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작의 공간>이승과 저승 잇는 ‘타임머신’… ‘不死의 백제’를 만나다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충남 공주시 송산리고분군 무령왕릉 입구 모습. 지난 1971년 7월 발굴 조사를 통해 백제 제25대 무령왕과 왕비의 무덤으로 확인됐으며, 2015년 유네스코 세계 유산으로 등재됐다. 자료사진

- (141) 문효치 ‘詩想의 산실’ 충남 공주 무령왕릉

연좌제에 짓눌렸던 젊은 시절
분노·좌절에 병들어가던 때
발길 부르던 무령왕의 흔적들

목관은 저승 가는 한 척의 배
내게 말걸고 손짓하는 것 같아
백제의 역사가 상상력 자극

무궁무진한 ‘생각의 광맥’서
죽음 공포 대신 삶의 목표가…
1500년전 유물이 詩로 재탄생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무령왕릉에서 나온 금제관식(金製冠飾).

백제시
- 酒君*

가슴속에
매 한 마리 키우네

서늘한 기류 밖
푸른 별 하나 나꿔챌

매 한 마리
숫돌에 부리를 갈아 날을 세우고
옹이를 찍어 발톱에 힘을 기르네

날마다 하늘을 우러러보며
별 하나 표적을 찾아

눈을 닦고 있는
매 한 마리 자라고 있네

*酒君 : 일본 황실에 매 사냥법을 가르쳐준 백제인.

내 젊은 날은 항상 죽음의 곁에 있었다. 아니 죽음의 공포에 가위눌려 있었다. 내가 이렇게 된 것은 병 때문이었다. 그 병은 정신상의 병이었는데 차츰 육신으로까지 전이돼 갔다. 나는 사회의 부조리에 대한 역심을 품고 있었는데 그것이 병의 원인이 되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상당히 많은 사람을 짓눌렀던 연좌제 때문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 피해자 중 하나였다. 나는 이것에 대해 큰 분노를 가지고 있었다.

그때 나는 ‘빨갱이의 아들’이었다. 6·25전쟁 때문이었다. 황량하고 삭막하고 극한적인 전쟁 속에서 많은 사람이 죽거나 고통을 받았다. 살아있는 사람들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절망과 싸워야 했다. 이 전쟁은 잘 따져보면 죽은 자들이나 고통받는 사람들의 책임이 아니었다. 힘 있는 자들의 힘겨루기 틈새에서 어이없게 피해를 당한 것이었다. 누구에게도 하소연할 수 없이 스스로 화가 나는 일일 뿐이었다. 아버지는 인민군이었고 삼촌은 국군이었다. 당시 8, 9세였던 나는 누가 우리 편이고 누가 적인지도 몰랐다. 그저 어린 가슴속에 상처만 생겨나고 짙푸른 멍이 번져갔다.

참 이상했다. 사랑하는 가족들이 왜 이러는지를 몰랐다. 그렇게 이상한 생각을 속 깊이 품으면서 나는 자라고 있었다. 우리 집은 정말 가난했다. 끼니를 거르는 일도 있었다. 때로는 보다 못한 친척이 빵을 사다 주어 끼니를 때우기도 했다. 겨울이면 닳아서 구멍 난 헌 내복을 기워서 갖다 주기도 했다.

참 이상한 세상에서 참 이상하게 살면서도 어머니의 눈물겨운 노력으로 학교는 어찌어찌 다닐 수 있었다. 그러면서 어느덧 군대에 갈 나이가 돼 버렸다.

그 무렵엔 내가 그래도 조금은 철이 들었었던 것 같다. 이왕 군대 생활을 할 바에는 월급을 받을 수 있는 장교로 입대할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국방의 의무를 다하고 월급도 받아 어머니를 조금이라도 도우리라 생각했다.

ROTC에 입단해서 2년간 충실히 교육훈련을 받았다. 그러나 장교 임관은 되지 않았다. 아버지 때문이었다. 전부터 미워해 오던 아버지가 더욱더 미워졌다. 그러나 그 미움이란 매우 묘한 미움이었다. 아버지를 미워하면 할수록 오히려 나 자신에 대한 미움이 커지기만 했다. 아버지를 두고 내 이중적 자아가 심각한 교란을 일으키고 있었다.

군대 생활은 나에게 엄청난 상처를 안겨 주었다. 하사관 생활을 해야 했던 나는 ROTC 동기생 장교가 근무하는 중대의 분대장으로 복무해야 했다. 군 수사기관에서는 나를 늘 감시했다. 내 소지품을 수시로 뒤져보기도 했다. 나를 보호해 주어야 할 국가는 이렇듯 삼엄한 감시자였고 끊임없이 나를 추궁했다.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무령왕릉에서 나온 은팔찌(위)와 청동거울.

“너 북에 있는 아버지와 내통하고 있지? 너 빨갱이 아니야?”

연좌제는 참 무서웠다. 제대하고 민간인 생활을 할 때도 나는 수시로 불려가 조사를 받았다. 직장(교직)에서도, 지인이나 친인척들도 나를 사갈시하곤 했다.

젊은 몸속에서 분출하고 싶어 하는 많은 욕망은 한없이 억제되며 웅크리고 있어야 했다. 분노와 좌절 그리고 절망이 나를 완전히 점령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들은 속으로부터 내 생명을 갉아먹고 있었다. 이러한 자해 행위는 쉼 없이 계속되었다. 그러다 나는 나무토막처럼 쓰러져버리고 말았다. 죽음이 바로 옆에 와 있었다. 그때가 30대 초반이었다.

1971년 공주에서 무령왕릉이 발굴됐다. 모두들 해방 이후 최대의 발굴이라고 흥분했다. 나중에 들은 바로는 비 오는 날 졸속발굴했다는 말도 있었지만 고고학계와 사학계는 물론, 일반 국민까지도 대단한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았다. 서울 덕수궁 현대미술관에서 서둘러 발굴된 유물들을 전시했다.

전시관을 한 바퀴 돌아본 후 나는 ‘무령왕의 목관재’ 앞에 서 있었다. 나의 상상력이 작동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영락없는 한 척의 배였다. 선장도 사공도 없는 배였지만 깊은 생각과 치열한 의식이 있는 배였다. 바다를 건너는 배가 아니라 이승과 저승 사이의 공간을 가로질러가는 배였다. 그런데 지금 빈 배로 내 앞에 와 있는 것은 이제 나를 저승으로 태워가기 위함이었다. 어쩌면 6·25전쟁 때 나는 이미 죽었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우리 집 마당에 거대한 포탄이 떨어져 있었는데 그게 불발탄이었다. 그때 죽음을 간신히 모면했지만 그 뒤에도 죽음은 항상 내 가까이에 와서 손짓을 하고 있었다. 나는 이쯤에서 시 한 편을 쓸 수 있었다.


武寧王(무령왕)의 木棺(목관)


그렇지 님을 실어 저승으로 저어가던 한 隻(척)의 배가 세월의 골깊은 앙금에 익어 지금 여기에 머무르다. 이별을 서러워하던 血肉(혈육)의 눈물이 아직도 마르지 않은 채 쉬임 없이 들려오는 蒼生(창생)의 울음소리, 짭짜름한 저승의 바람 냄새가 잡혀 와, 그렇지, 우리가 또 빈손으로 타고서 아스름한 바다를 가르며 저어가야 될 한 隻(척)의 배가 여기에 왔지.

나는 배의 승객이었다. 나는 이 배를 타고 무령왕의 새로운 나라로 가고 있었다. 거기는 우리가 무서워하는 저승이었다. 그러나 무섭지 않았다.

‘목관재’뿐만이 아니었다. 왕릉에 함께 있다가 이승의 세상으로 나온 ‘금제관식’ ‘청동식이’ ‘도자등잔’ ‘관정’ ‘철전’ ‘다리미’ ‘유리구슬’ ‘청동수저’ ‘청동거울’ ‘나무새’ ‘장도칼’ 등등 수많은 것이 모두 이승과 저승을 연결해 주는 타임머신이었다.

나는 그것들을 통해 천오백 년 전의 나라에도 가고 또 그때의 사람이나 문물을 지금의 세상으로 데려올 수도 있었다.

그들은 세월의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었지만 그 먼지를 털어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다만 세심히 관찰하고 그들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되었다.

그들은 모두 나름의 언어를 발하고 있었다. 어쩌면 많은 ‘생각’이 그들을 이루는 주성분이고 그 생각들을 들어줄 사람을 만나기를 기다리고 있었을 것으로 여겨졌다.

나는 그들 하나하나의 말을 들어주기로 했다. 가령 도자등잔(陶磁燈盞)의 말에 귀 기울여 보면 오십 대쯤의 후손을 만나고 싶다는 희망의 말을 들을 수 있었고, ‘나무 두침(頭枕)’에게서는 그리운 임을 위해 노래하고 싶다는 호소를 들을 수 있었다. 또 ‘육이호(六耳壺)’는 오히려 누구든 나에게 와서 말하면 다 들어주겠노라고 귀를 열어 놓고 있었다.

그들이 말하는 것은 백제어(百濟語)였다. 현재 서울에서 쓰는 교양인의 말이 표준어라 한다면 그들의 말은 백제 사투리라고 해야 할 것이다. 백제 사투리로 하는 그들의 말을 듣는 것은 나에겐 큰 충격이었고 사건이었다. 그리고 흥미진진했다.

무령왕비의 팔목에 채워져 있던 은팔찌의 겉면에는 용이 정교하게 조각돼 있다. 그리고 피부에 닿는 안쪽 면에는 ‘多利作’이라고 사람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이 팔찌를 多利가 만들었다는 표시다(현재 박물관에 보관돼 있는 팔찌들 중 작가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 것은 이것이 유일하다). 그 팔찌의 말을 들어보면 이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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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는 백제의 감성적인 장인으로 평소에 왕비가 품위 있고 아름답다는 소문을 듣고 사모하게 된다. 어느 날 궁으로부터 왕비의 팔찌를 만들어 보내라는 명을 받는다. 다리는 온 정성을 다해 팔찌를 만든다. 사랑하는 여인에게 바칠 수 있는 유일한 물건이기 때문이다. 다리는 팔찌를 통해 자신의 영혼과 육신을 전하기로 하고 용을 새겨 넣었다. 가서 왕비를 휘감을 용은 다리 자신이었다.

이상은 그 은팔찌가 나에게 전해 준 말이다. 역사적·과학적 근거가 있거나 기록에 있는 말은 아니지만 듣는 이의 정서적 진실이 담겨 있는 말이다. 나는 이렇게 하여 은팔찌에 대한 또 다른 인식을 할 수 있었으며 사랑을 지향하는, 새로운 불멸의 생명성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렇게 공주 무령왕릉에서 출발한 백제의 상상적 영역은 부여·익산·화순·한성 등으로 뻗어 나가고 일본까지도 확장돼 갔다.

천오백 년 전에 죽었다고 생각했던 그 사람, 그 나라가 내 삶의 환경과 합쳐지면서 나는 죽음에 대한 생각을 바꿀 수 있었고 시(詩)나라의 무한영역에 스스로 감동할 수 있었다. 백제의 공간은 나에게는 무궁무진한 생각의 광맥이었고, 내 상상력이 뛰놀 수 있는 드넓은 놀이터기도 했다.

나에게 백제는 불사(不死)의 표상이다. 여기서 말하는 不死는 ‘죽지 않는다’가 아니라 ‘죽어서 산다’는 뜻이다. 그래서 ‘서늘한 기류 밖 푸른 별 하나 나꿔챌’ 삶의 목표를 분명히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제는 마음의 상처가 많이 치유되었다. 죽음의 공포도 사라졌다. 죽음 앞에서 담담할 수 있게 되었다. 죽음의 세계는 삶의 세계 바로 저기에 붙어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곧 하나일 것이기 때문이다.

문효치 시인·한국문인협회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