現사회계약으론 ‘갈라진 세계’ 못 넘는다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 우리 대 그들 / 이안 브레머 지음, 김고명 옮김 ／ 더퀘스트

세계화로 불안·불평등 일상화
양극화·정체성 갈등 퍼지면서
극심한 공포가 포퓰리즘 키워

‘우리’‘그들’로 나누는 이분법
좌우 진영 가릴 것 없이 쓰여
선동 비판보다 대안 고민해야

의료 복지는 얼마나 제공할지
난민 개방 어느정도 허용할지
지금과 다른 사회적 합의 제안

“세계주의자들은 미국 노동자 계층의 배를 갈라서 아시아의 중산층을 키웠다. 지금 중요한 것은 미국인들이 더는 그렇게 ‘병신’취급당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2016년 미국 대선에서 도널드 트럼프가 승리한 직후 전 백악관 수석전략가였던 스티븐 배넌이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했던 말이다.이 선동이 트럼프 대통령을 만들었다. “국가는 이제 국가가 아니라 시장이 됐다. 국경은 사라졌다. (…) 이젠 아무나 우리나라에 들어올 수 있고, 그래서 우리의 임금이 깎이고 사회적 보호망이 망가지고 있다. 그것이 우리의 문화적 정체성을 모호하게 만들고 있다.”

2017년 프랑스 대선에 도전했던 극우정당연합 대표 마린 르펜의 말이다.

‘우리’와 ‘그들’을 가르는 벽을 세워 표심을 긁으려는 포퓰리스트 정치인들의 대표적 발언이다. 2016년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와 트럼프의 당선, 2017년 신인 중도 정치인 에마뉘엘 마크롱의 프랑스 대통령 당선 등 포퓰리스트 정치의 성공은 전 세계적으로 줄을 잇고 있다.

최근 트럼프가 밀어붙여 연방정부 최장 셧다운(일시적 업무정지) 기록을 갈아치운 멕시코 국경장벽은 ‘우리’와 ‘그들’을 가르는 벽이 물리적으로 현상화된 경우다. 르펜의 네 마디 말 속에는 서구 사회 전반에서 포퓰리스트들을 지지하게 만드는 사람들의 불안감이 적실하게 요약돼 있다.

이 책은 글로벌 정치 리스크 연구 및 컨설팅 기업인 유라시아 그룹의 회장이자 저명한 칼럼니스트인 이안 브레머가 지난해 4월 미국에서 출간했고, 원제목이 ‘우리 대 그들: 세계화의 실패’(US vs THEM : The Failure of Globalism)이다.

저자가 세계화 반대론자는 아니다. 정보, 노동, 자본이 인류 역사상 유례없는 속도와 규모로 국경을 넘나들 수 있게 한 세계화는 최근 수십 년 사이 10억 명 이상을 빈곤에서 벗어나게 했다고 저자는 인정한다. 하지만 그 세계화라는 극도의 상호의존성은 2008년 미국에서 촉발된 글로벌 금융위기 같은 징후와 전 세계적인 양극화, 중산층의 몰락 등으로 한계에 봉착했다. 세계화의 위기는 평범한 사람들 사이에서 국가와 정부가 개인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주지 못할 것이라는 극심한 공포심을 키웠고, 그 자리에 포퓰리즘이 성장했다.

그 불안은 먼저 경제적인 것이다. 최대 부국인 미국에서도 부의 불평등과 중산층의 몰락이 심각하다. 1970년대에 미국 전체의 62%를 차지했던 중산층의 소득은 2014년 43%에 그쳤고, 중산층 가구의 순재산은 28% 감소했다. 세계화는 무역뿐 아니라 자동화와 인공지능 등 기술발전도 촉진해 수많은 일자리를 사라지게 만들고 있다. 1979년 이후 미국 공장 생산직 일자리 40%가 증발했는데, 2006∼2013년 사이 사라진 생산직 일자리 중 88%는 로봇에게 넘어갔다.

세계화가 만든 제2의 공포는 정체성을 둘러싼 공포다. 이 불안은 특히 유럽에서 인구 이동과 관련돼 있다. EU 내 시민의 자유로운 이동을 보장하는 EU 규정으로 영국에 살고 있는 6500만 명 중 영국 외 지역 출신은 2015년 870만 명으로 10년 사이 두 배 이상 증가했다. 브렉시트를 부른 원인이다. 무엇보다 EU에서는 2015∼2016년 사이 주로 중동과 북아프리카에서 폭력과 압제를 피해 이민을 신청한 사람이 250만 명에 달했다.

사람들 사이의 소통을 원활하게 할 것으로 기대됐던 정보통신의 발달은 오히려 벽을 만드는 데 사용됐다. 인터넷과 소셜미디어에서 뜻 맞는 사람만 팔로하고 원하는 뉴스만 읽으려 하는 ‘필터 버블’은 편향성을 강화해 오히려 분노를 유발하고 시위를 조직하는 수단으로 쓰인다.

이 같은 불안의 토양에서 나오는 ‘우리 대 그들’의 메시지는 좌우 양 진영에서 모두 쓰임이 좋았다. 좌우 가릴 것 없이 상황에 따라 국민 대 정부, 부자 대 빈자, 국민 대 이민자, 혹은 다수 민족 대 소수 민족의 양상으로 나타나고 이용된다. 대안은 있을까.

저자는 트럼프나 르펜 같은 정치선동가를 비판하기는 쉽지만, 오히려 긴급한 문제들을 도외시해 ‘우리 대 그들’의 문제를 심화시킬 수 있다고 우려한다. 포퓰리스트 정치인의 지지자들이 품고 있는 희망과 두려움을 외면한다면 해결책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선택해야 한다. 장벽을 세울 것인가? 아니면 사회계약을 재작성할 것인가?” 저자는 불평등의 해소라는 주된 목표를 가지고 현재의 사회계약들을 재점검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변화하는 세상에서 중요한 교육을 위한 투자를 어떻게 배분할지, 혁신을 통해 나온 수익보다 임대수익에 더 높은 세금을 매기는 등 세금정책을 어떻게 지향할지, 이미 유행이 아니라 일반화된 ‘기그(gig) 경제’의 프리랜서를 어떻게 우대할지, 의료복지는 어느 수준까지 제공할지, 난민에 대한 개방은 어느 선까지 유지할지 등에 대해 사회적 합의를 다시 해야 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사회계약을 재작성하는 것이 앞으로 한동안은 정치적으로 불가능한 일일 것”이라고 단기적으로 부정적으로 본다. 이는 “너무 많은 세계주의자가 여전히 현행 시스템에서 이익을 보고 있고, 다양한 유형의 장벽이 그들을 실질적인 위험으로부터 일시적으로는 보호해줄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상황이 지금보다 훨씬 더 나빠져야만, 특히 승자들마저도 그렇게 느낄 때가 돼야만 비로소” 모두 함께 어울려 살아갈 방법이 모색될 것이라고 저자는 우울하게 전망한다. 272쪽, 1만7000원.

엄주엽 선임기자 ejyeob@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