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작의 공간>위선·利己에 ‘사는 맛’ 상실한 고향… 인간다움을 불러내다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관촌(충남 보령시 대천2동) 인근 한 어촌마을에서 바라본 천수만의 낙조 풍경. ‘관촌수필’은 인간과 인간뿐 아니라 인간과 자연 역시 조화롭게 하나가 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박경일 기자 parking@

소설 ‘관촌수필’의 배경 충남 보령

일제 말기∼1970년대 배경
갈머리 마을 과거·현재 대조

개인이익보다 공동체 위하고
‘교환’보다 ‘주는 것’ 당연시
과거 = 참가치 실현된 이상향

이젠 콩서리하면 고발당하고
억울한 누명 씌우고 서로 비난
현재 = 그릇되고 비루한 시대

변하지 않은 건 붉은 노을뿐
윤리·善에 대한 그리움 담아

이문구의 ‘관촌수필’(문학과지성사, 1977)은 작가가 나고 자란 갈머리 마을(冠村, 현재 충남 보령시 대천2동)을 배경으로 한 소설이다. 이 작품은 일제강점기 말기부터 새마을 운동이 한창이던 1970년대까지를 배경으로 한 여덟 편의 중단편 소설로 이루어진 연작소설이며, 각각의 작품은 일종의 전(傳)이라고 볼 수 있을 정도로 인물을 중심으로 쓰여 있다. 1972년부터 1977년까지 발표된 이들 작품에는 각각 할아버지(‘일락서산(日落西山)’), 윤영감 가족(‘화무십일(花無十日)’), 옹점이(‘행운유수(行雲流水)’), 대복이(‘녹수청산(綠水靑山)’), 석공 신현석(‘공산토월(空山吐月)’), 유천만과 유복산 부자(‘관산추정(關山芻丁)’), 신용모(‘여요주서(與謠註序)’), 김희찬 형제(‘월곡후야(月谷後夜)’)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이 중에서 ‘일락서산’ ‘화무십일’ ‘행운유수’ ‘녹수청산’은 과거를, ‘여요주서’와 ‘월곡후야’는 현재를, 그리고 ‘관산추정’은 과거와 현재를 동시에 다루고 있다.

‘관촌수필’은 전통적인 동아시아적 시간관을 지니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동아시아에서는 가장 오래전 요순(堯舜)시대를 지향해야 할 이상적인 시대로 상정하며, 그 시대로부터 멀어질수록 참된 가치에서 벗어나 있다고 파악한다. 이 작품에서도 이러한 시간관은 그대로 적용돼 할아버지가 살아 있던 과거야말로 참다운 삶의 가치가 살아 숨 쉬는 시공이며, 지금에 가까워질수록 세상은 오염되고 타락한 것으로 그려진다.

‘관촌수필’은 작가와 거의 동일시되는 ‘나’가 13년 만에 귀향해 유년기를 회상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관촌수필’의 첫 번째 이야기인 ‘일락서산’은 사실상 유년시절의 관촌이 오늘날 완전히 사라졌음을 확인하는 비가(悲歌)에 가깝다. 관촌의 몰락은 ‘고색창연한 이조인(李朝人)’으로서 ‘위엄과 고고(孤高)의 상징’으로 ‘근엄한 선비의 기풍’을 유감없이 발휘했던 할아버지의 세계가 사라진 것을 통해 실감나게 드러난다. 이미 할아버지를 상징하는 왕소나무(가장 영광스러운 선조인 토정 이지함이 꽂은 지팡이에서 자라난 나무)는 베어져 버렸으며, 곳곳이 변해버린 갈머리 마을에서 ‘나’는 자신이 ‘실향민’이 되었음을 뼈저리게 느낀다. 이러한 상황에서 과거의 고향에 대한 노스탤지어(nostalgia, 향수)는 시작된다. 여러 사람이 주장한 바와 같이 노스탤지어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을 향해 발생하는 감정으로서, 상실된 것에 대한 아이러니한 그리움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그리움 속에서 사라진 과거의 빈자리를 채우는 것은 이상화되고 낭만화된 상념이다.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겨울 철새 청둥오리 떼가 관촌마을 주변을 감싸고 있는 청천저수지의 수면을 딛고 날아오르고 있다. 박경일 기자

공간의 본질적 특징은 그곳에 사는 사람들을 통해 드러난다는 인문지리학자의 생각처럼, ‘관촌수필’에서 이상화된 관촌마을의 특성은 그곳을 채우는 아름다운 사람들을 통해 잘 드러난다. 옹점이, 대복이, 석공, 유천만이 바로 그 아름다운 사람들의 이름으로서, 그들은 가진 것 없고 배운 것 없는 민초들이다. 옹점이는 ‘나’보다 10년이 위였지만 노상 동갑내기처럼 구순하게 놀아주었으며, 때로는 누구보다 억세고 굳은 의지를 보여주었다. 대복이는 ‘내’가 뒤만 따라다니면 모든 걸 맘대로 장난해도 겁날 게 없다고 생각할 정도로 믿음직한 동네 형이다. 석공 신현석은 가장 모범적인 일꾼으로, 아무런 보수도 없는 동네 일들에 ‘봉사하는 것이 자기의 직분이며 도리’로 여기던 사람이다. 유천만도 자신이 하는 것에 비해 품삯이 너무 보잘것없는 동네일을 하기 때문에 ‘재미를 붙이도록 타고난 천성’을 지닌 것으로 묘사된다. 유복산 역시 ‘작은 대복이라고 해도 무방할 만큼’ 마음 씀씀이가 너그럽고 자상하다. 이들은 교환의 논리를 모르며, 나의 이익보다는 공동체의 안녕을 우선시한다.

관촌마을에서는 상주목사(尙州牧使)의 아들이요, 강릉대도호부사(江陵大都護府使)의 손자로서 근엄한 선비의 기풍을 유감없이 발휘하는 할아버지와 ‘일이 급해 어느 옹기점의 독 틈에서 낳았다 하여 이름이 옹점이’라는 이와 같은 민초들이 한데 어우러져 살아간다. 그들은 모두 교환의 원리가 아닌 증여의 원리에 바탕을 두고 살아가며, 개인의 이익보다는 공동체의 도리를 우선시하는 사람들이다. ‘사농공상의 서열을 망국적 퇴폐풍조로 지적하며 무산 계급’을 옹호하는 아버지 역시, 관촌마을의 기본적인 가치에 따르는 사람이다.

나아가 관촌마을에서는 인간과 인간뿐만 아니라 인간과 자연 역시 조화롭게 하나가 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관산추정’에서는 여우가 울면 마을에 꼭 초상이 난다는 식의 신화적 상상력이 등장하기도 하는 것이다. 대복이는 동물의 생리에 너무나 익숙해 그것들을 잡는 데 언제나 첫손에 꼽히며, 유천만도 주로 돼지 새끼를 거세하거나 염소·토끼를 잡아주는 것처럼 동물과 관련된 일에 신바람을 낸다.

관촌의 이러한 아름다운 모습은 자연스럽게 순결하고 이상적인 민족 공동체를 떠올리게 한다. 이것은 관촌에 대한 위협으로 외세가 개입하는 장면을 통해 더욱 강화된다. ‘화무십일’에 잘 드러난 것처럼 한국전쟁은 이 마을을 거의 풍비박산의 지경으로 내몰지만, 그 이전에도 미군이 등장하면서 균열의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옹점이는 누구보다도 ‘주체의식, 또는 주체성이 있는 것’으로 규정되는데, 그것은 옹점이가 미군들이 던져주는 더러운 음식을 못 먹게 하는 것으로 구체화된다. 그렇게 믿음직하고 따뜻하던 대복이의 언행이 거칠어지고 도벽을 키우기 시작한 것도 미군정(美軍政) 끝 무렵에 수백 명의 미군이 읍내에 드나들기 시작하면서부터다. ‘월곡후야’에서 귀향해 농사를 짓는 희찬은, 농촌의 어중간한 식자층이 실패하는 이유가 일본을 기준으로 해 쓰인 일본의 농업서적이 무분별하게 보급되었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나’가 귀향해 마주한 관촌은 인간다운 가치로 빛나던 과거와는 거의 무관하다. ‘관산추정’에서 그려진 현재의 관촌은 아이가 논두렁에서 콩서리만 해 먹다 들켜도 고발될 정도로 동네 인심은 변했고, 놀러 온 도시 사람들로 서울 근교의 유원지처럼 소음이 가득하다. ‘여요주서’의 신용모는 억울한 누명을 쓰지만 누구 하나 도와주는 사람이 없으며, 법의 보호도 제대로 받지 못한다. ‘월곡후야’에서는 김선영이라는 중년의 사내가 딸의 친구를 강제로 임신시키고, 마을 청년들은 윤리적인 제재를 가하겠다며 김선영에게 무자비한 사적 보복을 감행한다. 그 청년들 중에서 두목격으로 행세하던 수찬은 가장 먼저 자신의 애인과 마을을 떠나는 위선적이고 이기적인 모습을 보여주기까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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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와 현재라는 이러한 선명한 대비는 문체에도 그대로 반영된다. 할아버지의 세계와 민초들의 세계가 조화롭게 공존하던 과거를 형상화할 때, 소설엔 할아버지로부터 비롯되는 전통적 한자어와 민초들로부터 비롯되는 토속어가 자연스럽게 어우러진다. 할아버지의 “그저 틈만 있으먼 밖으루 내달으니 한심한 일이로고. 색거한처(索居閒處)요, 산려소요(散慮逍遙)라고 배웠으면 배운 만침 알 만두 허련마는…”이라는 격조 있는 한자어 문체와 옹점이의 “나 시집 가먼 맨날 놀러온다메? 그려, 와. ？어 온 밥허구 건건이허구 쫍박에다 담어줄 텡께”라는 질박한 토속어 문체가 공존하는 것이다. 현재를 다룬 작품에서는 할아버지의 예스러운 문체가 사라지는 대신 당대 정부(政府)의 공식적인 언어가 등장한다. ‘여요주서’에서는 시골의 즉결 재판소에 선 피의자조차 “그런 식으로 국민 총화를 저해허지 말라구요”나 “국민 여러분께 죄송허게 생각합니다”라고 말한다. ‘월곡후야’에서 수찬을 비롯한 젊은 친구들은 린치(lynch)를 가하면서 “야, 너 잘 들어봐. 우리의 처지를 약진의 발판으로 삼어 창조의 힘과 개척의 정신을 기르며 공익과 질서를 앞세워 능률과 실질을 숭상허구, 경애와 신의에 뿌리박은 상부상조의 전통을 이어받는다-너 이게 뭔지 잘 알지?”라며 국민교육헌장을 읊어댄다.

이처럼 철저한 과거와 현재의 대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얼핏 보기에 둘은 서로 무관한 것 같지만, 이상적인 과거와 비루해진 현실은 깊은 차원에서 서로 밀접하게 연결돼 있다. 이토록 비루해진 현재야말로 장엄하기까지 한 과거의 관촌을 불러낸 진정한 이유이기 때문이다. 노스탤지어는 본래 삶의 근본적 토대 상실이라는 현재의 위기에서 비롯되는 감정인 것이다. 실제의 관촌은 결코 이상적인 신화적 공간일 수만은 없다. 이문구는 수필 ‘남의 하늘에 묻어 살며’에서 고향을 떠나 상경할 당시 관촌은 “나의 선대와 나를 키워준 고향이라는 애착심보다는 부모 형제를 잡아먹은 원수와 다름없는 저주의 땅”이자 “자다가도 몸서리쳐지는 징그러운 바닥”이라고 고백한 바 있다.

또한 ‘일락서산’에서도 드러나듯이, 관촌은 계층의 차이를 뛰어넘는 측면만큼이나 강하게 인간 사이의 위계화가 작동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동네 사람의 거지반이 행랑이나 아전붙이였으므로 하대(下待)해야 마땅하다”는 할아버지의 지론과 고집으로 어린 ‘나’는 고향을 떠날 때까지도 ‘일가 손윗사람이 아닌 이에게는 무슨 경어나 존칭을 써본 적이 없는’ 것이다. 실제로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여남은 살이 더 많은 대복이는 물론이고 10년이 위인 옹점이나 친구의 아버지인 유천만을, 여전히 ‘대복이’ ‘옹점이’ ‘유천만’으로 부른다.

‘나’가 관촌을 찾았던 무렵에도 왕소나무는 베어지고, 여우가 길을 잃어 우짖었던 개펄은 수로를 가운데로 하고 농로와 논두렁이 바둑판으로 그어져 있었다. 그때로부터 거의 반세기가 지난 2018년의 관촌에는 고층아파트까지 들어서 있다. 이제 관촌마을 기념비와 작가의 유골을 뿌린 마을 뒷산의 소나무 숲만이 이곳이 명작의 공간임을 간신히 증명하고 있다. 변함없는 것이라고는 그때나 지금이나 갈머리 마을을 붉게 물들이는 노을뿐이다. 그럼에도 한국인의 심층의식을 형성하는 전통적인 농촌 공동체의 정서와 윤리에 대한 그리움이 남아 있는 한, 갈머리 마을은 한국인의 영원한 고향으로 언제까지나 기억될 것이다.

이경재 문학평론가·숭실대 국문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