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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파워인터뷰 게재 일자 : 2019년 02월 15일(金)
내가 지켜본 박서보… 사냥감 앞에 둔 표범처럼 작은 작품도 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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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에도 용광로처럼 끓는 ‘청년 예술의 魂’

화가 박서보, 그의 이름 앞에는 늘 따라다니는 수식어가 있다. ‘청년’과 ‘거인’이 그것이다. 이 두 단어는 그의 삶을 가장 함축적으로 규정한다. 구순에 가까운 나이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따라붙는 ‘청년’이란 말은 여전히 작업실을 지키며 하루도 거르지 않고 작업에 몰두하는 그의 삶과 그림에 대한 열정, 지치지 않고 늘 똑같은 자세로 자신의 미학을 구현하는 태도 때문일 것이다.

1950년대 앵포르멜 시기부터 지금의 원색 묘법에 이르기까지 그의 작업은 청년의 패기와 열정으로 점철돼 있다. 작품의 외양은 그간의 내공으로 다져져 세월을 두고 균질한 원색의 화면으로 변했지만, 그의 그림 너머에는 여전히 청년의 열정이 용광로처럼 들끓는다. 그의 이런 태도는 실은 자신의 여린 마음과 흔들리는 감정을 다잡기 위한 방편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그는 척박한 세상에 ‘현대미술’이라는 단어를 화두로 삼아 세상과 인습, 기존 체제와 싸워 온 사람이기 때문이다.

미술대학을 꿈꾸던 고 1 때 인사동 통인화랑에서 열렸던 그의 개인전에서 처음 만났다. 그는 우윳빛 캔버스 위에 물결치듯 중첩되는 선이 그림이 되는 묘법 작품을 선보였다. 석고 데생에 열심이었던 입시준비생의 눈에는 생경했다. 이런 그림을 그리려면 미술대학에 안 가도 되겠다고 당돌하게 한마디 드렸더니 씨익 웃으셨다.

그후 대학에 들어가선 안성 대림동산 화실에 나가 캔버스를 매어 드렸고, 서울 가는 차가 끊기면 깊은 밤 나이 어린 제자에게 소주잔을 나눠 주시며 삶과 그림에 대해 이야기해 주셨다. 한창 한지작업을 하던 1980년대에는 원주나 가평에 가서 한지를 만들어 날랐고 목재소에서 캔버스를 맞춰 왔다. 이렇게 시작해 그림을 접고 큐레이터의 길로 들어선 이래 50여 년이 다 돼간다.

하지만 그가 가장 인간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그의 1960년대 초 파리 시절 풍경화를 볼 때다. 작가로서 자존심 하나로 버틴 그지만 서울에 두고 온 어린 자식을 비롯한 가족의 생계를 위해 파리에서 풍경화를 그려 집에 보냈다. 그리고 이 이국적인 파리 풍경화는 가끔 쌀이 돼 그의 가장 역할을 도왔다. 그래서 풍경화는 아름답지만 실은 고단한 삶을 드러내는 슬픈 오브제다.

그는 필자를 부를 때 어김없이 ‘어이~, 인생’이란 말을 이름 앞에 붙인다. 이 말에서 나는 인간 박서보를 느낀다. 그 또한 세상을 다녀가는 수많은 부족한 사람 중 하나다. 필자에게는 한없이 고마운 어른이지만 때로는 섭섭한 존재이기도 했다. 하지만 인간이라면 어쩔 수 없는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그의 쉼 없는 삶과 예술을 경영하는 태도는 그를 둘러싼 어떤 평가보다 앞에 있다.

그의 요즘 작업은 차분하고 그윽하나 뜨거운 원색의 표정을 지닌다. 하지만 작업을 대하는 그의 태도는 앵포르멜 시대의 열정이 그대로 남아 있다. 마치 사냥감을 앞에 둔 표범처럼, 작은 소품 하나에도 목숨을 걸 것처럼 최선을 다한다. 어느 작품 하나도 허투루 대하는 법이 없다. 따라서 그의 작업에는 노인의 삶을 바라보는 혜안이 담겨 있으나 여전히 불타는 그림에 대한 열정, 아니 삶의 본질에 다가서기 위해 아랑곳하지 않고 도전하는 결기가 느껴진다. 그의 그림은 정진의 성과이자 전진의 결과다.

이제 우리에겐 숙제가 있다. 그가 입버릇처럼 했던 “따르지 말고 넘어서라”는 말처럼 누가 그를 극복할 것인가이다. 우리는 언제쯤 ‘거인이 된 청년’ 앞에 당당할 수 있을까. 백수 천수를 누려 당신의 뜻대로 당신을 뛰어넘는 이를 만나는 복을 누리시길.

정준모 미술평론가

前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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