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준계약서 개정에도 방송사 ‘甲질’ 여전

적자 뻔한 제작비 제시하고… 예산 초과되면 책임 회피하고…

외주업체에 콘텐츠 저작권
광고 수익 배분 규정했지만
실효성 적어 현장에선 신음

방송콘텐츠를 만든 제작사가 저작권을 가질 수 있는 토양이 마련됐지만, 플랫폼을 가진 방송사들의 여전한 ‘갑질’ 속에서 과연 어느 정도 실효성을 거둘 수 있을지 우려하는 현장의 목소리가 끊이지 않고 있다.

공정거래위원회는 최근 방송콘텐츠 저작권을 제작사가 갖고, 간접광고 수익도 방송사와 제작사가 나눠 가지는 내용을 담은 표준하도급계약서를 제·개정했다고 밝혔다. 콘텐츠를 직접 만든 제작사가 당연히 그에 따른 권리를 가져야 하는데 그동안 그렇지 못했다는 의미다. 하지만 방송사 등 원사업자가 창작 과정에 기여한 경우에는 저작권을 나눠 가진다는 단서 조항을 달았기 때문에, 방송사들이 이를 악용해 더 많은 이익을 취하려 할 것이란 관측에 무게가 실린다.

문화일보가 드라마 외주제작사 10여 곳을 상대로 실태 조사를 한 결과 중소 제작사를 상대로 한 방송사들의 횡포는 심각한 수준이었다. 제작사 A는 상반기 모 지상파 방송사에서 전파를 타는 대작을 기획·개발해왔으나 최근 방송사에 모든 권리를 넘기고 손을 뗐다. A 측은 “방송사가 제시한 제작비가 터무니없었다. 그 계약대로라면 우리는 회당 1억 원이 넘는 손실을 떠안을 수밖에 없다”며 “게다가 콘텐츠에 대한 권리도 확보하지 못해 손실을 막을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지금까지 투입된 최소한의 비용만 받은 후 방송사에 콘텐츠를 넘겼다”고 토로했다.

제작사 B는 지난해 하반기 또 다른 지상파 방송사에 드라마를 납품했다. 이 드라마가 종방된 지 반년 가까이 돼가지만 B는 아직 방송사와 외주제작 계약조차 맺지 못했다. 꽤 준수한 시청률을 거두고 광고계의 반응도 괜찮아 방송사는 수익을 냈지만, 방송사가 제시한 계약서대로라면 B는 적자를 면치 못하는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B 측은 수십억 원의 제작비를 자비로 댄 후 여전히 방송사와 줄다리기를 하고 있다.

케이블채널과 손잡고 드라마를 만든 제작사 C 역시 난감한 상황이다. 외부적 요인으로 촬영일수가 오버돼 예산을 초과할 수밖에 없는 상황 속에서 차질없이 드라마를 완성했지만, 이후 방송사 측이 책임을 회피하고 있기 때문이다. 방송사는 이런 상황을 인지하고 있었으면서도 ‘일단 만들고 보자’는 식으로 제작사를 회유한 뒤 뒷짐을 지고 있다. 이 방송사 역시 C가 제작한 드라마로 적잖은 수익을 낸 것으로 알려졌다.

결국 몇몇 방송사는 ‘편성’을 무기로 제작사들에 ‘제 살 깎아먹기’식 경쟁을 강요하고 있다. 또 다른 외주제작사 관계자는 “방송사들의 주수입원이었던 TV 광고 시장이 위축되면서 구멍 난 실적을 제작사 권리를 빼앗아 메우려는 시도는 끊이지 않았다”며 “표준하도급계약서 제·개정은 반갑지만 방송사들이 어떤 편법으로 이를 피해가려 할지 알 수 없다”고 우려했다.

안진용 기자 realyong@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