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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명작의 공간 게재 일자 : 2019년 02월 08일(金)
佛畵로 공덕 쌓은 불교성지서… 나를 비우고 그림을 채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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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3대 사찰(삼보사찰, 三寶寺刹)의 하나인 경남 양산의 통도사 금강계단과 대웅전 전경.

펜화가 김영택의 통도사

中서 부처의 진신사리 모셔온
상서로운 기운넘치는 통도사
2002년 달력 제작 부탁받아

사찰생활 첫날 종소리에 눈물
스님들 “절과 인연 깊기 때문
전생에 스님으로 불화 그려”

僧·俗서 人 뺀 ‘曾谷’ 호 얻어
스님과 속인 사이서 작품활동
5계 지켜가며 수행하듯 그려

작가로서 엄청난 발전 얻어가
신문 게재로 펜화개척 계기도
‘김영택 화법’ 시작점은 통도사


2001년 12월 31일, 펜화로 만든 달력을 들고 경남 양산 통도사를 방문했다. 종무소에서 만난 재무담당 스님이 달력을 보더니 주지실로 안내했다. 주지 스님과 차담을 나눈 후 재무 스님은 법사실로 자리를 옮기고는 “통도사 달력을 만들어 주실 수 있습니까”라고 했다. 얼떨결에 “좋습니다”는 대답이 튀어나왔다. 그렇게 해서 통도사 산문을 들어선 지 한 시간도 못 돼 달력 소임을 맡고, 고급 객실인 법사실을 스튜디오로 사용하게 됐다. 이때만 해도 통도사 법사실에서 지내는 동안 펜화가로서 괄목할 만한 변화와 발전이 있을 것이라곤 상상도 못했다. 더구나 통도사가 전생에 불화를 그리는 스님으로 큰 공덕을 쌓은 곳이라는 것은 꿈에도 몰랐다. 2002년 1월 초 통도사 법사실에 스튜디오를 차렸다. 통도사는 통일신라 때 자장 스님이 중국에서 가져온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신 금강계단이 있어 한국불교의 으뜸 사찰로 손꼽는다. 한국 불교 최고 성지인 금강계단이 있어 대웅전에 부처를 모시지 않았다. 부처의 사리가 있는 절에는 늘 상서로운 기운이 넘친다. 시간 날 때마다 금강계단에서 기도를 했다.

펜화가로 전환한 1994년 베트남 출신의 큰스님으로 관음명상단체를 이끄는 ‘청해무상사’의 제자가 됐다. 누구나 깨달으면 부처가 된다는 가르침 아래 5계를 철저히 지키며 명상수행을 했다. 5계 중에 첫째가 ‘불살생’ 즉 고기나 생선을 먹지 않는 것이다. 철저한 채식 생활을 보고는 태연 스님이 증곡(曾谷)이란 호를 지어 주었다. 스님을 뜻하는 승(僧)자에서 사람인변을 빼면 증(曾)자가 되고, 일반인을 뜻하는 속(俗)자에서도 사람인변을 빼면 곡(谷)자가 된다. 즉 스님도 아니고 속인도 아니라는 뜻이었다.

▲  2002년 1월 김영택 화백이 화실을 차리고 1년여 기거했던 통도사 법사실.

화가에게 작품은 작가의 분신이다. 작가의 눈으로 들어온 시각 정보가 머릿속에서 구상화돼 손으로 표현될 때 작가의 내면이 붉다면 붉은색이 물든 작품이 될 것이다. 푸른색도 같을 것이며, 지저분하다면 작품도 더러워질 것이다. 따라서 기록 펜화에서 대상물의 특성이 왜곡되지 않고 화폭에 담기려면 작가가 무색무취(無色無臭)해야 된다. 채식도 자기 정화를 위한 방법으로 분명 작품에 영향을 줄 것이다. 수행자적 생활도 작품에 영항을 준다.

2001년 12월 찾은 통도사는 채식과 명상하기 좋은 곳으로 고향에 온 듯 편했다. 명상은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잡생각을 버리고 삼매에 드는 길. 펜화를 그릴 때 ‘나’라는 존재를 잊고 저절로 삼매에 들기 시작했다. 그림의 대상물과 종이 위에 펜 선의 움직임만 존재할 때 좋은 작품이 된다. 대상물의 모습과 기운이 온전하게 살아 있는 작품이 되는 것이다. 펜화를 보고 “작가의 생활에 일반인과 다른 점이 무엇입니까” 묻는 분들이 있다. 맑고 정화된 기운이 느껴진다고 했다. 기를 연구한다는 분들은 펜화에 표현된 자연과 건물에서 강한 기운이 나온다고 했다.

펜화를 독학으로 시작했기 때문에 기법, 도구 등 모두 주먹구구식이었으나 통도사에서 하나하나 고쳐졌다. 엄청난 발전이었다.

첫 번째는 잉크. 초기에 사용한 잉크는 카트리지에 잉크가 들어 있는 로트링 아트펜이었다. 통도사에서 작업하면서 아트펜 잉크가 쉽게 바래는 것을 알았다. 몇 십 년도 못 가는 작품을 그렸다니! 수소문 끝에 먹물로 만든 잉크를 찾아서 그린 첫 작품이 통도사 불이문이었다. 병에 든 먹물을 쓰면서 다양한 펜촉을 사용하게 됐다. 펜화 기법이 다양해졌다. 두 번째는 화지. 세밀한 펜 선을 살리려면 표면이 고운 펜화전문지가 필요했다. 알파문구 본사에 부탁해 브리스톨지를 수입했다.

세 번째는 현장에서 그리는 방식에서 사진을 이용하는 방식으로 전환한 것. 펜화 시작 초기, 사진을 이용해 그렸더니 그림에 평면 느낌이 강해서 포기했다. 현장에서 그리면서 많은 애로를 겪었다. 비나 눈이 와도, 추운 날씨도 작업을 할 수 없었다. 햇빛 아래서 백색 화지를 보면 설맹으로 눈을 버릴 수 있고, 오랜 시간 햇빛을 쏘이면서 피부에 검버섯이 생겼다.

통도사에서는 저녁 6시 이후면 적막강산처럼 고요했다. 할 일도 없었다. 무료한 시간을 때우기 위해 법당의 복잡한 처마공포를 망원렌즈로 나눠 찍은 여러 장의 사진을 이어놓고 방에서 작업했다. 현장에서 그릴 때보다 세밀하고 입체적인 표현이 가능했다. 이 방법은 디지털카메라로 찍은 사진을 컴퓨터에 입력하고 모니터로 보면서 작업하는 방식으로 발전했다. 네 번째는 화지의 크기 변화. 현장에서는 작은 스케치북을 쓸 수밖에 없었으나 실내 작업을 하면서 화지가 커졌다.

통도사에 살림을 차린 첫날 범종루에서 법고와 범종 치는 모습을 보았다. 법종이 울리자 가슴이 울컥해지면서 눈물이 흘렀다. 이를 본 스님은 “통도사와 인연이 깊기 때문입니다”라고 했다. 부전 스님은 한술 더 떠서 “전생에 영상전 팔상탱을 그린 유성 스님이다”라고 했다. 보물 제1041호 통도사 영산전 팔상탱은 통도사 성보박물관의 제일 중요한 소장품으로 국내에서 가장 크며, 작품 수준과 세밀함에서 팔상탱뿐만 아니라 한국화 중에서도 으뜸이라 할 수 있다.

유성 스님과 연관된 기이한 체험을 여러 번 하면서 분명 전생에 유성 스님이었다고 확신했다. 세밀한 펜화를 그리는 것도 전생의 업장이 현생으로 이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주지 스님을 설득해 2004년 달력을 영산전 팔상탱으로 만들었다. 2003년 달력은 펜화로 만들었으니 현생 작품과 전생 작품으로 달력을 만든 작가가 세상에 또 있겠는가.

▲  펜화로 그린 경북 문경 봉암사 일주문. 탤런트 고두심 씨가 전시장을 찾아 구입했다.

2002년 가을 통도사 달력에 들어갈 작품 12점이 완성되자 특별한 일들이 생겼다. 첫 번째가 신문 연재였다. 펜화를 시작하면서 꿈꿨던 대형 일간지 연재가 이뤄진 것이다. 지면에 크게 실린 펜화에 매료된 독자들이 폭발적으로 늘었다. 신문 연재로 펜화라는 새로운 미술 장르와 ‘펜화가’라는 직업을 알려 한국 펜화의 개척자가 됐다.

두 번째가 경북 문경 봉암사의 작품 주문이었다. 조계종 종정을 지낸 서암 큰스님의 입적이 가까웠는데 임시공양간(식당)을 지을 돈이 부족하니 펜화로 판화본을 만들어 100점을 주면 보시금 걷는 데 활용하겠다고 했다. 봉암사 일주문 작품은 2003년 3월 28일 완성됐고, 큰스님은 30일 입적하셨다. 작품은 평소 실력을 두세 단계 뛰어넘은 걸작으로 평가됐다. 스님들은 통도사에 살면서 부처님 가피를 받은 결과라 했다.

봉암사 펜화 작업은 작화비가 없었으나 흔쾌히 수락했다. 이 결단이 탤런트 고두심 여사와 인연을 맺는 씨앗이 됐다. 2004년 6월 인사동 학고재 3개 층 전관에서 4주간의 첫 전시를 열었다. 전시 첫날 아침 폭우 속에서 첫 손님으로 고 여사가 와서 첫 번째로 구매한 작품이 봉암사 일주문이었다. 그 뒤 그림, 도록 556권, 엽서 세트, 포스터가 완판됐다. 한국 화랑 역사상 처음이라 했다.

전시장을 방문한 도사 같은 분이 봉암사 일주문을 보더니 “작품 잘 샀네. 올해 좋은 작품 받고 칭찬 많이 받겠다”고 했다. 고 여사가 그해 연말 KBS와 MBC에서 방송대상을 받자 학고재 유지현 큐레이터가 “도사 말이 맞았네요” 하며 전화를 했다. 도사 선생이 “자녀 방에 걸어 놓으면 공부 잘해서 좋은 학교 진학할 것이다”라고 평가한 ‘합천 영암사지’ 판화본을 아들 방에 걸었다. 선행학습도 없이 과학고 진학했고, 카이스트에 들어갔으니 도사 말이 맞은 것일까.

2003년 통도사 펜화 달력은 펜화가를 불교계에 유명 인사로 만들어 주었다. 신도들에게 무료로 나눠 주는 일반 달력 외에 좋은 종이에 인쇄하고 박스에 넣은 고급 달력도 만들어 전국에 배포했다. 청와대에서도 추가 요청이 있을 정도로 펜화 달력의 인기는 대단했다. 펜화 달력에 매료된 만불사 큰스님이 서울 인사동의 넓은 오피스텔에 스튜디오를 차려 줬다. 한국문화의 중심 인사동에 멋진 스튜디오를 갖추면서 성공한 작가처럼 보였고, 각종 매스컴에 자주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3년 만에 같은 건물에 방을 잡아 독립했다.

인사동 스튜디오에서 ‘김영택 화법’이 탄생했다. 사진이 인간 시각과 다른 것을 발견했다. 풍경을 사진에 담으면 현장에서 본 감흥과 동떨어진 사진이 되기 쉽다. 인간의 눈이 카메라 센서와 크게 다르기 때문이다. 인간의 눈은 망막의 중심 부분에 고해상도의 망막세포가 있고, 주변부에는 저해상도의 망막세포가 있다. 그래서 여기저기 훑어봐야 되고, 사진처럼 한 장의 이미지로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한 덩어리의 이미지로 기억한다. 가까운 사물은 표준렌즈와 비슷하게 보고, 먼 곳의 사물은 줌렌즈처럼 보기 때문에 특이하거나 중요한 사물은 비례보다 크게 기억한다. 이런 인간 시각 특성에 맞춰 세계 최초의 도법을 만들고 ‘김영택 원근법’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2005년부터 시작한 인사동 스튜디오 시절 10여 년은 펜화의 황금기였다. ‘펜화에 담은 한국 건축문화재’와 ‘펜으로 복원한 문화재’ ‘세계 건축문화재 펜화기행’을 10년간 매체에 연재했다. 세계 최장 기록이라 했다. 인천공항 입국장 국가 홍보 부스에 백제 미륵사지 석탑 복원화와 고구려 장군총 복원화 등 8점의 작품이 전시됐다. 경주 황룡사 역사문화관 로비에 황룡사 대탑 복원화를 걸었고, 세종대왕 기념관, 김좌진 장군 기념관에 복원화가 전시됐다. 문화재청은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 방한 때 부인 펑리위안(彭麗媛 ) 여사에게 펜화로 만든 기념품을 주었고, 2009년과 2019년 달력을 펜화로 만들었다. 내 펜화가 국가 재산이 된 것이다.

2018년 여름 도쿄(東京) 한국문화원에 전시된 한국과 일본을 포함한 세계건축문화재 작품이 모두 인사동 스튜디오에서 완성된 것이니 김영택 펜화는 통도사 법사실에서 기초가 완성되고, 인사동에서 꽃을 피웠다 할 것이다.

글·사진 = 김영택 펜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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