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행 규제에 발목잡힌 은행들>불편 키우는 ‘설명의무·가입절차’…‘면피용 보호조치’ 줄여야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실효성이 떨어지면서 금융 소비자의 불편을 가중시키는 과도한 소비자보호 규제에 대한 지적이 나오는 가운데 서울의 한 은행 창구에서 고객들이 직원과 상담을 하고 있다. 뉴시스

- (下) 과도한 ‘금융소비자 보호’ 논란

ELS 가입 위한 서류만 수십장
40분 설명에 2일 숙려기간까지

입·출금통장 하나 만드는데도
거래신청서 등 각종 서류 필요

고객 이탈 막기위해 ‘편법’도
민원포털엔 간소화 요구 봇물

“소비자를 보호하려는 취지로 만든 절차인데 오히려 현장에서는 소비자의 항의를 받는 일이 많습니다.”

문재인 정부가 금융소비자 보호를 위해 내놓은 조치들이 오히려 은행 등 금융권은 물론, 소비자의 불편을 키우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금융당국과 은행 등 민간 금융권이 소비자 보호라는 선의로 포장해 과다하게 설명의무나 가입절차 등을 요구하면서 새로운 규제가 되고 있다는 비판까지 제기되고 있다. 원칙을 지킨 은행에는 소비자들이 불편을 이유로 거꾸로 절차의 간소화를 요구하고 있으며, 이에 따라 일부 은행은 어쩔 수 없이 편법을 쓸 수밖에 없다는 불만을 토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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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LS 가입 설명에만 40여 분=지난주에 찾은 서울 강남구 소재의 국내 한 대형은행 창구. 해당 창구 직원에게 기자의 신분을 밝히고 주가연계증권(ELS) 상품에 가입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당황한 직원은 수십 장의 서류를 들고 오더니, 투자 성향을 파악하는 체크 설문지부터 내밀었다. 이 설문 결과 기자의 투자 성향은 ‘위험중립형’ ‘ELS 투자 부적격’ 판정이 나온 것이다. 그럼에도 상품 가입 의사를 밝히자, 은행 측은 대화 내용을 녹음하기 시작했다. 이어 구두는 물론, 서류를 통해서 투자 위험을 장시간 설명하는 경고가 이어졌다. 이때 직원이 “투자 부적격 상품은 권유할 수 없다”면서 건넨 상품 설명 자료(투자자 책임)만 수십 장. 하지만 기자는 즉석에서 투자자 책임 자료를 훑고 서명까지 하며 가입 의사를 밝혔고, 잠시 고민한 은행 직원은 “당장은 가입할 수 없다. 이틀간의 숙려기간이 필요하다”면서 결국 즉석 가입을 거부했다. 이렇게 허비한 시간은 40여 분. 이 은행의 홍보 관계자는 “금융 당국이 정해준 절차를 다 지킨 사례”라며 “이런 절차대로 하면 고객들이 화를 내며 자리를 박차기 일쑤이기 때문에 원칙대로 할 수가 없다”고 토로했다.

◇은행과 금융 당국에 쏟아지는 민원=금융권에 따르면 최근 고객들은 거래 목적상 혹은 상품별 작성 서류가 너무 많고 작성을 위해 직원 설명이 너무 길다는 내용의 민원은 자주 제기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예를 들어 주택금융공사의 주택담보대출을 신청해서 받을 시 주택금융공사 양식의 개인신용정보활용 동의서와 은행의 개인신용정보활용 동의서를 별도로 받아야 하는 것과 관련, 모든 내용을 담은 한 장의 서류를 만들어 달라는 민원 등이 대표적이다. 다른 은행 관계자는 “불완전 판매에 대한 민원 및 암행 조사는 은행 창구 직원의 최대 곤란사항 중의 하나”라고 강조했다.

현재 입출금 통장 하나를 개설하는 데도 거래 신청서 외 개인정보 수집 이용 동의, 특정 금융거래 정보 확인, 금융거래 목적 확인, 해외 납세 의무 확인 등의 서류를 작성하고, 금융거래 목적 증빙서류를 제출해야 한다. 소득이 없는 전업주부나 학생은 통장 개설도 어려워 불편 호소가 따르고 있다. 사업자 통장을 개설하려는 사업자가 타 은행에서 통장을 개설한 지 한 달이 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20일 넘어 오라고 해 불만을 제기한 사례도 있다. 이 밖에도 정부가 운영하는 금융규제민원포털에는 금융 절차 및 서류의 ‘간소화’와 관련한 민원이 다수 올라와 있다.

◇“편법을 쓰지 않으면 고객을 잃는다”=상당수 은행 창구에선 규정에 어긋나 적발의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편법으로 절차를 간소화해 고객의 불만을 가라앉히는 일들이 수시로 벌어지는 것으로 알려졌다. 실제로 지난주 기자는 신분을 밝히지 않고 일반 고객으로 가장해 서울 서초구의 다른 대형 은행 창구에서 ELS 상품에 가입했다. 가입하는 데 걸린 시간은 단 15분. 해당 직원은 투자 위험과 손실 가능성을 묻는 질문에 “손실은 특정 조건에서 발생하는 것으로 현재 손실 가능성은 크지 않다”고 답했다. 한 금융사 영업점 직원은 “일반 고객에게 정해진 프로세스를 100% 지키면서 판매하기는 어렵다”면서 “지금의 금융소비자 권익 보호는 금융 당국이나 금융사들의 면피를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박세영 기자 go@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