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여담>볏짚의 부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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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성규 논설위원

짚은 벼나 보리, 밀, 조, 콩 따위의 이삭을 떨어낸 줄기와 잎이다. 이 농작물의 이름이 앞에 붙지 않으면 짚은 대개 볏짚을 일컫는다. 벼는 이삭 하나에 150∼160개의 낟알을 생산해 출가시켰으니, 일반 초목으로 치면 천수를 다한 셈이다. 그러나 그게 아니다. 이전까지의 삶이 벼의 일생으로서 오로지 2세인 쌀을 위한 삶이었다면, 볏짚의 한살이는 지금부터가 시작이다.

예전에 볏짚은 곱게 이엉으로 엮여 지붕을 이는 재료로 한몫했다. 지붕의 주재료가 볏짚이던 시절, 이맘쯤이면 시골집들은 황금빛으로 빛났다. 바람에 날아가지 않도록 동여매는 마감재도 짚으로 꼰 새끼줄이었으니, 그들은 동료와 더불어 동고동락했다. 농민들은 볏짚 지붕 아래서 먹고 자고, 짚을 넣어 누른 천장과 짚털을 섞어 친 바람벽 보금자리 안에서 아이들을 낳고 키웠다. 농한기에는 짚으로 신을 삼거나 새끼를 꼬았고, 농산물을 갈무리할 농구며 운반 용구를 짚으로 만들어 사용했다. 가마니와 볏섬은 물론 멱둥구미·둥우리·망태기·삼태기·잿박이며 멍석·덕석까지도 볏짚으로 엮었다.

뭐니 뭐니 해도 볏짚의 요긴한 쓰임은 한우의 사료다. 산야의 풀들이 시들어 삭은 겨울철, 작두로 썬 짚여물은 농우를 배 불리는 든든한 천연 쇠꼴이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볏짚이 건초에 밀려나는 듯싶더니 들녘에서 천덕꾸러기로 버려지다시피 했다. 소들은 건초와 인공 사료에 맛을 들였고, 볏짚을 수확할 인력마저 줄고 고령화한 농가 현실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

요즘 넓은 들을 지날 때면 하얀 비닐로 포장된 커다란 덩어리를 흔하게 보게 된다. 곤포 사일리지(梱包 Silage)다. 그 속에는 사료용 볏짚이 숙성되고 있다. 소를 위한 ‘김장 여물’이라고나 할까. 농업인들이 볏짚을 다시 거둬들이기 시작한 것이다. 늘어난 사료용 볏짚 통계가 말해준다. 2016년에 소 사료로 유통된 볏짚은 170여 만t이었으나, 지난해에는 200여 만t으로 20% 가까이 늘었다. 소 사육 농가가 늘었다는 뜻이다. 그러니 사료용 볏짚 수요가 늘고, 시세가 좋을 수밖에 없다. 400∼500㎏짜리 곤포 사일리지 1개당 2만 원가량 농업인의 손에 떨어진다니, 이만한 고소득 상품이 또 있을까? 두엄으로 일생을 마칠 뻔했던 볏짚이 젊은 날의 이름들을 뒤로하고 농업상품으로 부활하면서 가파른 인생길에 지친 농심을 무심히 달래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