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리아드’부터 ‘해리 포터’까지…인류가 만든 글, 글이 만든 인류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유럽에서 12세기에 만들어진 대형 책인 폴리오 사본을 제작하는 모습. 까치 제공

- 글이 만든 세계 / 마틴 푸크너 지음, 최파일 옮김 / 까치

인간의 지혜 깨우쳐온 텍스트
역사의 물줄기 바꾼 책들까지
동서고금 걸쳐 일목요연 정리
오늘의 세계 있게한 큰 밑거름

가끔 이런 생각을 한다. 만약 ‘글로 된 모든 것’이 없었다면? 개인적으로는 직업인 듯 직업 아닌 출판평론가 일은 분명 하지 않았을 것이고, 크게 보면 오늘 우리 세계는 지금의 모습은 분명 아닐 것이다. 식상한 말이겠지만 글로 된 모든 것, 즉 책을 포함한 모든 텍스트는 오늘 우리를 있게 한 가장 큰 밑거름이라고 할 수 있다. 디지털 시대의 도래와 함께 책을 포함한 텍스트가 홀대 아닌 홀대를 받지만, 우리는 분명 그 토대 위에서 오늘에 이르렀다.

하버드대 비교문학 교수인 마틴 푸크너의 ‘글이 만든 세계’는 글로 된 모든 것 중 ‘세계를 만든 위대한 텍스트’들의 향연을 펼치는 책이다. ‘성서’ ‘논어’ ‘금강경’ 등 저 먼 시대 텍스트부터 인류의 지혜를 깨우쳐 왔던 책은 물론, 루터의 ‘95개조 반박문’과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처럼 비교적 근래 인류 역사의 물줄기를 바꾼 책들까지, 말 그대로 고색창연하다. 고색창연하지만, 뜬구름 잡는 이야기는 없다.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와 ‘오디세이’부터 J K 롤링의 ‘해리 포터 시리즈’까지 ‘여러 문화들 전체의 소스 코드(source code)가 된 텍스트’의 가치를, 그만큼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제국을 건설한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호메로스의 ‘일리아드’를 전장에까지 가지고 갔다. 저자에 따르면 ‘일리아드’는 ‘장차 세계를 정복하게 될 한 왕자의 마음을 사로잡은 근본 텍스트’였다. 그는 호메로스의 ‘일리아드’를 ‘그리스 문화의 가장 중요한 이야기’이자 ‘그가 도달하고자 하는 이상’으로 여겼다. 알렉산드로스의 아시아로의 대원정은 결국 호메로스의 대서사시에서 시작된 셈이다. 알렉산드로스는 곳곳에 새로운 도시를 건설했고, 곳곳에 흔히 ‘알렉산드로스의 알파벳’을 호메로스의 작품들을 통해 전파했다. ‘문자의 기원과 인류 역사 최초의 위대한 근본 텍스트’는 그렇게 우리에게까지 전달되고 있다.

성인으로 불리는 부처와 공자, 소크라테스, 예수의 가르침은 때론 경전(經典)의 모양으로, 혹은 고전(古典)의 이름으로 오늘에 이르렀다. 부처의 가르침은 역설과 선문답, 어쩌면 범인(凡人)들은 쉽게 알 수 없는 이야기로 가득한데도 어떻게 사람들의 눈과 귀를 사로잡았을까. 저자는 ‘그 가르침들의 보편적인 매력’ 때문이라고 강조한다. 부처는 왕자였음에도 ‘가장 낮은 자가 되어’ 가난한 사람들에게 말을 걸고 설법을 베풀며 ‘완전히 다른 무엇인가를 약속하는 사람’이었다. ‘특권 계급의 메시지가 아니라 그들 각자에게 말하는 메시지’의 힘은 지금까지 유효한 이유가 되었다.

예수의 가르침도 마찬가지다. 예수는 당대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쉬운 비유로, 그 자신이 ‘바로 경전, 그 살아 있는 현현’임을 증명했다. 이 같은 종교적 가르침은 훗날 다양한 말로 번역되었고, 종이와 인쇄술의 발전을 따라 수많은 사람에게 지침과 규범이 되었다. 이들 종교가 인류 역사에 미친 영향은 더 말하면 잔소리일 뿐이다.

16세기 초 루터는 ‘95개조 반박문’으로 종교개혁의 아이콘이 되었는데, 그 공의 절반은 사실상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에 돌아가야 한다. 15세기 중반 구텐베르크가 이전과는 다른 인쇄술을 발전시켰고, 다양한 ‘성서’를 (비록 사업 목적이 강했지만) 인쇄했다. 심지어 1454년에는 종교개혁을 촉발한 ‘면죄부’를 대량 인쇄했는데, ‘면죄부 제작을 위임받기 위해서’ 교황청에 로비를 벌여 성공하기도 했다. 역사의 아이러니는 여기서 드러난다. 막대한 부를 형성하기 위해 면죄부를 만든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은, 다시 종교개혁의 세계적 확장에 기여했다. 1517년 루터는 ‘인쇄된 면죄부를 터무니없는 방식으로 팔아대고 있는 교회’에 저항해 ‘95개조 반박문’을 발표한다. 루터는 ‘인쇄기가 제도적 권력은 없지만 대중의 정서를 등에 업은 자신과 같은 작가들에게 어떤 무기가 될 수 있는지를 서서히 깨닫게’ 되었고, 이내 ‘95개조 반박문’과 면죄부를 비판하는 각종 설교문 등을 인쇄해 세상으로 퍼날랐다. 개신교의 위상은, 긍정이든 부정이든, 오늘 우리 시대의 한 현상이다.

개인적으로 ‘글이 만든 세계’에서 가장 흥미로운 대목은 ‘해리 포터 시리즈’를 짧게 언급한 마지막 장이다. 판타지 소설, 혹은 다양한 게임 등으로 변용된 텍스트 정도로 이해할 수 있지만 ‘해리 포터 시리즈’는 21세기의 지형을 가장 많이 바꾼 텍스트 중 하나임에 틀림없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시리즈가 완결되었음에도 인터넷을 기반으로 새로운 정보를 취합하고 독자와 상호작용하면서, 다시 새로운 작품 혹은 다양한 문화 콘텐츠로 여전히 만들어져 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 외에도 ‘돈키호테’ ‘천일야화’ ‘겐지 이야기’ 등의 고전과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벤저민 프랭클린 등의 작품을 읽는 기쁨도 쏠쏠하다. 텍스트 그 자체는 역사가 될 수 없다. 그럼에도 영향력 있는 하나의 텍스트는 종종 당대는 물론, 오랜 인류 역사에 자취와 영향을 남기기도 한다. ‘글이 만든 세계’는 그 즐거움을 찾아가는 안내서라고 할 수 있다.

장동석 출판평론가·‘뉴필로소퍼’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