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고통 그리고 죄책감 시적 자서전이자 386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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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광석 시집 ‘꽃도 사람처럼…’

1990년 ‘사상 문예운동’으로 등단, 1992년 첫 시집 ‘친구여 찬비 내리는 초겨울 새벽은 슬프다’를 내놨던 채광석 시인이 27년 만에 두 번째 시집 ‘꽃도 사람처럼 선 채로 살아간다’(문학의 숲)를 출간했다. 그의 첫 시집은 진보적 리얼리즘을 보여주며 그해 대학생들이 읽어야 할 올해의 좋은 책으로 꼽히기도 했다. 하지만 시인은 1995년 ‘내일을 여는 작가’에 시 13편을 발표한 뒤 스스로 시를 접었다.

이번 ‘꽃도 사람처럼 선 채로 살아간다’에 수록된 시 ‘1997 절필’은 당시의 정황을 짐작하게 한다. “둘째가 태어났고／때마침 한 출판사로부터／끝내 출간되지 못한／ 시집 원고도 돌아왔다／ 이유가 두 가지나 늘었다／돈을 벌기로／스물 아홉이 되니／왕성한 물욕이 일었다.”

그 뒤 학원 이사장이 됐고, 다시 10년 만에 그 일을 그만뒀다. 이번 시집은 이 같은 그의 30대, 40대를 지나 50대에 이르는 삶이 서정적이면서도 냉정한 현실의 언어에 담겨 있다. 그 끝에 이르러 시인은 세상을 바꾸고자 했으나 스스로 선(善)이 되지 못한 자신과 동료에 대해 반성한다. ‘여름 이야기’의 한 구절은 이렇다. “세상의 개벽인 것처럼 포장하면서／거기에 빨대 하나 꽂으려 했던 … 자꾸 쓰레기 냄새가 진통했다.”

그런 점에서 시집은 상처와 고통, 죄책감 그리고 다시 일어나는 꿈을 말하는 한 시인의 시적 자서전인 동시에 386으로 호명됐던 세대의 초상이다.

문학평론가 방민호 서울대 교수는 “386세대의 끄트머리를 구성하는 한 개체적 인간의 초상이자 시대의 굴곡을 그와 함께 타고 넘어온 모든 386들의 초상”이라며 “이 새로운 시적 자서전은 우리들로 하여금 가슴 깊이 도사린 슬픔과 아픔을 어루만져 주고, 타인들의 삶에 대한 새로운 자극으로 이끌어 줄 것이다”고 평했다.

27년 만에 시집을 낸 그는 시인의 말에서 이렇게 말한다. “살아왔고 살아갈 날이 하루하루 죄를 쌓아 올리는 거대한 돌탑 같다. 시인이 선량한 사람은 아니지만 시문 밖으로 출행한 지 스물세 해 만에 다시 언어의 사원 앞마당을 기웃거린다.”

최현미 기자 ch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