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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이 푸른 별에서 너와 나는 게재 일자 : 2019년 01월 30일(水)
미완의 사이, 공허함을 모면하려 시계와 달력을 만들었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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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의규·구자명 부부 작가의 미니픽션 - (18) 늙은 어린왕자

째깍거리는 시계 초침 소리
곧 날짜가 넘어가면 달력은
벽에서 바닥으로 뛰어내린다

달력은 초침 꼬리를 데리고
내가 서 있었던 시간밖에서
중간 회색의 빛깔로 웃는다

어린왕자는 B612에 있을까?
그는 지금 몇 살쯤 되었을까?
늙은 어린왕자라니…


담배가 없다. 빈 담뱃갑의 비닐포장을 벗겨 종이 갑만 재활용 종이 쓰레기통에 넣으려다 문득 귀찮고 하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습관적 이 행동은 바람직한 사회적 미덕이라고 당연시했었지만 이것이 과연 얼마나 실효적 가치가 있는 것인가에 대해서 의문이 들었다. 쓰레기통 앞에서 엉거주춤 선 채 사회적 이상과 구호의 실체에 마주하여 이제야 처음으로 쩔쩔매는 지금의 내가 그 얼마나 우스꽝스러울까 하여 그 꼴을 거울에 비쳐 보고픈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 허접한 몰골은 굳이 거울을 통해 확인하지 않아도 이미 눈앞에 그려지기에 도리질을 치며 한 손에는 담뱃갑을 또 한 손엔 비닐포장을 쥔 채 멍청하게 서 있는 동안 지구는 초속 1669킬로미터로 자전을 하며 돌고 또 동시에 초속 29.8킬로미터로 공전을 하고 있다. 그리고 수억만 광년의 별빛은 내 눈으로 인내심을 가지고 달려오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는 그 별 뒤 B612호 소행성에 정말 있는 것일까? 그는 지금 몇 살쯤 되었을까? 늙은 어린왕자라니. 쓰레기통 앞에서 이런 멍청한 상태를 언제까지 유지하며 서 있어야만 하는 것인가? 간명한 말로써 지금의 상태를 규정짓고 돌아서서 다음의 행동으로 옮겨야 하는데 그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어느새 혀는 내 의지와는 달리 입속에서 망설이듯 굼뜬 움직임으로 된음과 경음이 뒤섞인 욕을 하고 있다. 그 욕의 대상이 나인지 남인지 모를, 그러나 비대상은 아닌 주어가 생략된 상태의 욕지거리다. 스스로 민망해진 탓에 혀 놀림을 중지했다. 혀는 입속에 갇혀 부자유라는 억지스러운 이성의 통제에 대해 몹시 불만이다. 그래서 대신 무엇인가 먹고 마시는 맛에만 더욱 익숙해진 것이겠다. 그럴지도 모른다. 이성의 끝은 본능일 뿐인지도 모른다. 내 생각을 들은 혀가 쯧쯧거리며 제 몸을 찬다. 하찮은 생각의 끝도 못 본 채 다음의 생각과 말과 행동이 이뤄진다면 그것은 그 얼마나 무책임하고 가증스러운 것인가? 그 미완의 때와 때 사이, 그 공허와 진부함을 모면하려 인류는 어쩌면 시계와 달력을 만들었는지 모른다.

▲  김의규 한국미니픽션 작가회 창립 회장·화가
째깍거리는 시계의 초침 소리가 들린다. 이것은 고요의 증거이다. 아, 그러고 보니 2018. 12. 31 자정에 가깝다. 곧 날짜가 넘어가면서 달력은 벽에서 바닥으로 뛰어내릴 것이다. 어쩌면 그에게 한 해 동안 수고했노라고 말해주어야 하는 것 아닐까? 하지만 너무 친절한 상냥함이 어쩐지 위선인 것 같아 자정이 넘는 때에 하기로 했다. 미국에서는 자정이 넘는 때를 기해 스리 투 원 카운트다운을 외치며 바로 옆에 선 낯선 남녀가 부둥켜안고 키스를 한다지? 왜 그럴까? 만일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미리 점 찍어둔 가장 예쁜 여자 곁에 바짝 다가서서 붙박여 있을 것이다. 그래서 자정이 막 넘어서는 순간, ‘쾅쾅쾅’ 소리와 함께 눈앞에 별이 보이며 나동그라지는 뭇 사내들. 그들도 모두 나와 같은 생각이다. 그들은 나를 째려본다. 내가 낯선 이방인이라서 그런 것이겠다. 아직도 가물가물 눈앞에서 반딧불처럼 깜박이는 별들, 그중에 어린왕자의 B612호 소행성은 어느 것일까? 엉거주춤 빈 담뱃갑을 들고 서 있는 내 머리 둘레에 별들이 반짝이며 돌고 있다. 아직은 이 해가 몇 분 정도 남아 있다. 해가 바뀌기 전 나는 진부한 이 생각을 끝내야만 한다. 정말로 별 볼 일 없는 생각을 마무리 짓지 못하고 다음 해로 넘긴다는 것은 견딜 수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늘 그랬기 때문에 이번만큼은 절대 안 그러리라고 위아래 어금니를 악물어 짓누르며 굳은 마음을 먹는다. ‘째깍째깍’ 초침은 나를 아랑곳하지 않고 냉엄하고 인정머리 없는 집달리처럼 제 할 일만 한다. 그 집달리는 나의 한 해 채무를 무섭게 확인시키고는 시간 밖의 낯선 세계로 가난한 나를 쫓아낼 것이다. 그러면 거기에 빈 담뱃갑과 담뱃갑에서 벗긴 비닐포장지를 든 무기력한 사내, 시간의 세계를 바라보며 무한의 공간을 실감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지금 이 자리에서 영원하리란 시적 표현을 읊어대며 내 그림자라도 보아 달랄지 모르겠으나 시간이 없는 곳에는 빛도 없으니 그림자가 있을 턱도 없겠다.

아직 자정이 되지 않았는데 어느 여가수의 노랫소리가 귀에서 재생된다. ‘시간은 자정 넘어 새벽으로 가는데…’ 그 새벽 여가수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하는 사이 1.5초의 시간을 써 버리고 말았다. 담담히 받아들여야만 한다, 2018이 2019가 되는 이 단순한 산술적 흐름을. ‘부르르’하는 소리가 내 눈길을 잡아챈다. 라면이 끓어 넘치고 있다. 이성의 끝은 본성이란 말도 내팽개치고 후다닥 달려가 가스레인지를 껐다. 책상엔 이미 소주잔이 놓여 있었다. ‘툭’ 소리를 내며 달력이 벽에서 뛰어내린다. 달력은 시계 초침 꼬리를 데리고 내가 잠시 서 있었던 시간 밖 세상에서 중간 회색의 빛깔로 서서 희미하게 웃는다.

글·그림 = 김의규

한국미니픽션 작가회

창립 회장·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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