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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명작의 공간 게재 일자 : 2019년 03월 15일(金)
불쑥 내 우산 속 뛰어들어온 그녀…운명적 사랑 빛내준 ‘마법같은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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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번지점프를 하다’의 한 장면. 극중 태희가 인우의 우산 속으로 들어온 장면으로, 첫사랑의 설렘을 표현하고 있다.
▲  ‘번지점프…’ 속 인우와 태희가 함께 걸었던 돌담길. 정형화되지 않고 자연스럽게 축조된 서울 정동 이화여고 돌담길은 예스럽고 낭만적인 정취로 연인들을 매혹해 왔다.

- (150) 영화 ‘번지점프를 하다’의 배경 덕수궁 돌담길

불교의 윤회·인연 모티브로
멜로영화 붐의 정점 된 작품
사랑의 설렘 표현한 첫 장면
돌담길 배경이라 감흥 커져

독특한 자태의 ‘신아기념관’
1930년대 지어져 숱한 굴곡

데이트하던 대학로 학림다방
민주화운동·예술인의 사랑방
아직도 ‘아날로그 감성’ 가득


서울을 방문하는 외국 관광객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장소는 고궁 일대다. 600년 서울 역사를 상징함과 동시에 한국문화 특유의 맛과 멋을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덕수궁 돌담길은 서울에서 가장 예쁘고 산책하기 좋은 곳으로 손꼽히는 장소다. 돌담길을 따라 걷다 보면 정동교회, 미국공사관, 이화여고 등 근대문화유산을 볼 수 있다. 도심 속에서 근대사의 자취를 느끼는 재미가 쏠쏠하다. 그러나 아름다운 겉모습과는 달리 구한말의 아픈 역사가 묻어 있는 곳이다. 올해 100주년이 된 3·1운동의 도화선이자 기폭제가 된 것은 1919년 1월 덕수궁에서 고종이 일본인에 의해 피살된 탓이다. 종로에서 시작한 3·1운동은 정동길을 지나 덕수궁 대한문까지 이어졌다.

▲  ‘번지점프 …’ 오프닝 신이 신아기념관 주변에서 촬영됐다.
덕수궁길은 이러한 역사적 사건의 장소이기도 하지만 영화나 드라마에서도 자주 등장하는 곳이다. 2001년에 제작된 영화 ‘번지점프를 하다’ 또한 덕수궁길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주연을 맡았던 이은주와 이병헌은 극중 운명적인 만남을 덕수궁 돌담길에서 가졌다. 비록 이은주는 아깝게도 스물다섯 나이에 스스로 생을 마감했지만 다양한 장르에서 두각을 나타냈던 배우였다.

영화 ‘번지점프를 하다’는 운명적인 사랑에 빠진 한 남자가 시간이 흘러 환생의 인연이 돼 지나간 연인을 다시 만나는 과정을 그린다. 세상을 떠난 첫사랑의 여인이 17년 뒤 남학생 제자로 다시 태어난다는 설정은 불교 세계관인 ‘윤회(輪回)와 인연(因緣)’을 모티브로 한 것이다. 멜로와 판타지를 결합한 퓨전 장르영화로,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이어진 한국영화 멜로 붐의 정점을 찍은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1983년, 국문학과 82학번 인우(이병헌)는 비 오는 날 우연히 태희(이은주)와 마주친다. 잠깐 우산만 쓴 사이지만 인우는 태희를 잊지 못하고 긴 기다림 끝에 다시 만난다. 이후 두 사람은 풋풋한 연애를 하며 사랑을 키워간다. 인우의 입대를 앞두고 용산역에서 만나기로 약속하지만 교통사고를 당한 태희는 나타나지 않는다.

▲  영화의 배경이 된 서울 대학로의 학림다방.
시간이 지나 2000년. 국어교사가 된 인우는 자신이 담임을 맡고 있는 현빈(여현수)을 보고 죽은 태희가 돌아왔다고 믿는다. 동성애라는 오해와 비난 속에서 마침내 현빈은 자신의 전생을 깨닫게 된다. 그들은 뉴질랜드로 떠나 그곳에서 다음 생에 만날 것을 약속하며 번지점프 하는 곳에서 뛰어내린다.

이 영화의 첫 장면은 사랑의 설렘을 잘 표현한 인상 깊은 신(scene)으로 꼽힌다.

“죄송하지만, 저기 버스정류장까지만 씌워 주시겠어요?” 인우의 우산 속으로 태희가 불쑥 뛰어 들어온다. 예기치 못했던 순간, 갑작스럽게 찾아온 운명 같은 사랑. 그들의 첫 만남은 정동길에서 시작됐다. 돌담길을 한참 걷는 동안 긴장한 남자는 여자에게 우산을 씌워주느라 자신의 어깨가 젖는 것도 모른다. 첫눈에 반하는 사랑이란 없는 줄 알았는데 인우는 태희를 보는 순간 마법에 걸리듯 사랑에 빠졌다. 그 뒤로 인우는 태희를 만나기 위해 매일 돌담길 정류장에서 하염없이 기다린다.

그들의 만남이 순수하고 아름답게 느껴졌던 이유는 공간이 주는 이미지가 더해져서 그렇다. 영화 촬영지는 이화여고의 돌담길로, 정형화되지 않고 소박하고 정겨워 정동길에서도 으뜸으로 꼽는 돌담길이다.

정동길은 당시 덕수궁길이었다. 1984년 덕수궁길이 처음 공식 가로명으로 제정될 때 덕수궁 입구에서 서울시립미술관을 경유, 이화여고를 거쳐 신문로1가 122번지(새문안로)에 이르는 길이었다. 2005년 9월 구간 조정을 통해 현재의 덕수궁길은 대한문에서 국립현대미술관과 구세군 중앙회관을 거쳐 새문안로까지를 의미하고 정동길은 정동제일교회 사거리부터 경향아트힐까지를 일컫는다. 덕수궁길은 덕수궁 남쪽 담장을 따라 났기 때문이며 정동길은 정동의 한가운데를 지나는 데서 각각 이름이 붙여졌다. 정동은 조선 태조의 왕비 신덕왕후(神德王后)의 정릉(貞陵)이 있던 데서 정릉동이라 하다가 정동이 된 동명 유래가 있다. 그러나 시민들은 이러한 공식적인 구분과는 관계없이 덕수궁길과 정동길을 아울러 ‘덕수궁 돌담길’과 ‘정동길’로 부르고 있다.

덕수궁길은 아름답고 걷기 좋아 지금은 연인들의 데이트 장소로 각광받고 있지만 한때는 연인이 덕수궁 돌담길을 걸으면 헤어진다는 속설도 있었다. 지금의 서울시립미술관 자리가 옛 서울가정법원이 있던 자리였기 때문일 수도 있다. 영화에서 사랑하는 주인공들이 결국 사랑의 결실을 맺지 못했던 이유도 속설과 같이 돌담길을 걸었기 때문일까. 사랑했지만 용산역에서 만나기로 한 그때 안타깝게 태희가 사고를 당하는 바람에 두 사람은 사랑을 지켜내지 못한다.

현대와 과거가 한 공간에서 조화를 이루며 공존하는 정동길. 찬찬히 둘러보니 독특하고 고풍스러운 신아기념관이 눈에 들어온다. 영화 오프닝에서 비가 내리는 정동길에 자전거 한 대가 지나간다. 인우가 자전거를 피해 몸을 비트는 순간, 태희가 인우의 우산 속에 들어온다. 이 장면이 신아기념관과 주변에서 촬영됐다. 문화재 제402호로 미국 싱거미싱회사가 사옥으로 쓰기 위해 1930년대 건축했다. 철근 콘크리트 구조, 지하 1층에서 지상 1층으로 올라가는 독특한 계단, 고풍스러운 미국식 발코니,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수입한 붉은 벽돌까지. 당시 정동의 이미지를 고려하면 민간 건물로서 앞선 기술이 적용된 곳이다. 일제강점기 미국과 일본과의 관계가 악화하면서 싱거미싱회사는 추방됐으나 건물은 8·15 광복 이후 다시 사용하다 1969년 신아일보사에 매각됐다. 1980년 5공화국의 언론통폐합 조치로 신아일보사는 경향신문사에 통폐합되고 지금은 신아기념관으로 사용 중이다.

영화의 또 다른 촬영지는 대학로의 학림다방이다. 영화는 1983년대와 2000년대를 배경으로 1부에서는 1980년대 대학생활을 즐기며 인우와 태희의 풋풋한 연애가 그려지고 2부에서는 국어교사가 된 인우가 담임으로 있는 제자 현빈을 보고 태희의 흔적을 찾는 과정을 그린다. 1980년대와 2000년대라는 시간의 격차, 멜로드라마라는 장르에 맞게 영화에서 공간은 시대를 상징하고 당시 문화와 정서에 맞게 감성적으로 배치된다.

인우와 태희가 데이트하던 ‘학림다방’은 1980년대 대학생들에게는 잘 알려진 곳이다. 군사정권 시절 민주화 운동세력은 학림다방에서 주로 모임을 했다. 당시 신군부는 민주화 운동에 참여한 학생들을 검거하면서 ‘학림사건’이라고 불렀다. 학림다방은 민주화 운동의 아지트인 동시에 예술인들의 사랑방이었다. 소설가 이청준, 시인 김지하, 천상병 등이 자주 찾았고 대학로에서 연극을 했던 배우 송강호, 황정민, 가수 김광석도 이곳을 자주 들렀다. 현재 학림다방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다방으로 2014년에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 건물 전체가 영구보존 구역이 됐다. 1975년 관악구로 이전하기 전에 서울대는 동숭동에 있었는데 학림다방은 그 건너편에 자리를 잡았다. 1956년부터 영업을 시작한 학림다방은 서울대 문리대에서 열었던 ‘학림제’라는 축제에서 유래된 것이다.

학림다방 하면 빼놓을 수 없는 매력이 클래식함이다. 입구부터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현관문과 허름한 나무 바닥, 낡은 테이블과 예스러운 의자, 책장 가득히 꽂혀 있는 LP판 등 아날로그적 감성을 느낄 수 있다. 최근에는 김수현이 출연한 2013년 SBS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 이후 독특한 분위기의 다방을 구경하기 위해 외국 관광객도 많이 찾는다고 한다. 영화에서 인우는 ‘When I falling in Love’를 신청하고 DJ는 사연과 함께 신청곡을 틀어준다. LP 특유의 떨리는 음색과 배경음악이 인상적인 이 장면에서 태희는 자신의 모습을 새긴 지포(Zippo) 라이터를 인우에게 선물한다.

영화 배경음악 중 러시아 음악가 쇼스타코비치의 재즈모음곡 제2번도 인상 깊다. 인우는 태희를 쫓아 조소과 MT를 따라가는데 그곳에서 태희는 수줍게 인우가 자신의 인연이었음을 첫눈에 알아보고 우산 속으로 뛰어갔다고 말한다. 그리고 교양시간에 배운 왈츠를 음악에 맞춰 춘다. 소나무 숲 사이로 붉은 석양이 물들고 남녀 주인공이 왈츠를 출 때 흘러나오는 경쾌한 듯 그러면서 우수에 찬 멜로디는 영화 전체의 분위기와 닮아 있어서 명장면과 명곡으로 기억되고 있다. 영화를 통해 알려진 충남 태안 갈음리 해수욕장은 이후 MBC 드라마 ‘다모’의 촬영지로도 유명해졌다.

영화 속 1부와 2부의 이야기는 유기적인데 1980년대 인우와 태희의 경험과 추억은 2000년대 인우와 현빈을 잇는 인연의 끈이 되기 때문이다. 인연이란 무엇인가. 영화에서 인우가 이야기한 것처럼 이 지구상 어느 한 곳에 조그만 바늘 하나를 꽂아놓고 하늘에서 밀씨가 나풀나풀 떨어져서 그 바늘 위에 꽂힐 확률, 그 계산할 수도 없는 확률로 만나게 되는 것이다. 인우와 태희 그리고 현빈과의 만남을 통해 영화는 사랑하는 사람이면 만날 수밖에 없는 인연을 가졌다고 말한다. 인우는 태희가 과거에 물었던 ‘숟가락과 젓가락’의 차이를 현빈 또한 질문함으로써 애써 묻어두었던 태희의 기억을 되짚게 된다. 하필이면 현빈은 길거리에서 구입한 지포 라이터를 갖고 있고 쇼스타코비치의 왈츠곡을 핸드폰 벨소리로 하고 있으며 물건을 쥘 때 새끼손가락을 편다. 긴장될 때, 태희 앞에서처럼 현빈 앞에서 딸꾹질이 나온다. 남학생 제자와 스승의 사랑으로는 발전할 수 있었지만 영화에서 그들은 다음 생에 만날 것을 기약하며 죽음을 택한다. 동성애적 이야기보다 환생과 인연, 사람과 사람 간의 사랑으로 풀어감으로써 논란에서 비켜 갔다.

불교에서 세계관은 윤회다. 죽음은 단순한 끝이 아니라 또 하나의 시작을 의미한다. 김대승 감독의 말처럼 영화 ‘번지점프를 하다’는 이별한 사람에게는 더 큰 슬픔을, 인연을 찾아 헤매는 사람에게는 과거의 인연을, 이별하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인연의 소중함을 느끼게 한다. 윤회와 전생의 모습을 심플하고도 정확하게 묘사한 영화는 제작된 지 18년이 지났음에도 지금까지 우리에게 울림을 준다.

글·사진 = 양경미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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