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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살며 생각하며 게재 일자 : 2019년 04월 05일(金)
명화 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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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형찬 서울예술대 교수·교육학

고3 때 정학 맞을 각오로 본
영화‘별들의 고향’떠오른다

검정 커튼 들추고 들어가면
마치 전혀 다른 세상 온 기분

요즘은 첨단시설 자랑하지만
비가 내리던 은막이 그리워져


지하철 4호선을 타고 경기 시흥시 오이도 방향으로 가다 보면 안산 중앙역이 나온다. 그곳에서 큰길을 건너면 쇼핑센터가 즐비한 거리가 있다. 그 한가운데 건물 지하에 명화극장이 자리 잡고 있다. 난 그곳으로 그 옛날 추억의 영화를 보러 갔다. 극장 매표소에 가까이 다가가니 귀에 익은 노래가 흘러나왔다. 톰 존스가 부르는 ‘킵 온 러닝(Keep on running)’이었다. 마침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영화제’가 열리고 있었다. 팸플릿을 살펴보니 앤서니 퀸이 주연한 ‘노트르담의 꼽추’, 마리오 랜자가 출연한 ‘황태자의 첫사랑’, 율 브리너와 데버러 커가 주인공인 ‘왕과 나’, 클라크 게이블과 비비언 리가 열연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르네 클레망이 감독한 ‘금지된 장난’ 등 명작들이 가득했다.

명화극장은 사회적 기업이라 입장료도 무척 착한 편이었다. 극장의 나이테를 살펴보니 서울 서대문 네거리 화양극장에서 실버 세대를 위한 극장으로 개관했다가 경영난으로 문을 닫게 되자 안산으로 이전해 재개관한 것이다. 명화극장은 지난해에는 ‘아카데미 & 칸 수상작 특별상영전’을 개최했고, 4월에는 ‘바이블 영화제’가 열리고 있다. ‘십계’ ‘소돔과 고모라’ ‘삼손과 데릴라’ 등의 영화가 상영된다.

마침 그날은 1952년도에 개봉한 프랑스 영화 ‘금지된 장난’을 상영하고 있었다. 솔직히 ‘금지된 장난’은 영화음악만 즐겨들었지 정작 영화는 보질 못했다. 그래서 스토리가 매우 궁금했다. 출입문에는 영화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어린 소년과 소녀가 서로 마주 보고 있고, 손 글씨로 예쁘게 쓴 묘비 이름이 여러 장 놓여 있다. 뒤편으로는 오래된 성당이 있고, 하늘에선 독일 폭격기가 폭탄을 투하하고, 마을이 불에 타며 연기가 하늘로 치솟고 있다. 주인공 소녀 폴레트는 프랑스 파리에서 피란 나오다가 비행기 공습으로 부모를 잃고 죽은 강아지를 안고 헤맨다. 그러다가 어느 농촌 마을에 들어선다. 그곳에서 소년 미셸을 만난다. 미셸은 고아가 된 폴레트를 불쌍히 여겨 자기 집으로 데려와 강아지를 묻어주고 그 무덤 위에 십자가를 세운다. 폴레트는 십자가를 무척이나 좋아했다. 미셸은 폴레트가 좋아할 만한 십자가면 무엇이든 다 모았다. 형 무덤에 있는 십자가는 물론 성당 제대 위에 있는 십자가까지 훔쳤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생각난다. 경찰이 농가에 있던 폴레트를 데려가 적십자사 수녀에게 넘긴다. 이름표를 가슴에 단 폴레트는 기차역에서 수녀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누군가가 ‘미셸’이란 이름을 부르는 소리를 듣고는 헤어진 미셸이 생각나 울먹이다가 눈물을 흘린다. 그러고는 벌떡 일어나 ‘미셸’을 부르며 군중 속으로 사라진다. 이때 그 유명한 영화음악 ‘로망스’가 울려 퍼지며 ‘FIN’ 자막이 뜬다. 나르시소 예페스가 기타로 연주한 ‘로망스’는 우리에게 너무도 잘 알려진 명곡이다. 줄을 하나씩 뜯으며 내는 기타 소리는 가슴을 아련히 파고든다. 지금도 폴레트의 그 앳된 눈망울이 그려지고 그 가냘픈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폴레트의 프로필을 검색해 보니 ‘시네마 천국’에서 토토가 그렇게 사랑했던 여인 엘레나의 중년 역을 맡았었다. 추억의 영화가 주는 심리적 효과는 대단하다. 그 시절, 그 사람, 그 풍경, 그 이야기, 그 음악이 합쳐져서 마음을 깊이 힐링시킨다. ‘시네마 천국’에서 훌륭한 영화감독이 된 토토가 그 옛날 영화를 다시 보면서 눈물을 흘리며 웃던 그 모습이 우리에게도 그대로 재현되는 것이다.

어린 시절, 인천에는 극장이 무척이나 많았다. 자유공원 기슭에 있었던 시민관을 비롯해서 동방, 키네마, 애관, 인형, 오성, 문화, 도원, 미림, 자유, 세계, 장안극장 등 거의 동네마다 하나씩은 다 있었다. 그래서 청소년 시절에 영화란 영화는 다 본 것 같다. 동방과 키네마에서는 주로 외국 영화를 상영했다. ‘벤허, 십계, 닥터 지바고, 러브스토리,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드라큘라, 혹성탈출, 타임머신, 외팔이’가 생각난다. 한국영화는 주로 애관과 인형극장에서 상영했다. ‘두만강아 잘 있거라, 불가사리, 월하의 공동묘지, 미워도 다시 한번, 저 하늘에도 슬픔이, 지옥문, 장화홍련, 카인의 후예, 맨발의 청춘, 별들의 고향’이 떠오른다. 특히, ‘별들의 고향’은 고3 때 정학을 맞을 각오로 본 영화다. 그것도 교복을 입은 채로 보았다. 지금 생각하면 어쩌자고 그랬나 싶다. 지금도 영화를 혼자 보러 다니는 것은 그때 생긴 버릇이다. 영화를 보는 그 시간만큼은 가장 행복하다. 모든 것을 잊고 오직 영화에 몰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도 극장에 불이 꺼지고 스크린에 영화가 돌아가기 시작하면 가슴이 두근거린다. 오래된 두근거림이다. 극장표는 나를 전혀 다른 세상으로 데려가 주었다. 무거운 극장 출입문을 열고 들어가면 두꺼운 검정 커튼이 나왔다. 그것을 들추고 안으로 들어가면 은막에서 영화가 돌아갔다.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다른 세상에 온 기분이었다. 유다 벤허가 되어 전차를 몰고, 모세가 되어 지팡이를 들어 홍해를 가르고, 닥터 지바고가 되어 라라를 찾아 헤매고, 올리버가 되어 제니퍼와 눈싸움을 한다. 또한, 독립군이 되어 일본군에게 총을 쏘고, 가난한 윤복이가 되어 껌을 팔고, 불가사리가 되어 쇠붙이를 먹어치운다. 지금 영화관은 멀티플렉스 시설에 3D 영상과 음향, 대형스크린과 안락한 의자로 최첨단 시설을 자랑한다. 그래도 비가 내리던 은막이 그립고, 더빙 배우들의 멋진 목소리가 그립고, 두꺼운 검정 커튼이 그립고, 붉은 등의 임검석(臨檢席)이 그립고, 지독한 소독약 냄새가 그립다. 그리고 껌을 팔던 소녀가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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