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성평등 위한 싸움이 ‘美’를 낳았다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수컷 윌슨극락조(위 사진의 아래)가 암컷에게 과시 행동을 하며 구애하는 모습. 수컷 기아나바위새(아래 왼쪽 사진). 협동하여 암컷(왼쪽)을 유혹하는 다섯 마리의 수컷 푸른마나킨 모습(아래 오른쪽 사진). 양성의 새들은 폭력이 아니라 ‘아름다움’을 통해서만 배우자를 얻을 수 있게 진화했다. 동아시아 제공

- 아름다움의 진화 / 리처드 프럼 지음, 양병찬 옮김 / 동아시아

벌새의 무지갯빛 깃털처럼
생존에 굳이 필요없는 형질
구애 위한 수컷 진화의 상징

진화론도 ‘性 선택’에 기초
성적 자율성 확보 움직임이
생물학적 아름다움 만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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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5∼16일 방영된 EBS의 ‘다큐프라임-수컷들’ 2부작은 중남미와 호주, 북유럽 등지의 13종의 조류를 촬영, 암컷에게 선택받기 위한 수컷들의 광기와 간절함을 담은 뛰어난 다큐멘터리다. 1부의 첫 화면은 “수컷에겐 다른 수컷을 이기는 능력보다 암컷을 유혹하는 능력이 때로는 더 중요하다”는, 찰스 다윈의 ‘인간의 유래와 성(性)선택’에서 인용한 문구로 시작되는데, 바로 이 다큐의 제작 의도다. 예컨대, 부리 밑에 몸길이보다 긴 육수(肉羞·고깃덩어리)를 달고 있는 에콰도르의 우산새는 그 육수로 인해 나무 사이를 나는 데도 지장이 있을 정도여서 인간의 기준으로 볼 때 생존에 결코 유리한 진화가 아니다. 육수는 단지 암컷을 꾀는 데 이용된다.

다큐 제작진이 이번 주 번역돼 나온 리처드 프럼의 ‘아름다움의 진화’(The Evolution of Beauty)를 참고했을지 모르겠다. 이 책 또한 찰스 다윈의 ‘성 선택’(Sexual Selection)을 주제로 다루고 있다. 40년 넘게 새를 관찰해왔다는 예일대 조류학과 교수인 프럼의 이 책은 2017년 뉴욕타임스가 선정한 올해의 책 10권 중 유일한 과학책이었다. 번역서는 ‘연애의 주도권을 둘러싼 성 갈등의 자연사’라는 섹시한 부제목을 달았는데, 원서의 부제는 ‘다윈의 잊힌 배우자 선택 이론은 어떻게 동물의 세계와 인간을 형성했을까’다. 여기서 ‘잊힌’이라는 수식어와, ‘성 선택’이 ‘배우자 선택’(Mate Choice)이라는 다른 단어로 쓰인 데서 저자의 방향을 읽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우리가 다윈의 진화론 하면 바로 떠올리는 것은 ‘자연선택’(natural selection)에 의한 ‘적응적 진화’다. 다윈은 우리에게도 익숙한 약 15종의 ‘갈라파고스핀치’라는 새를 적응적 진화의 사례로 들었다. 하나의 공통 조상에서 생겨났지만, 크고 작은 다양한 부리 형태를 갖게 진화한 것은 크거나 작거나 단단하거나 무른 특정한 식물 씨앗의 분포라는 환경에 적응한 결과였다.

진화론이 나오자 무수한 공격을 받게 된 다윈이 설명하기 어려운 지점이 있었으니, 예컨대 새의 장식물, 앞서 말한 에콰도르 우산새의 육수나 개똥지빠귀의 노래, 벌새의 무지개 깃털과 같은 생존에 굳이 필요해 보이지 않거나 오히려 장애가 될 수 있는 ‘실용성 없는 아름다움’이었다. 이는 번식을 위한 ‘성적 장식물’로 이른바 ‘성 선택’의 결과임을 다윈은 ‘종의 기원’을 펴낸 지 12년 뒤인 1871년 ‘인류의 유래와 성 선택’에서 밝혀냈다.

다윈은 ‘자연선택에 의한 적응적 진화’에 대비해 이를 ‘성 선택에 의한 미적 진화’(aesthetic evolution)라고 불렀다. 성적 장식물은 ‘미적 형질’이며 그 진화는 동물들의 주관적 평가에 바탕을 둔다. 새의 부리에서 보듯이 적응적 진화는 형태를 변이할 수 있는 양상에 한계가 있지만, 짝을 찾기 위한 미적 진화는 ‘제 눈에 안경’이라는 말처럼 각기 독립적인 미의 기준 탓에 레퍼토리가 무궁무진했다. 그 결과 지구상에는 셀 수 없을 만큼 다양한 생물학적 아름다움이 존재하게 됐다.

‘환경에 잘 적응한 놈만 살아남는다’는 자연선택은 인간 세상에도 흔히 적용돼왔다. 강한 놈만 살아남는다는 식으로 때로 사회진화론으로 나타나는가 하면, 양성(兩性)의 차이를 ‘차별’이 아닌 자연 발생적이고 생물학적인 ‘차이’로 인정하라는 가부장적 목소리로 변신하기도 했다. 진화론자들조차도 아름다움을 선호하는 동물들의 ‘성 선택’을 적자생존이라는 ‘자연선택’의 부수적인 곁가지에 불과한 것으로 여겨왔다. 책의 부제에 ‘잊힌’이 붙은 이유다. 저자가 책에서 “단언컨대, 우리는 진짜 다윈을 모른다”고 강조하는 이유도 진화론에서 ‘자연선택’만 강조되고 ‘성 선택’은 묻히다시피 했기 때문이다.

저자는 미적 진화론을 성 선택의 설명에만 이용하지 않고 더 확장해 성적 자기결정권, 성 소수자, 가부장제도의 문제, 특히 기존의 정치적·이데올로기적 페미니즘을 과학적 페미니즘으로 격상시키는 데 사용하고 있다. 어떤 종의 수컷 오리는 평균적인 암컷의 몸길이를 훌쩍 뛰어넘는 길이의 페니스를 가진 반면 암컷의 생식기는 구불구불하게 돼 있다. 이것은 강제 교미를 자행하려는 수컷과 이를 막아내려고 했던 암컷의 진화 결과다. 구애 행동을 위해 수컷이 무대를 만드는 바우어새의 경우 ‘비상탈출구’가 마련되지 않은 무대에는 암컷이 얼씬도 하지 않는다. 이 역시 ‘데이트 폭력’을 피하고 심미적 배우자를 선택하기 위한 진화의 결과다. 인간만이 아니라 모든 동물의 성적 자기결정권과 자율성을 확보하기 위한 전쟁은 오랜 세월 ‘진화’라는 형태로 그들의 신체에 새겨져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이에 따라 데이트 폭력을 할 수 없게 된 바우어새 수컷은 암컷을 맞이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무대를 꾸미고, 수컷들끼리 군무를 준비한다. 암컷은 좀 더 다양하고 복잡한 형태의 아름다움에 대한 미적 선호를 자유롭게 추구할 수 있게 됐다. 성적 강제와 물리적인 억압이 성행하던 시절에는 ‘아름다움’이란 아무런 의미가 없었지만, 동물이 성적 자율성을 확보하는 방향으로 진화하면서 비로소 ‘아름다움’에 의미가 생겨났다는 놀라운 주장을 저자는 펼친다. 저자가 부제에서 다소 수컷의 폭력성이 느껴지는 ‘성 선택’이란 용어 대신 양성의 자율성이 담긴 ‘배우자 선택’을 사용한 것도 이런 이유로 해석된다.

저자는 자연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아름다움은 자연선택과 적자생존이라는 유물론적 진화론의 개념만 가지고는 결코 설명해낼 수 없다고 말한다. 자연은 그 안에 쓸모없는, 퇴폐적인 아름다움도 있기 때문에 더욱 찬란하게 빛난다. 이것이 다윈이 ‘종의 기원’에서 “장엄한 생명관”이라고 스스로 감격하여 마무리한 자연의 모습이며, 현대에서 더욱 빛나야만 하는 ‘미학적 생명관’인 것이다. 596쪽, 2만5000원.

엄주엽 선임기자 ejyeob@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