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Fifty+ >함성 속에서 3시간… 빨간 명찰 달고 回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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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구장 ‘관객 도우미’ 활약 강길훈씨

은퇴후 봉사하다 ‘제2의 인생’
경기장 티켓검수하고 좌석안내
내내 왔다갔다 서서 일하지만
관객 눈 맞추다보면 시간 훌쩍

인생 경험 살려 지혜롭게 응대
가족들도 박수 쳐줘 정말 행복
“실버 대신 시니어라 불러다오”

“실버(silver) 말고 시니어(senior)라고 불러 주세요.”

겨울을 재촉하는 쌀쌀한 바람이 불던 지난달 13일, 서울 송파구 잠실동 학생체육관 앞. 밝은 표정의 강길훈(64) 씨는 프로농구 서울SK나이츠 구단의 평일 홈경기를 보기 위해 온 관객들의 입장을 돕고 있었다. 입구를 찾아 두리번대는 이들에게 “이쪽으로 오세요”라고 외친 후 능숙한 손놀림으로 입장권 바코드를 찍었다. “재미있게 보세요”라는 추임새도 곁들인다. 관객들은 대부분 아들 혹은 손자뻘쯤 돼 보였지만 강 씨는 시종일관 깍듯했다. “나이 든 사람이 친절하게 안내하니 막 대하는 관객은 없었다”며 빙그레 웃었다.

강 씨는 SK텔레콤 SK나이츠 프로농구단이 서울 송파구와 손잡고 은퇴 후 제2의 인생을 맞은 노년층을 대상으로 한 ‘실버 챌린저’를 통해 젊음의 열기가 뜨거운 농구장에서 지난 10월부터 일하고 있다. SK나이츠의 홈경기가 열리는 날이면 강 씨는 어김없이 이곳을 찾는다.

“퇴직 이후에 ‘무엇을 해볼까’ 고민했어요. 인터넷에서 이것저것 검색하다가 이 일을 알게 됐죠. 평소 스포츠를 좋아해서 더 관심이 갔어요. 주말 경기는 오후 5시에 열리기 때문에 점심 이후에 와서 준비를 하고, 오후 7시 반에 시작되는 평일 경기 때는 5시까지 와서 식사 후 환복하고 맡은 구역에 투입되는데, 정해진 시간에 경기가 시작되기 때문에 시간 엄수가 필수예요. 스포츠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라면 쉽지 않은 일이죠.”

입구에서 관객들의 검표가 끝난 후에는 경기장 안으로 자리를 옮긴다. 좌석을 찾지 못한 관객들을 안내해 주는 것이 강 씨의 몫이다. 입장권에 좌석 번호가 쓰여 있지만 출입 게이트를 잘못 찾아서 헤매는 이들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을 도와 빨리 자리를 찾아주는 것은 이미 좌석에 앉은 관객들의 관람 환경을 개선하는 일이기도 하다.

“농구장에 자주 오는 젊은이들은 자리를 금방 찾아요. 하지만 나이 든 관객이나 외국인들은 좌석을 찾는 것이 녹록지 않죠. 선수들이 입장하고 경기가 시작된 후에는 관객석의 조명을 어둡게 하기 때문에 더 어려움을 겪어요. 이렇게 불편함을 느끼는 이들의 문제를 해결해줬을 때 ‘고맙다’는 말 한마디를 들으면 그보다 더 뿌듯할 때가 없습니다.”

은퇴 전 강 씨의 경력은 꽤 화려하다. 군에서 장교로 장기 복무하다가 서울의 한 학교에서 ROTC 교관으로 근무했다. 전역 후에는 또 다른 대학에 취업해 학생들의 고민을 함께 나누는 진로취업센터에서 20년간 일했다. 그곳에서 명예퇴직할 때까지 관련 연구 논문도 20편 이상 쓰고 학위도 땄다. 수원대, 인덕대, 한국체대 등에서 교양과목 강의도 맡았다. 농구장에서 일하기 전에는 전문교육을 받은 후 강남진로교육센터에서 전문가 시니어 멘토로 위촉돼 활동했다.

“퇴직한 지는 3년 정도 됐어요. 저는 사학연급 수급자인데 33년을 일하니 연금 자격도 꽉 찼죠. 그래서 정년을 1년 남겨두고 명예퇴직을 했어요. 오랜 기간 조직에 매여 있었는데 그보다는 프리랜서로서 두루두루 다양한 경험을 해보고 싶었지요. 특히 취약계층을 위해 봉사하는 단체에서 멘토 역할을 많이 했어요. 그때부터 봉사의 기쁨과 만족감을 알게 됐죠.”

농구장에서 일하는 ‘실버 챌린저’는 그동안 강 씨가 했던 일 중 가장 육체적으로 고되다. 근무지에 투입되면 앉아 있을 시간이 없다. 3시간 반 정도는 서서 모든 일을 처리해야 한다. 체력에 자신이 없으면 엄두가 안 나는 일이다. 하지만 스포츠 마니아답게 꾸준히 운동을 해온 강 씨에게는 거리낄 게 없었다. 모집 요강을 훑어보고는 당당히 지원서를 냈고, 10대 1의 경쟁률을 뚫었다.

“아침 10시에 면접이 있었는데 제가 1번이었어요. 가나다 순인데 제가 ‘강 씨’잖아요. (웃음) 그러니 면접관들이 뭘 물어보는지 누군가에게 물어볼 틈도 없이 면접장으로 들어갔죠. 다른 건 없었어요. 군대에서 장교 생활을 했기 때문에 시간관념과 책임감이 철저하고, 체력도 자신 있다고 어필했죠. 제 자랑을 실컷 했어요. 그랬더니 이렇게 일할 기회가 주어지더군요. 3시간 넘게 서서 일하다 보니 첫날은 꽤 뻐근했는데, 이제는 익숙합니다. 경기를 보면서 박수 치다 보면 3시간 정도는 금방 가요.”

농구장을 찾는 이들이 주로 젊은층이다 보니 가끔은 예의 없는 이들도 맞닥뜨리지 않을까? 강 씨는 이에 대한 대응 매뉴얼도 이미 갖추고 있었다. ‘내가 나이가 많다는 생각을 하면 안 된다’는 것이 전제 조건이었다. 나이가 아닌, 인간 대 인간으로서 상대방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가이드라인을 제시해야 상대방도 수긍한다는 것이다.

“객석이 계단형이라 항상 조심해야 해요. 난간에도 기대면 안 되는데 지키지 않는 젊은이들이 가끔 있어요. 그럴 때 무작정 ‘하지 마’라고 제지하기보다는 위험을 고지하고 설득을 하려 합니다. 항상 권유형으로 얘기하려 하죠. 상대가 어리다고 함부로 반말을 해서도 안 됩니다. 다짜고짜 반말을 듣고 기분 좋을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제가 먼저 미소를 지으며 공손하게 경어로 권유하면 상대방도 부드럽게 응대해요. 그리고 제가 한마디 하기 위해 상대방의 이야기 아홉 마디를 들어주죠. 이렇게만 하면 다툴 일이 없습니다.”

강 씨는 경기가 없는 날이면 또 다른 단체에서 여러 일을 하고 있다. 빼곡히 적어 온 자신의 필모그래피를 보여주며 자신을 찾는 곳에 대해 신나게 이야기했다. 쉬엄쉬엄 할 만도 한데 좀처럼 브레이크를 밟지 않는다. 무엇이 그를 이토록 부지런하게 만드는 것일까?

“늦둥이가 하나 있어요. 이제 군대에 가죠. 부모로서 자녀가 결혼하기 전까지 최소한의 경제적 뒷받침을 해줘야 한다는 책임의식을 갖고 있어요. 그렇다고 억지로 일하는 건 아닙니다. 일 자체를 즐기죠. 젊은 친구들에게 뒤지지 않으려 항상 새로운 것을 익히고 자기계발도 끊임없이 해요. 그래야 사람은 도태되지 않아요. 늦둥이 때문에 일을 안 할 수 없는 게 아니라, 늦둥이 덕분에 나를 더 발전시킬 수 있는 거죠.”

강 씨는 얼마 전 가족들을 농구장으로 초대했다. 평소 농구 경기를 즐겨 보는 편이 아니라 처음에는 가족들이 주저했다. 하지만 퇴직자인 줄 알았던 가장이 열심히 일하는 모습을 다시 한번 보여주고 싶었다. 또 경기장의 열기와 함성이 주는 에너지를 가족들과 나누고 싶었다. 막상 경기장을 찾은 가족들의 반응은 대단히 긍정적이었다.

“꼭 응원하는 팀이 없어도 됩니다. 승부를 떠나서 묘기가 나올 때마다 울리는 함성 소리만 들어도 온몸에 전율이 일어요. 가족들도 경기가 끝난 후 ‘시간이 되면 자주 와야겠다’고 하더군요. 제 생각이 틀리지 않은 거죠. 능숙하게 일하는 아빠의 모습을 본 아들 녀석도 ‘참 대단하고 존경심이 우러난다’고 했어요. 그 말을 듣는데 정말 행복했습니다.”

실버 챌린저로 일하는 데 더없이 만족한다는 강 씨. 하지만 한 가지, 바꾸고 싶은 것이 있다. ‘실버 챌린저’라는 명칭을 ‘시니어 챌린저’로 바꾸면 좋겠다는 것이다. 노인을 단순히 나이 든 이들이 아니라, 주니어에 대비되는 경험과 경력을 갖춘 시니어로 바라보는 인식이 잡혔으면 하는 게 그의 바람이다.

“실버는 왠지 그냥 나이가 많은 것 같은데, 시니어는 기량이 뛰어난 사람을 뜻한다고 생각해요. 어감의 차이가 결국은 인식의 차이도 만들지 않을까요? 한 분야에서 은퇴한 이들도 저는 ‘퇴직자’가 아니라 ‘전문가’로 대접받는 게 옳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자신이 일하던 분야에서 최고의 자리까지 지내고 물러난 이들이니까요. 60세가 넘어가면 노인이라 생각하는 이들이 많은데, 요즘은 그렇지 않아요. 아직 일할 역량과 체력이 충분한 이들을 시니어로 대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만들어지면 좋겠습니다.”

안진용 기자 realyong@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