아 관자 꼬치구이와 사케를 주문했다. 황금색 테두리를 두른 내열 유리잔이 먼저 그녀 앞에 놓였다. 금박을 입힌 것이다. 어둑신한 주점용 조명 아래서 투명한 청주에 반사된 금빛은 매우 아름다웠다. 이 거리에 찾아든 많은 여피족 뉴요커들처럼 의도된 해방감을 느끼면서 그녀는 술잔 속에 일렁이는 금빛 환시를 명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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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소호의 선술집에서 연거푸 몇 잔을 독작한 동양인 여자가 비틀대며 자리에서 일어섰을 때 곁으로 다가서는 백인 남자가 있었다. 일그러진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부축하려는 몸짓을 했지만 그를 알아본 여자는 세차게 그 손길을 뿌리쳤다. 불안정한, 그러나 단호한 의지가 느껴지는 걸음새로 업소를 빠져나가는 여자 뒤를 남자가 황급히 쫓아갔다. 그는 걸음만큼이나 빠른 뉴요커 영어로 소리쳤다.

―그래, 자기 말이 맞아. 가까이 봐도 금빛이 금빛이려면 진짜 금을 칠해야 하겠지. 하지만 그것이 우리 눈에 더 찬란하진 않아. 그래서 우린 때로 진실을 제쳐 두고 아름다운 거짓을 선호하는 거라고! 모르겠어?

뉴욕의 노란 택시들은 눈치가 빠르다. 그들은 밤에 길에서 옥신각신하는 커플이 있을 때 어떻게 해야 자신의 직업윤리가 제대로 구현되는지를 안다. 이럴 때 택시의 노란색은 황금빛이 된다. 적어도 이날 밤 그녀를 태운 뉴욕 택시는 금빛의 조건을 충족했다. 잠시 동안이지만 완전하게.

구자명 소설가

한국미니픽션작가회

창립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