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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박경일기자의 여행 게재 일자 : 2018년 12월 05일(水)
건축 속에 살아있는 시간과 이야기… ‘근대’를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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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남 목포의 조선내화 구 목포공장 내부. 삭은 지붕을 걷어내고 푸른 비닐을 씌워 황량한 폐공장 내부가 몽환적인 느낌이다.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이 공장은 근대기 산업유산으로의 의미를 인정받아 지난해 12월 등록문화재 제707호로 지정됐다. 조선내화는 공장의 건축 형태와 설비 등을 보존하면서 복합문화공간으로 꾸밀 예정이다.

‘역사’ 품은 항구도시 목포

일제강점기 목포 사람들은 체념으로 ‘부유하는 삶’을 살았으리라. 신념은 흐릿했을 것이고, 굴종은 안락했을 것이었다. 식민지 시대 목포에서는 인물의 행적도, 사건의 전개도 모순적인 건 그래서다. 왜 안 그럴까. 개항의 도시에서 식민지 시대의 삶 자체가 모순으로 가득한 것이었을 테니 말이다. 일관된 삶과 신념은 드물었다. 희망은 이미 사라졌고, 삶의 지표마저 흔들리던 시대였다.

그 시절의 정서가 이난영의 노래 ‘목포의 눈물’에 녹아 있다. 목포 사람들에게는 애국가나 진배없는 없는 노래. 목포의 눈물의 애잔한 곡조는 지금도 가슴을 파고든다. 어디 목포뿐이었을까. 바다가 보이지 않는 도시의 허름한 대폿집에서도, 연탄재 쌓인 달동네 골목길에서도 이 노래는 불렸다. 가난했고 사는 게 어려웠을 때 이 노래는 더 많이 불렸다. 목포를 고향으로 둔 이들은 더 말할 것도 없었으리라.

지금부터 이야기의 배경음악은 ‘목포의 눈물’이다. 애잔한 트로트 가락을 깔고서 목포 옛이야기를 시작한다. 1930년대에서 1960년대까지. 가장 번성했던 시절의 목포에는 ‘4대 명물’이 있었다. 4대 명물이란 당시 목포 사람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었던 인물 네 명을 말한다. 모자란 지능으로 물장수를 하면서 남의 집 잔일이나 해주며 떠돌던 ‘옥단이’. 어릴 적 앓은 소아마비로 몸이 비틀어진 목포역 짐꾼 ‘멜라콩’, 새하얀 양복을 입고 기도를 보던 호남극장의 ‘외팔이’, 리어카를 끌며 “살라믄 사고 말라믄 마쇼, 누가 아쉬운가 봅시다”라며 배짱 좋게 장사하던 대성동의 쥐약 장사….

이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모두 소외된 인물이라는 것. 그리고 몸이 불편했으나 남들보다 몇 곱절 더 성실했으며, 가난했지만 더 어려운 이들과 제 것을 기꺼이 나눴다는 것이다. 이야기는 전설처럼 전한다. ‘멜라콩’은 불편한 몸으로 목포역 수하물취급소에서 일했던 박길수의 별명. ‘멜라콩’은 당시 흥행했던 중국 영화에서 일본 무사를 따라다니던 부하의 극 중 배역 이름이었단다. 왜소한 체격과 허약한 모습이 박 씨와 비슷하다고 해서 사람들은 그를 멜라콩이라고 불렀다.

박길수는 멀쩡한 육신으로도 감당하기 어려운 고된 노동을 하며 번 돈으로 목포항과 목포역 사이 하천에 다리를 놓았다. 장애인의 몸으로 목포시도 엄두 내지 못한 일을 사재를 털어 해냈던 것이다. 하천이 매립되면서 멜라콩 다리는 진즉 없어졌지만, 거기에 다리가 있었음을 목포역 담장에 박힌 작은 표지석 하나가 이를 증명한다. 몸이 불편하고 가난했던 멜라콩의 선의(善意) 못지않게 감동적이었던 건 목포 사람들이 아직도 그를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 물지게 지던 길에서 만난 이야기

멜라콩이 목포역의 표지석으로 기억되고 있다면, 온갖 허드렛일을 하면서도 물지게를 지고 씩씩하게 살았던 또 다른 명물 ‘옥단이’는 유달산 아래 목원동의 작은 골목에서 만날 수 있다. 목포 오거리와 먹통시장으로 이어지는 4.6㎞ 남짓의 도보 코스에 ‘옥단이길’이란 이름이 붙여진 것. 옥단이길에는 일제강점의 근대부터 해방을 지나 6·25전쟁 무렵까지의 시간이 차곡차곡 쌓여 있다.

목포에는 다른 도시와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이야기가 많다. 일제강점기 목포는 ‘목포 오거리’를 경계 삼아 조선인 구역과 일본인 구역으로 나뉘었는데, 대부분 이야기의 배경은 ‘조선인 구역’이었던 목원동 일대다. 그래서 목원동의 ‘옥단이길’은 이야기를 찾아가는 길이다. 이 길을 걷다 보면 술술 풀리는 실타래처럼 이야기가 수북하게 쌓인다.

옥단이길에서 만난 이야기 하나. 개항 직후 목포에 ‘구종명’이란 경찰이 있었다. 계급은 총순(總巡). 당시 목포의 조선인 경찰 중 서열 2위였다. 개항 후 목포에는 조선인과 일본인 사이에 크고 작은 분쟁이 잦았는데, 그때마다 구종명은 조선인을 대변했다. 법률 지식이 없는 조선인을 위해 서류를 수집해 법원에 제출하며 조선인들의 방패막이가 됐다. 목포 사람들은 그런 그가 얼마나 고마웠을까.

옛 목포경찰서 자리인 초원빌라 담장 아래에 구종명을 기리는 비석이 있다. 1906년 조선인들이 그의 공덕을 기려 세운 ‘영세불망비’다. 당시 조선인들은 ‘영원히 잊지 않겠다’며 비석을 세웠지만, 훗날 구종명은 일제하에 경북 영해 군수를 지냈고 한국병합기념장과 천황 즉위기념장 등의 표창을 받았다. 이런 이유로 그는 ‘친일인명사전’에 기재됐다. 조선 민중의 인권을 지켜준 인물이 훗날 반민족행위자가 돼 손가락질을 받게 된 셈이다. 사정이 복잡해지긴 했지만, 비석은 그 비석을 세울 때의 뜻으로 서 있다.


▲  일제강점기 목포의 상업공간이 그대로 남아있는 ‘1897 개항문화거리’의 모습.

# 유달산을 팔아먹은 희대의 사기꾼

유달산 동쪽의 목포 북교동에는 ‘성취원’터가 있다. 지금 북교동 성당이 들어선 자리에 있던 성취원은 조선 말기와 대한제국 당시의 관료였던 김성규의 저택이었다. 김성규에게는 아들이 셋 있었다. 이들이 이른바 ‘목포의 모던 보이 1세대’다.

김성규의 큰아들이 근대극을 무대에 올려 ‘목포 최초의 근대예술인’으로 불리는 김우진이다. 김우진은 그러나 그보다 가수 윤심덕과 현해탄에 투신해 생을 마감한 비운의 인물로 더 알려졌다.

김성규의 둘째 아들 철진은 조선공산당 목포지부장을 지내다 우파지식인으로 변모해 도의원을 지냈다. 셋째 아들 익진은 중국 혁명군에 참여했다가 천주교에 귀의해 전 재산을 사회에 환원했다. 형제 모두 굴곡의 시대에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북교동 성당 골목의 담벼락에는 김성규와 세 아들의 사진과 함께 그들의 행적이나 글이 새겨져 있다. 담벼락에 적힌 김우진이 1926년 발표한 ‘이광수류의 문학을 매장하라’는 격한 문장을 읽어보자.

“조선이 지금 요구하는 것은 형식이 아니오, 미문(美文)이 아니오, 재화(才華)가 아니오, 백과사전이 아니다.…거칠더라도 생명의 속을 파고드는 생명력, 땅을 파면서 통곡하는 부르짖음이 필요하다.”

수사와 미문을 철저히 거부했던 그는 왜 현해탄을 건너는 배에서 로맨티스트 같은 죽음을 택했던 것일까.

인근에 또 한 명의 흥미진진한 인물이 있다. 목포 유달산에다 제 이름을 적어두고서 일본인들에게 세 번이나 팔아먹었다는 희대의 사기꾼 정병조 얘기다. 토지 합병회사에 근무했던 그는 등기법이 도입되자 이때의 경험을 밑천으로 수많은 땅을 가로챘다.

땅 주변에 자기 이름을 새긴 명부나 돌멩이 등을 묻어두었다가 나중에 찾아내서 제 땅이라고 주장하는 게 단골 수법이었다. 돈이 걸린 송사라면 그는 상대를 마다하지 않았다. 서슬 퍼렇던 조선총독부를 상대로 형무소 석산의 소유권을 주장하는 소송을 벌였을 정도였다. 산정동에는 그때 승소해서 받은 돌로 지었다는 정병조의 저택이 남아있다.

정병조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일본인을 상대로만 치부했고 말년에 45만여 평의 땅을 교육사업에 기부한 ‘목포의 기인’으로 보는 시선도 있고, 일본 권력자를 등에 업은 탐욕스러운 기획부동산 개발업자쯤으로 보는 이도 있다.

평가는 갈리지만 분명한 건 그의 기막힌 처세와 발군의 말솜씨다. 그래서일까. 그의 일화에는 덧대어진 이야기가 하나둘이 아니다. 목포 앞바다에 날아온 기러기 떼를 모두 다 제 것이라며 일본인들에게 팔아먹었다는 이야기도 그중 하나다. 기러기가 다 날아가 버리자 항의하는 일본인에게 “내가 기러기를 잘 길들였으니까, 내년에 또 온다”고 했다던가.

▲  목포 아리랑고개에서 본 유달산 아래 온금동의 모습. 사진 왼쪽 아래 아리랑고개 너머 조선내화 목포공장이 있다. 온금동은 조선내화 공장이 만든 동네다. 다닥다닥 붙은 집 뒤편 유달산 정상 아래에 건설 중인 케이블카 상부 정류장이 보인다.

# 목포, 근대 건축의 보고

유달산 남쪽에 있다고 ‘남촌’이라 불렸던 일본인 거주지역은 일본인들에 의해 만들어졌다. 일본인이 만든 도시는 바둑판 같은 계획도시였고, 집집 마다 수돗물이 나왔다. 해방 이후는 물론이고 20여 년 전까지만 해도 도시의 중심 역할을 했던 이곳도, 목포의 경제 중심이 신도시로 옮겨간 뒤 쇠락해가고 있다.

목포 목원동을 중심으로 한 조선인 거주지역인 북촌이 ‘이야기의 보고’라면, 일본인의 공간이었던 만호동·유달동 일대의 남촌은 적산가옥과 일본풍 건축물이 밀집한 근대건축의 보고다. 목포에 100년 전의 건축이 용케 살아남아 있다는 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건축이 사라지면, 기억도 잊히는 법이다.

목포의 만호동과 유달동 일대에는 낡고 오래된 근대 건물들이 밀집해있다. 목포 영사관과 동양척식주식회사 목포지점을 필두로 식민지 시대에 지은 관공서 건물들이 거의 원형 그대로 남아있다. 골목에는 크고 작은 적산가옥과 상가건물도 즐비하다. 개발지체로 인해 남아있는 이 공간이 지난 8월 ‘근대역사문화공간’이란 이름의 등록문화재로 지정됐다. 문화재가 된 곳이 특정 건물들이 아니라 구획된 공간이다. 문화재청이 만호동·유달동 일대 11만4602㎡(약 3만3557평) 전체를 문화재로 지정한 것이다.

목포 외에도 군산, 영주 등의 근대 건축 공간을 함께 등록 문화재로 지정한 문화재청은 이들 지역을 상대로 역사문화자원을 활용한 사업을 공모했다. 전국의 근대 공간을 명소로 만들어내는 것. 그것이 규제 일변도의 문화재 정책에서 벗어나 활용사업 쪽으로 고개를 돌리려는 문화재청이 지향하는 방향이었다.

이에 목포시가 팔을 걷어붙였다. 역사문화자원을 입체적으로 활용해 독특한 문화공간으로 만들어내는 도시재생사업이 목포에서 오는 2023년까지 이뤄지게 된 사연이 이렇다.


# 상점과 요정, 그리고 적산가옥

문화재청의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만호동·유달동 일대에는 다양한 명소가 있다. 이곳에는 일제강점기 화신백화점의 체인점 형식으로 운영됐던 ‘목포 화신연쇄점’ 건물과 화신백화점에 맞서 조선인 부인들이 경영한 민족자본의 ‘동아부인상점 목포지점’ 건물이 거의 원형 그대로 남아있다. 번화로와 해안로 일대에도 2층 목조상가 주택을 비롯해 실핏줄 같은 골목마다 적산가옥이 줄지어 늘어서 있다.

이쪽의 근대건축물 중에는 외형은 그대로 둔 채 내부를 손봐 감각적인 공간으로 탄생한 곳이 여럿 있다. 동아부인상점은 문화예술협동조합이 운영하는 ‘나무숲’이란 복합문화공간 겸 창작센터가 됐다.

나무숲 인근에는 ‘1897 개항문화거리’가 있다. 고종의 칙령으로 목포가 개항한 해인 ‘1897년’을 이름으로 내세운 거리다. 개항문화거리에 한때는 요정이었다가 여관으로 개조됐고, 최근에 게스트하우스가 된 ‘창성장’이 있다. 삐걱대는 나무 복도 등 일본식 건축의 느낌이 물씬 풍기는 건물이다. 늘어선 일제 목조 상가주택에는 공방이 들어섰고, 너른 마당의 적산가옥은 세련된 카페가 됐다.

거리 인근의 골목에는 여태 제 쓸모를 잃지 않은 상점도 있다. 문 연 지 100년이 넘었다는 ‘갑자옥 모자점’을, 작은아버지에게서 어머니에게로 가업을 이어받았다는 이태훈(75) 씨가 여태 지키고 있다.

골목에는 100년 내력의 상점이 있는가 하면, 문을 연 지 한 달도 안 된 곳도 있다. 창작센터 나무숲 맞은편 적산가옥 건물에 옷가게 ‘JH패션 스토리’가 새로 들어섰다. 아방가르드 스타일을 추구한다는 디자이너 이준호(65) 씨가 ‘거리 분위기와 맞는다’며 옮겨온 가게다.

근대의 기억이 선명하게 남아있는 개항 거리가 기대되는 것은 ‘그곳을 지키는 이’도, ‘새로 들어오는 이’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곳이 고리타분한 골동품 거리가 아니라, 오래된 시간을 세련되게 다루는 공간이 될 것임을 믿는다.

▲  사진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노적봉으로 오르는 골목에 그려진 ‘목포의 눈물’의 이난영 초상. 이난영 생가 자리에 조성된 기념공원의 동상. 동아부인상점 목포지점이 있던 건물에 들어선 복합문화공간 ‘나무숲’의 뒷마당. 목포근대역사관이 들어선 동양척식주식회사 목포지점 건물.

# 목포가 가진 보석 몇 개

목포에서 가장 기대되는 공간은 여기였다. 일제강점기 조선인의 자본으로 운영됐던 조선내화의 목포공장. 이 공장은 만호동·유달동에 앞서 지난해 12월 등록문화재로 지정됐다. 조선내화는 용광로 내부에 들어가는 내화벽돌 등을 굽던 공장. 1938년 처음 공장을 지은 조선내화 목포공장은 1970년대 전성기를 누리다가 공장 이전으로 1997년 문을 닫았다.

조선내화 공장 뒤쪽의 비탈에 들어선 제법 규모가 큰 산동네 마을은 순전히 조선내화가 만든 거나 다름없다. 조선내화 목포공장에 다니던 500여 명의 직원이 옮겨오면서 공장 뒤쪽에 자연스럽게 마을이 만들어졌다. 공장과 마을의 경계가 없었던 시절이었다. 그때는 공장 마당에서 구운 내화벽돌을 말렸는데, 소나기가 내리면 애고 어른이고 할 것 없이 주민들이 다 뛰어들어 벽돌을 옮겼다고 했다.

지금 공장은 말 그대로 ‘폐허’다. 텅 빈 공장 건물은 삭은 지붕을 다 걷어내고, 푸른색 비닐을 덮어놓아 간신히 비 맞기를 면한 수준이다. 굴뚝도 담쟁이덩굴이 친친 감았고, 기계를 받치던 목재 버팀목도 모두 삭았다. 그러나 폐허가 된 다섯 동의 공장 건물과 3개의 굴뚝, 그리고 5개의 산업 설비물은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조선내화는 이 공장을 복합예술문화단지로 보존 활용하는 계획을 세워두었다. 공장의 뼈대와 외형은 되도록 그대로 둔 채 조선내화 역사관과 기념관을 비롯해 공방, 카페, 갤러리, 전망대 등을 배치하기로 하고 최근 마스터 플랜 설계를 마쳤다. 생각 같아서는 설계 공모를 통해 더 창의적인 개발이 있었으면 하지만, 이렇게라도 보존되는 게 어딘가.

마지막으로 진짜 보물의 얘기다. 목포에는 엄청난 양의 유물이 무더기로 쏟아져나온 보물선인 ‘신안선’을 전시한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해양유물 전시관이 있다. 연구소는 본래 신안선 복원을 위해 세운 것이었는데, 복원 이후 신안선과 유물 전시공간이 필요해 자연스럽게 연구소 내에 유물전시관이 만들어졌다.

당초 유물전시관 문을 열 때는 전시 유물이라야 200여 점 안팎의 초라한 수준이었다. 나머지 유물은 모두 국립중앙박물관이 가져갔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지난해부터 전시관에는 입이 딱 벌어질 만큼 방대한 신안유물 진품이 관람객을 맞이하고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이 신안선 발굴 40주년을 맞은 지난해부터 신안선 유물 4500여 점을 1년 단위로 임대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에 간다면 꼭 보고와야 할 게 또 있다. 연구소 앞바다에 떠 있는 ‘조선통신사선(船)’이다. 조선통신사가 타고 일본으로 향했던 배를 문화재청이 고증을 통해 재현해냈다. 길이 34m, 폭 10m로 당당한 체구의 149t급 배다. 단청이 칠해진 선실 외부 모습이 독특하다. 다만 먼발치서 볼 수밖에 없다는 게 좀 아쉽다.

목포 = 글·사진 박경일 기자 parking@munhwa.com
e-mail 박경일 기자 / 문화부 / 부장 박경일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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