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생각하며>삼인칭의 쿨한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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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윤 소설가, 서강대 명예교수

사람들 일인칭으로 얘기할 때
소설가는 삼인칭으로 듣는다

피할 수 없을 것 같은 광풍도
어느새 별것 아닌 것이 된다

한두 발짝 떨어져 바라보면
과열된 성정 조금은 쿨해져

아마도 이상의 사후에 출간된 ‘이상 선집’의 서문을 쓴, 한국의 모파상이라 불렸던 이태준은 작가 이상에 대해 평온보다 1, 2도 낮은 사람이라고 그를 평한 적이 있다. 지금은 그 책이 내 손을 떠났기에 정확한 표현이 기억나지 않지만, 이상이 차가운 소설가였다는 것이 아니라 이상의 어딘가에서 풍기는, 한두 걸음 떨어져서 현실을 바라보는 태도가 그 묘사 구절에서 묻어났었다. 해방 전 시집을 모으던 대학생 시절, 몇 원 안 되는 용돈과 과외수업으로 번 돈이 얼마간 모이면 앞뒤 안 보고 지금은 자취도 없이 사라진 인사동의 고서점으로 달려갔었다.

바로 그 구절이 좋아 돈 아까운 줄 모르고 당시로선 제법 고가였던 얇은 ‘이상 선집’을 손에 넣었다. 아끼는 책이기에 일찌감치 책 보존을 위해 영인문학관에 기증했다. 손으로 짚어보지 않아도 평균 열기보다 1, 2도 낮은 냉정한 이마, 이것은 내가 참 좋아하는 것이다. 내가 그렇지 못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가끔 지인들의 소개로 각별한 삶을 살았다는 분들을 소개받을 때가 있다. 당사자들은 하나같이 내게 큰 선물을 하듯 “제 얘기 좀 소설로 써 보세요!” 하며 때로는 반나절이 넘게 자리를 뜨지 않고, 자신의 먼 과거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성공담이나 실패담의 굵은 가지 잔가지를 종횡무진 넘나든다. 평범한 듯한 외모와는 달리 그분들의 삶은 실로 대하소설 감이다. 그분들이 왜 하나같이 그토록 격렬한 삶을 드라마틱하게 사셨는지가 무척 궁금해 고개를 들어 얼굴을 가만히 살펴본다. 거의 모든 사람은 과잉 정열을 가지고 자신들의 삶에 대해 얘기하고 싶어 한다. 그리고 그것이 누군가에 의해 소설 비슷한 것이 되기를 열렬히 바란다. 그런 열정은 매우 귀중한 것이기에, 나는 되도록 흔치 않은 그 기회를 음미하며 몰입해 듣고자 애쓴다.

나는 확실히 말하는 것보다는 듣는 것을 좋아하고 또 잘 듣는다. 특별한 목적 없이 상대편의 얘기를 듣는 것을, 수동적이고 수월하며 무의미한 행동 중의 하나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실제론 그렇지 않다. 듣는 일은 말하는 것만큼, 어쩌면 그보다 더 많은 에너지를 요하는 엄연한 활동이다. 주제가 딱히 정해져 있지 않아도 듣는 것은 집중을 요하고 때로는 책임감이 따르기도 하며 예기치 않은 사건에 뛰어들게도 한다. 어떻든 앞에 있는 사람의 말을 잘 듣기 위해서는 부산해서도 조급해서도 안 된다. 그렇게 집중해 듣다 보면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만남이 멘토링의 성격을 띨 때도 있다.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게 되면, 나는 결단코 원하지 않지만, 사람들의 삶의 내밀한 사건에 대해 알게 되기도 한다.

말 잘하는 사람을 웅변가, 달변가, 수사학자 등 여러 이름으로 부르는데, 잘 듣는 사람을 수식하는 명칭은 없는 듯하다. 그러나 명칭이 없는 것이 듣는 일의 특질에 적합한 것 같기도 하다. 잘 듣는 사람들이 가지는 공통점이 있다면 그들은 자신들이 들은 사적인 이야기를 절대 다른 곳에 발설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이 비밀일 때는 더 말할 것도 없다. 무덤까지 가지고 가기 전에 거의 의도적으로 잊어버린다. 가끔 컴퓨터의 프로그램을 포맷하듯이 들은 무수한 얘기들을 잊어버리는 것은 그 얘기의 주인공들에 대한 예의이기도 하며 듣는 사람들 자신이 잘 듣는 사람으로 남아 있기 위한 전제조건이다.

단언컨대 사람들이 상상할 수 있는 것처럼 ‘들은 이야기’가 소설이 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게다가 소설은 이야기만으로 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듣는 일은 소설과 아주 무관하지는 않다. 사람들이 일인칭으로 얘기한다면 듣는 사람은 삼인칭으로 듣는다. 소설가의 특징 중 하나와 듣는 사람의 특징이 만나는 부분이다.

어릴 때는 즉흥적이며 직관에 의존했던 나 같은 사람이 소설을 쓰면서부터 다소간 쿨한 사람이 됐다. 소설이 요청하는 삼인칭의 세계에 입문하면서부터다. 누구나 삶의 여정에는 광야도 있고 절벽도 있으며 사막의 모래바람도 있다. 그러한 삶의 파고에서 예외적인 삶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소설 쓰기가 가르쳐준 것은 눈앞으로 다가온 피할 수 없는 광풍을 어느새, 제삼자의 사건인 것처럼 삼인칭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그러는 사이에 대단한 것 같던 뜨거운 광풍의 열기는 1, 2도 내려가 별것 아닌 것이 된다. 삼인칭으로 바라보다 보면 호들갑스럽게 마음을 요동치게 하던 그 사건은 수많은 사건 중의 하나가 되어 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사람들이 모두 소설가가 될 수는 없어도 적어도 한두 번은 자신의 삶을 말로든 글로든 소설로 써보면 좋겠다. 한 템포 늦게, 1, 2도 냉각된 초겨울 이마를 지니고, 한두 발짝 떨어져 주위를 바라보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자주 과열되는 우리네 성정이 조금은 쿨해진다.

오랜만에 전시회를 연 화가 친구의 개인전을 보러 갔다. 좋은 작품을 그려내는 화가인 줄 알기에 눈을 씻으러 갔고 시력이 맑아지는 느낌을 받았다. 거기서 한 사진작가도 만났다. 화랑 한구석에 미적으로 배치된 작은 티 테이블의 불편함을 즐기면서 우리는 부담 없이 담소하다가 다음과 같은 간단한 사실에 동의했다. 우리는 화가 친구를 오래전부터 알아왔다. 그저 평범해 보이는, 여일한 한 사람이 앞에 앉아 있다. 그의 작품은 점점 더 좋아진다. 방문객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도란도란 목소리를 낮춰 얘기하다 보니 그 비밀이 손에 잡힐 것 같기도 했다. 자신이 만들어내는 작품의 가장 좋은 것을 닮아가는 삶, 그것이 그 화가의 비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