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은 ‘다른 삶’의 체험… 재밌게 쓰는게 제일 어려워”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김언수 작가는 자기 삶의 문제를 풀기 위해 소설을 쓴다고 했다. 그는 “‘설계자들’은 아름다운 사람들을 죽이는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나갈 것인가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 ‘뜨거운 피’는 선의가 결국 악의로 변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풀기 위해 글을 썼다”고 말했다. 오른쪽 작은 사진은 ‘설계자들’의 영국판과 독일판. 김낙중 기자 sanjoong@

- ‘설계자들’로 美 출판사와 억대 계약 김언수

신춘문예 2관왕으로 데뷔 불구
한동안 원고 청탁 없어 절망도

암살자 이야기 담은 ‘설계자들’
佛 르몽드 ‘1급 스릴러’ 평가

차기작품은 어선 소재 ‘빅아이’
6개월간 참치잡이배 타고 구상

“제 소설이 서구 스릴러랑 좀 다르대요. 사건이나 액션만 있는 게 아니라 등장 인물들의 심리 묘사가 깊고 흥미롭다는 거죠. 이건 참 아이러니인데 이런 좋은 평가를 받는 건 국내 순수문학의 영향 때문인 것 같아요. 순수문학에서 가벼이 여기는 대중적 소설을 쓰면서 홀대도 받았는데 오히려 저도 모르게 몸에 배어 있던 순수문학적 인물 묘사가 스릴러와 겹쳐지면서 긍정적인 효과를 낸 것 같아요.”

최근 성공적으로 미국 출판 시장에 진출해 화제가 된 김언수(47) 작가를 지난 20일 만났다. 김 작가는 2010년 발표한 장편 ‘설계자들’이 지난해 미국 메이저 출판사인 펭귄 랜덤 하우스의 자회사 더블데이에 억대의 계약금에 판매되면서 해외에서 더 이름이 높아졌다.

김 작가는 2002년 진주신문, 200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중편이 연거푸 당선되면서 등단했다. 2006년엔 ‘캐비닛’으로 문학동네 소설상을 받았다. ‘설계자들’은 국내에 2만 부 이상 판매됐고, 2016년 발표한 ‘뜨거운 피’도 좋은 반응을 얻었다. 하지만 그 전까지 그는 문단의 변두리를 맴돌았다. 신춘문예 2관왕으로 데뷔했으나 한동안 원고 청탁이 없어 절망해야 했고, 소설가로서 자신을 연마하기 위해 전국을 떠돌며 창작에 매진했으나 보이지 않는 벽에 번번이 고배를 마셔야 했다.

원고지와의 길고 외로운 싸움을 끝나게 해준 ‘설계자들’은 전문 킬러들의 배후에서 암살에 관한 모든 것을 계획하는 설계자들의 이야기다. 설계자의 지시에 따라 표적을 암살하는 일만 해오던 킬러 ‘래생’이 자신이 믿고 따르던 최고 암살자의 죽음으로 변하게 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암살자와 표적, 설계자 사이의 얽히고설킨 관계를 속도감 있게 보여주면서도 등장 인물들의 내면까지 섬세하게 묘사해 호평받았다. 뉴욕타임스는 지난달 말 ‘설계자들’을 ‘베스트 윈터 스릴러(Best Winter Thrillers)’ 6권 중 하나로 선정했다.

그리고 독일과 영국에도 책이 번역돼 나왔다. 영국 가디언은 “새로운 스칸디나비아 누아르”라고 칭찬했고, 프랑스 르몽드는 “1급 스릴러”로 평가했다.

“대중성과 흥미, 상업성에 기대는 소설에 대해 경시하는 풍조가 매우 아쉽습니다. 사실 소설을 재미있게 쓰는 게 제일 어려운 일이에요. 이야기에는 여러 가지 목적이 있을 겁니다. 그 중 하나는 2∼3시간 동안 다른 사람의 삶을 살아보는 것, 그렇다면 그 다른 삶이 기왕이면 재미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미국 드라마 ‘보드워크 엠파이어(Boardwalk Empire)’ ‘왕좌의 게임(Game Of Thrones)’ ‘하우스 오브 카드(House of Cards)’를 보세요. 재미있는 건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철학적이에요. 인간의 본질까지 꿰뚫어 표현하고 있는 거죠. 작가 자신만 만족하는 소설은 사양합니다. 소설가는 독자를 섬겨야 합니다.”

‘뜨거운 피’도 ‘설계자들’ 못지않게 술술 읽히는 작품이다. 596쪽이라는 엄청난 분량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한 번 잡으면 끝까지 보게 된다. 그만큼 진행 속도가 빠르고 긴장감이 넘친다. 부산 조폭들의 세계가 구수하면서도 눈물겹다.

“‘설계자들’이 현실과는 조금 떨어진 특별한 사람들의 세계였다면 ‘뜨거운 피’는 조금 더 현실로 내려온 이야기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두 작품에 공통으로 등장하는 ‘선생-제자’의 구도에서는 닮아있다고 할 수 있죠. 그런데 소설을 쓰면 쓸수록 진짜는 가장 현실적인 삶이 아닐까 생각해요. 헤밍웨이의 작품이 그렇죠. 좋은 이야기는 가장 일상적인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김 작가의 생각이 여기까지 미친 데에는 8년 전 받은 큰 수술이 하나의 계기가 됐다. 그는 2011년 여러 가지 스트레스로 큰 병을 얻었다. 어느 날부터 손가락에 마비가 온 것이다. 원인은 목뼈 속 중추신경에 생긴 염증 탓이었다. 목뼈를 제거하는 어려운 수술을 받았다.

“그런데 참 이상하죠. 수술 후 옴짝달싹 못 하고 누워있는데 행복한 거예요. 도대체 이 말도 안 되는 행복감은 어디서 오는가 하는 생각을 하다가 인터넷을 뒤져서 알게 된 태극권 선생님을 찾아갔어요. 그 이후 지금까지 태극권을 배우고 있습니다. 요즘은 오히려 태극권 선생님에게서 소설을 배워요. 무술의 원리가 소설의 재미를 만들어내는 원리와 비슷하거든요. 긴장과 재미를 잃지 않으려면 지루함의 가치를 알아야 하듯이….”

김 작가는 벌써 차기작도 준비하고 있다. 참치잡이 원양어선을 소재로 한 장편 ‘빅아이’다. ‘빅아이’는 참치의 고급종인 눈다랑어를 말한다. 원양어선 참치잡이로 달러를 벌어들이던 시절을 배경으로 막막한 삶을 살았던 인물들을 그릴 계획이다. 그는 이 소설을 온전히 쓰기 위해 2017년 12월부터 2018년 6월까지 6개월여간 직접 원양어선을 탔다.

“남들은 제가 취재를 많이 하는 소설가라고 하지만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이번에 원양어선을 탄 것은 그렇지 않으면 그들의 세계를 도무지 알 수 없기 때문이었어요.” 취재 열정을 겸손해하지만 바로 이 점이 김 작가를 다른 작가와 구별 짓는 이유 같다.

“지난 30대에는 소설 쓰다가 울기도 많이 울었고, 좌절도 많이 했습니다. 백수처럼 전국을 떠돌기도 했고요. 그러나 스승인 조해일 선생님이 그러시더군요. ‘어떻게든 살아진다. 그러니 마흔까지 버텨봐라’고. 무척 무책임한 말씀이었지만 이제는 그 뜻을 알 것도 같아요. 제가 소설가가 되면서 한 결심이 있어요. 굶어 죽더라도 심사, 잡글, 강연은 안 하기로. 저는 프로페셔널 소설가라면 소설로 밥을 먹고 살아야 한다고 아직도 믿고 있습니다, 하하.”

김인구 기자 clark@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