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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3·1운동, 지나온 100년 다가올 100년 게재 일자 : 2019년 02월 21일(木)
집앞에도 ‘태극기’ 내걸고… 숨죽여 부르던 ‘애국가’도 당당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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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3월 1일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열린 만세시위 장면. 독립기념관 제공

- 다양했던 저항방법

호남‘만세’는 종교계 큰 역할
경남은 농어민·노동자가 주축
경북은 대구서 처음으로 시위
충청선 횃불 들고 봉화 피워

면사무소 일장기→태극기 게양
번화가에선 ‘독립선언식’ 열려

日,접경지에 헌병 등 대거 배치
북부지방 강한 저항 유발하기도


“우리가 만세를 부른다고 당장 독립이 되는 것은 아니오.

그러나 겨레의 가슴에 독립정신을 일깨워 주어야 하기 때문에 이번 기회에 꼭 만세를 불러야 하겠소.”

독립운동가 손병희 선생은 1919년 3·1 독립선언을 앞두고 천도교 간부들에게 다짐했다. 서울과 평양, 평북 의주·선천, 함남 원산,평남 안주·진남포 등 7개 도시에서 시작된 3·1만세운동은 두 달이 넘도록 도시에서 농촌으로, 국내에서 국외로 확산됐다.

당시 연희전문학교 2학년 학생이던 정석해는 훗날(1969년 신동아 3월호) 탑골공원에서 시작된 3·1만세운동의 모습을 이렇게 기록했다.

“백의(白衣)의 청년들이 앞을 다투어 대열에 가담했다. 인파는 광화문 네거리까지 꽉 메웠다. 우리 눈에는 왜놈 하나 보이지 않았다. 모두 만세 꾼이었다. 우리의 발걸음 앞에는 거칠 것이 없었다. ‘왜놈 물러가라’는 함성은 지축을 진동했다. 광화문 네거리에 이르러서 대열은 양분되었다. 한 대열은 경복궁으로 향했다. 그 후에 들은 말이지만 그리로 가서 광화문 앞에서 만세를 부를 때는 순사 한 사람이 순사 모자와 제복을 찢어 던지고 ‘조선독립 만세’를 부르며 시위에 가담하여 대중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는 것이다.”

◇3·1만세운동 전국 방방곡곡 확산

3월 2일에도 만세시위는 계속됐다. 한국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가 2009년 발간한 ‘한국독립운동의 역사’에 따르면 주요 시가지마다 전날과 마찬가지로 시위대로 가득 채워졌다. 종로에는 노동자와 학생이 중심이 된 400여 명이 모여 만세를 부르며 종로경찰서로 향했다. 3월 3일은 고종 황제의 장례식으로 만세시위를 자제하는 분위기였다. 이튿날부터 다시 시위를 전개했는데, 이날은 만세운동의 중심적 역할을 했던 학생들이 지방의 만세운동을 위해 귀향했기 때문에 만세시위를 고취하는 각종 격문 등을 시내 요소요소에 부착했다. 3월 5일 남대문역(서울역) 광장에는 약 1만 명의 학생, 시민들이 모여 학생단 독립 만세시위가 벌어졌다. 이후 산발적인 시위가 이어지다가 3월 18∼21일까지는 그나마 이 같은 모습조차도 잠잠했다. 그러나 이 잠복기를 거치는 동안 지방 주민들이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고, 자신들도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게 되자 독립을 요구하는 시위운동은 걷잡을 수 없이 전국 방방곡곡으로 번졌다.

3월 하순부터 4월 초까지는 만세운동 절정기였다. 이 기간 전국에서 매일 50∼60여 회에 이르는 시위가 일어났다. 종교인과 학생들이 만세시위의 도화선 역할을 했다. 학생들은 시위를 주도했으며 등교를 거부하는 동맹휴학을 전개했다. 상인들은 상점문을 닫는 철시투쟁을 벌였고, 노동자들은 동맹파업으로 동참했다. 농촌 시위는 주로 사람이 많이 모이는 장날에 장터를 중심으로 일어났다. 번화한 거리에서 독립선언식이 거행됐고 만세시위가 이어졌다. 옛날부터 농민항쟁에 자주 등장한 횃불시위, 봉화시위도 일어났다. 이처럼 3·1운동은 도시나 농촌을 가리지 않았다. 유림과 식민통치에 협조하던 관리는 물론 청소년들까지 누구든 시위를 조직하고 참여하는 자발성이야말로 3·1운동이 전국에서 매일같이 일어나게 된 힘이었다.

애국가가 대중적으로 확산한 것도 3·1운동 때부터다. 당시 만세시위 현장에는 태극기와 애국가가 등장했다. 태극기는 주로 만세시위를 준비하는 학생들이 제작했다. 학생 이외에도 여성, 노동자, 기생, 농민, 청년 등 다양한 계층이 태극기를 만들었다. 시위현장에서만 태극기를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면사무소에 일장기 대신 태극기를 걸기도 했고, 집에 태극기를 내거는 마을이 등장했다. 만세시위에는 새로운 운동가도 등장했다. 대한제국이 망한 이후 숨죽이며 부르던 애국가도 만세시위에서는 당당하게 제창됐다. 3·1운동을 거치면서 애국가는 전국으로 확산됐다.

일본 경찰에 의해 체포·압송되는 3·1만세운동 주도 학생들. 독립기념관 제공

◇지역별 만세운동의 특징

서울은 3·1운동을 잉태한 곳이었다. 천도교와 기독교는 서울만이 아니라 지방의 종교 지도자들을 아울러 민족대표를 꾸렸고 각지에서 서울로 유학 온 학생들은 독립시위를 준비했다. 3월 1일 서울의 만세시위는 이른 새벽에 학생들이 시내에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며 시작됐다. 시내에는 전국에서 고종 황제 장례식을 보기 위해 모여든 사람으로 가득 차 있었다. 정오 무렵부터 학교 교문을 나온 학생들이 탑골공원으로 행진하면서 독립선언서를 배포했다. 오후 2시 민족대표들은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식을 했다. 탑골공원에서는 4000여 명의 시위대가 민족대표를 기다리던 중에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시위대는 독립선언서 낭독이 끝나자 독립 만세를 부르며 탑골공원을 나와 행진을 시작했다. 서울 시내에서 일어난 시위는 저녁이 되자 교외로 확산됐다. 경기도 지역은 서울과 직접 연결된 지리적 특성과 한말 애국계몽운동, 의병운동의 맥을 이어 전국에서도 가장 치열하게 시위운동을 전개했다.

강원 양양군은 전국적으로도 손꼽히는 대중적인 만세운동이 벌어진 지역으로 연인원 1만5000명 넘게 참여했다. 만세운동 과정에서 13명의 사망자와 함께 50여 명이 부상했다. 시위대는 4월 6일 제지하는 군대를 밀고 읍내 경찰서로 몰려갔다. 경찰서장이 “일본은 물러갈 테니 만세만 부르고 돌아가 달라”고 애원해 결국 군중은 만세시위만 펴고 저녁때 돌아가기도 했다.

충청도 3·1운동은 다양한 형태로 전개됐다. 대표적 형태는 횃불 만세운동이다. 3월 7일 부여 홍산, 3월 15일 진천, 3월 20일 음성 맹동 주민들은 불을 놓고 독립 만세를 외치는 운동을 전개했다. 이후 3월 23일 청주 강내의 대성리에서 조동식이 마을 주민 11명과 마을 뒷산에서 횃불 만세운동을 전개했다. 충청도에서 3·1운동이 가장 많이 전개된 곳은 마을 뒷산이다. 80여 개 면의 100여 마을에서 220회 이상 열렸는데, 이는 그만큼 횃불 만세운동을 활발히 전개했기 때문이다.

호남지방의 3·1운동은 독립운동에 대한 열망과 함께 천도교·기독교 등 종교계가 큰 역할을 했다. 기독교계의 각 기관은 독립운동에 우호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서울 기독교계와 긴밀한 연대로 3·1운동 확산에 밑거름이 됐다. 불교계 역시 장수군의 백용성이 민족대표로 참여하는 등 만세운동 일원으로 활동했다. 호남지방 국내외 유학생을 비롯해 각 지방의 뜻있는 인사와 학생의 활동은 호남지방 3·1운동 확산에 중심적 역할을 했다.

경상남도 역시 최초 봉기의 계기를 만든 것은 학생층과 기독교계 인사들이었다. 도시에서 전개된 만세시위는 3월 중·하순으로 접어들면서 군내의 면·농촌으로 확대돼 전국에서도 가장 강력한 위력을 발휘했다. 이러한 만세시위 계기를 만든 것은 학생·기독교·지도층 유생들이었으나 그 저항의 주체는 농민·어민·상인, 노동자들이었다. 특히 경남에서는 농어민·노동자들의 저항이 강했다. 경상북도에서 처음으로 만세운동이 전개된 곳은 대구였다. 대구에서는 3월 8일 고등보통학교 학생·천도교도 등 약 800명이 연합해서 시위운동을 전개했고, 9일에는 각급 학교 학생 약 4500명이 몰려나와 만세를 불렀다. 경북의 총 시위 지역은 60여 개소에, 연인원은 6만 명에 가까웠다.

이북은 가장 강력하게 만세운동이 벌어진 곳이다. 3월 1일부터 14일까지 초기 2주간 전국에서 일어난 276회의 만세시위 중 70%를 웃도는 197회가 북부지방에서 일어났다. 이는 3·1운동에서 종교계가 중요한 역할을 한 것과 관련 있다. 당시 북부지방에서 기독교는 세계적으로도 그 유례를 찾기 힘든 급속한 발전을 보이며 전체 기독교세의 절반 이상을 차지했다. 33인 민족대표 중 천도교 지도자는 15인, 기독교 지도자는 16인이 가담했다. 이 중 평북 정주의 이승훈, 김병조, 이명룡 등 14명이 북부지방 출신이었다. 일본은 국경을 접하고 있는 이 지역에 상대적으로 더 많은 헌병과 군대를 배치했는데 이는 더 강렬한 저항을 유발하는 계기가 됐다. 북부지방 3·1운동의 선도성과 격렬함은 이런 배경에서 나온 것이었다.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 따르면, 3·1만세운동에는 전체 인구의 10%나 되는 200만여 명이 참여했다. 그중 7500여 명이 살해당했고 1만6000여 명이 다쳤다. 49개의 교회와 학교, 715호의 민가가 불에 탔다. 일본 경찰의 검거자 수는 무려 4만6000여 명에 달했다.

춘천 = 이성현 기자 sunny@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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