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정치인 中企장관과 초현실 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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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승훈 부국장 겸 경제산업부장

박영선 장관 취임사 相生 강조
英 적기 조례 逆說 강조했지만
산업생태계 이분법 시각 여전

주52시간制 최저임금 해결하고
민간 M&A 활성화 지원이 시급
서울시장 디딤돌 삼을 땐 실패

문재인 정부의 2대 중소벤처기업부 수장, 박영선 장관이 지난 8일 취임 일성으로 “중소벤처기업부의 정책 철학은 상생과 공존”이라고 했다. 대기업과 중소벤처기업, 기업주와 근로자, 대형 유통사와 골목상권이 함께 성장하는 기반을 조성해야 한다고 했다. 4선의 의정 활동에서 ‘재벌 저격수’란 별명을 얻은 것과는 상당히 다른 흐름의 이야기다. 그는 19세기 말 영국에서 자동차가 말보다 느리게 다니도록 한 ‘적기 조례’가 산업 발전을 가로막았던 사실을 언급하면서, “21세기 대한민국에는 적기 조례가 없는지 살펴봐야 한다”고 했다. 타율적 산업 압박에 앞장섰던 정치인이 규제혁신을 내건 행정가로 변모하는 과정이라면, 반길 일이다.

하지만 정책 포부를 밝힌 취임사 곳곳엔 여전히 현실성이 낮고 대중의 환심만 겨냥한 듯한 정치인의 허언(虛言)이 보인다. 박 장관은 우선 “혁신적 스타트업이나 중견기업이 유니콘 기업으로 성장할 토대를 마련하겠다”고 했다. 거기에 “공정경제를 위해 기술탈취 문제, 수·위탁거래 불공정 행위는 반드시 개선하겠다”고 했다. 모두가 지당한 과제인데, 관점은 한끝도 달라지지 않았다. 그의 입법활동 목록 대부분은 대기업이 타깃이었다. 20대 국회에서만 자사주 처분 제한의 상법 개정안, 대기업 공익법인의 의결권을 겨눈 공정거래법 개정안, 집단소송법안, 세율을 높이는 법인세법 개정안 등을 발의했다. 상생과 공존이라면서, 대기업은 늘 중소기업의 몫을 빼앗는 약탈자로 치부했다. 순환의 시스템인 산업 생태계를 이분(二分)의 대립장으로 몰았다. 전체 이득의 상향보다 ‘이 몫이 누구 차지냐’를 놓고 다투게 하고, 그래야 대중의 마음을 얻을 수 있다는 전형적인 정치인의 관점이자 입법 논리다.

유감스럽게도 박 장관이 맞닥뜨린 산업생태계의 기반은 대중 정서가 아니라, 경쟁이다. 공정은 경쟁시장의 여러 필요요건 중 하나다. 시장의 순기능이 보장돼야 공정의 자리가 확고해진다는 의미다. 공정에 압도돼 질식하면 시장의 반란을 부를 뿐이다. 벤처기업이 중견기업, 대기업으로 커가는 과정도 그런 시장에서 결정된다. 문 대통령이 지난달 ‘제2 벤처 붐 전략’을 발표하면서 벤처기업의 스케일업(Scale-Up·고속성장)을 강조했는데, 그 핵심은 나랏돈 풀기가 아니라 민간의 인수·합병(M&A) 활성화다. 대기업 투자가 필수적인 이유다. 벤처기업은 M&A를 통해 도전과 재도전의 밑천을 얻고, 대기업은 성장의 새 경로를 얻는다. 그게 경쟁을 통해 규모를 키우고, 이득이 순환하는 산업생태계의 시스템이다.

박 장관은 또 독일 ‘인더스트리 4.0’을 거론하며 “스마트공장은 제조업 강국으로 가는 발판이 될 것”이라고 했다. 맞는 말이지만 우선순위가 바뀌었다. 중소기업인에게 이런 얘기를 꺼냈다가는, “기업들이 자발적으로 생산성을 향상할 수 있도록 분위기부터 만들어주는 게 급선무”란 반응일 게다. 그들에겐 당장 내년부터 300인 이하 기업에도 시행될 주 52시간 근로제, 갈수록 압박 강도가 커질 수밖에 없는 최저임금 맞추기가 발등의 불이다. 박 장관의 당면 소임은 그런 산업현장에 기업을 할 의욕을 불어넣는 것이다. 재탕, 삼탕 보고서의 ‘초현실적 단어’만 읊고 있으면, 전임 장관처럼 ‘청와대 눈치나 보다가 떠날 사람’ 취급을 당한다.

박 장관은 자신의 역할을 설명하면서, “문재인 정부 2기 내각은 1기가 뿌린 씨앗을 바탕으로 성과를 내야 한다”고 했다. 이 역시 정치인의 관점이다. 국가 행정은 연속성이 기본 원칙인데, 시간표에 쫓기며 가시적 성과에 매달리면 결국 실패한다. 박 장관은 이번 입각으로 내년 총선 불출마를 약속했다고 한다. 그가 거푸 실패했던 서울시장을 노린다는 얘기가 정설로 나돈다. 혹여, 장관직을 ‘디딤돌’쯤으로 여기는 기미가 포착되는 순간, 또 다른 실패의 시작점이 된다.

박 장관의 인사청문회 과정에서 심각한 문제들이 불거졌고, 현직 국회의원임에도 불구하고 인사청문 보고서조차 채택되지 못했다. 국회 협조를 얻는 데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두고 볼 일이다. 다만, 그걸 막는 길도 정치인의 허언을 버리는 것이다. 박 장관은 취임사 말미에 “일기일회(一期一會), 인생은 한 번 사는 것, 오늘과 똑같은 내일은 오지 않는다”고 했다. 그 말이 진정이라면, 이제 대중(표)을 버려야 한다. 장관이 ‘오늘’ 듣고 취해야 할 말은 산업 현장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