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생각하며>소통과의 공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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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방언 재일 한국인 음악가

커뮤니케이션 방법은 천차만별
나의 경우는 음악·언어 두 가지

가사 없는 인스트루먼트 음악 통해
국경 넘어 많은 사람과 기쁨 공유

20년 전 한국어 서툴러서 불안불안
따뜻한 반응에 우리말로 소통 고집

공존을 주제로 쓰고 있는 이 코너의 이번 주제는 소통(커뮤니케이션)과의 공존이다. 소통에는 몇 가지가 있지만, 그 방법은 환경과 개인에 따라 천차만별이므로 일률적으로 단정할 수 없다. 나의 경우 그 수단, 즉 도구는 크게 나눠 음악과 언어 두 가지다.

먼저, 음악에 대해. 나는 인스트루먼트 음악(instrumental music)을 한다. 인스트루먼트 음악이란, 악기 연주를 통한, 노래 없는 음악(기악)이라고도 한다. 물론 그것만 하는 건 아니다. 영상 작품의 주제곡이나 삽입곡을 작곡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노래의 악곡을 제공하기도 한다. 20년 전쯤까지는 가수의 프로듀싱이나 작곡·편곡이 주업이었지만, 지금은 기본적으로 인스트루먼트 음악가로 주로 활동한다.

음악 가운데 말(언어)이 지니는 의미는 매우 크다. 가사가 있는 경우 그것이 음악의 등장인물·배경·스토리 등 큰 틀의 흐름을 결정해 나가고, 큰 설득력으로 관객을 끌어간다. 남녀 간의 사랑 이야기에서부터 장대한 스케일의 대하 서사시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종다양하다.

하지만 인스트루먼트 음악은 곡명(曲名) 외에는 거의 말이 없는 상태로 구성된다. 예외는 있지만, 중요한 게 타이틀 표제, 곧 곡명이다. 특별한 표기가 없으면 관객은 그 곡명을 염두에 두고 음악을 듣고 빠져든다. 그리고 그중 자신들의 생각대로 이미지를 부풀려 자유로운 음악 여행에 나선다. 곡명은 이야기의 들머리이고, 이후는 저마다의 상상을 따라 여행하는 것이랄까…. 그것이 인스트루먼트 음악의 매력이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인스트루먼트 음악의 매력은 가사라는 언어에서 독립해 있는 만큼 국경을 넘어 많은 사람과 그 기쁨을 공유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전 세계인이 클래식 기악 명곡에 용기를 얻고 감동을 하고, 재즈의 뜨거운 교감에 도취하거나, 민족악기로 그 나라의 대표적인 선율을 연주할 때면 타국인들에게 다양한 생각을 전할 수 있는 것이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아리랑’이 아닌가 한다. 최근 일본 공연에서도 ‘아리랑’을 노래 없이 서양 악기로만 나름의 방식으로 연주했다. 공연 후에 그렇게 ‘아리랑’을 연주해 주니 정말 친근감이 솟고 좋은 곡이더라는 평을 많이 들었다. 이런 식으로, 말이 없는 악기 연주지만 귀에 들어오는 음악이 지니는 소통의 가능성은 매우 커서 때로는 국경도 가볍게 넘는다. 음악을 통해 이미지를 공유하고 공존한다고 느끼는 순간, 이는 정녕 음악의 명리(冥利·불가에서 말하는 선행에 따른 행복감)에 이른 것이다.

또 하나의 소통 도구는 ‘언어’다. 나는 일본에서 태어나 조총련계 학교에서 북한 말로 9년간 공부했다. 그 후 의사가 되기 위해 일본 학교에 진학했다. 당시 일본은 조총련계나 민단계 학교는 정식 교육과정으로 인정하지 않아 대학 입시 응시 자격을 주지 않았다. 모든 대학이 그랬던 건 아니고 각 대학이 자율적으로 결정했지만, 조총련과 민단계의 학교를 인정하는 대학 수는, 특히 의학부는 극히 적었다. 그래서 고교부터 일본 학교에 들어가 열심히 공부해서 의사가 됐지만, 어떻게든 음악을 하고 싶었다. 결국, 1년 뒤 가출을 했고 마침내 음악가가 됐다.

시간이 흘러 서른여덟 살이던 1998년,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했다. 중학교를 졸업한 이후 23년간의 한국어 공백기가 있었던 데다 중학교 때 배운 말이 평양말이어서, 서울에서 아무리 열심히 말해도 잘 통하지 않아 기분이 침울해졌다.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한국 음악(scene) 데뷔는 1999년 11월. 서울에서 처음으로 피아노 콘서트를 했다. 이때가 가장 불안했다. 연주는 거뜬했지만, 마이크로 의사소통이 제대로 될지 어떨지….

연주가 끝나고, 더듬더듬 북한 사투리로 나름 진지하게 말했다. 그런데 관객들이 웃는 바람에 안절부절못했다. 하지만 그 웃음은 조소나 멸시가 아니라, 한국어로 소통하려고 무지 노력하는구나 하고 헤아려 준다는, 따뜻이 맞아주려고 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여기에서 의사소통이 되겠다는 자신감이 들어 한국에서 더욱 공연을 하고 싶었다. 아니, 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생각하게 됐다. 모국인 한국에서 음악으로 공존할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을 갖게 된 것이다.

그 후 조금씩 한국 공연이 늘어 갔다. 활동 초기, 콘서트를 통해서가 아니라, 라디오나 TV에 종종 출연할 때면 제작진이 통역인을 붙여주는 일이 몇 번 있었지만, 매우 부자연스러웠다. 할 수 있는 데까지 직접 말하고 싶었다. 사람들이 웃어도 좋다고 생각했다. 다행히, 표준말 듣기는 웬만큼 가능했는데, 관건은 내 뜻을 어떻게 전할 것인지였다. 몇 차례 출연 때에도 첫 피아노 콘서트 때와 같은 느낌을 받았다. 진행자나 제작진을 포함해 접하는 사람 모두가 내가 말하는 페이스에 맞춰 줬으며, 좌절할 때에는 손을 내밀어 주었다. 내가 하려는 말을 미리 알아채곤 그 말이 내 입에서 자연스럽게 나오도록 유도해 주는 경우가 많았다. 따뜻함을 느꼈다. 이후, 사람들 앞에 나설 때는 통역을 두지 않고 가능한 한 직접 말하기로 마음먹었다.

이는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잘 지켜져 주위에서 그것을 받아주지만, 과연 내 한국어 실력이 어느 정도로 좋아졌는지는 모르겠다. 지금도 자주 무대에 올라 연주하고, 직접 말을 하지만 관객 모두가 웃는다. 물론 따뜻하게 받아주면서. 그리고 그런 순간이 나는 너무너무 좋다. 이것이 전혀 완벽하지 않은 나의 한국어 실력으로 얻은 보물 같은 공존의 순간이다. 이 얘기를 쓰고 있자니 다시 콘서트를 하고 싶어 참을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