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와 시각>‘패스트트랙’에 밀린 ‘정치의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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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남석 정치부 차장

정치부 기자로 일하며 이런 국회를 또 볼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지난 2012년 5월 2일 국회법 개정 이후 이른바 국회선진화법 체제가 자리 잡았다고 여겼다. 2016년 12월 9일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안이 국회 본회의에서 질서 있게 처리되는 모습에 우리 의회정치도 한 단계 성숙했다고 평가했다. 이제 제왕적 대통령제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의원내각제로의 권력구조 개편을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정말로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섣부른 방심이었다.

지난달 22일 더불어민주당과 바른미래당·민주평화당·정의당 등 여야 4당이 선거제도 개편안 등의 패스트트랙(신속처리안건) 지정에 합의한 뒤 1주일 간 국회의사당 풍경은 과거로부터 한 발짝도 전진하지 못했음을 확인시켜 줬다. 사라진 줄 알았던 집단 몸싸움이, 망치와 쇠지렛대 등 둔기가 다시 등장했다. 헌법과 공직선거법은 여야 합의 없이는 개정할 수 없다는, 국회선진화법 이전에도 지켜지던 선(線)마저 위태로워졌다. 국회 사법개혁특별위원회에서는 의원총회 결정에 따르지 않는다고, 당사자가 극구 반대하는데도 강제 위원 교체가 이뤄졌다. 이렇다 보니 정당 지도부와 국회의원이 국회 운영을 방해할 목적으로 당직자나 보좌진을 동원할 경우 7년 이하의 징역 또는 2000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는 내용의 국회법 개정안(박주현 의원안)이 발의됐다는 소식이 황당하게 들리지도 않는다.

무엇보다도 이번 패스트트랙 충돌은 국회의, 정치의 존재 이유를 묻게 한다는 점에서 심각하다. 한국당과 바른미래당 일부 의원이 헌법재판소에 사개특위 위원 사·보임의 적법성을 가려 달라고 요청했는가 하면 여야는 대대적인 맞고발전에 나섰다. 피고발 인원이 이미 신기록을 경신했을 뿐 아니라 100명을 넘길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야말로 여의도(국회)의 문제를 서초동(법원)과 안국동(헌재)으로 떠넘기는 ‘정치의 사법화’다. 다른 한편에선 한국당이 상시적인 장외투쟁을 선언했다. 전국 순회 집회를 여는 데 그치지 않고 청와대 앞이나 서울 광화문 일대에 천막 당사를 차리는 것도 검토한단다.

패스트트랙 충돌이 종료됐음에도 민주당은 ‘법대로 정치’를, 한국당은 ‘길거리 정치’를 이어가겠다는 뜻을 접지 않고 있다. 민주당 지도부는 “국회선진화법을 무력화한 한국당에 무관용 원칙을 적용하겠다”고 했다. 한국당 지도부는 “전국 곳곳의 국민 속으로 들어가 독재 타도를 외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법대로 정치’에는 합법과 불법만이, ‘길거리 정치’에는 ‘우리와 그들’만이 존재한다. 둘 다 이분법이 지배하는 공간이다. 가능성의 예술이라는 정치와는 애초부터 어울리지 않는다. ‘정치의 공간’을 법과 길거리에 내주는 것은 국회 스스로 존재 이유를 부정하는 일이다. 2019년 국회 예산은 총 6409억400만 원. 의원 1인당 21억3635만 원꼴이다. 여기에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예산(3435억7150만 원)을 더하면 올 한 해 정치 분야 예산만 1조 원에 육박한다. 국회가 존재 이유를 상실했다면 왜 이처럼 엄청난 혈세를 투입해야 하는가. 패스트트랙을 강행한 측과 저지한 측 모두가 답해야 한다.

greentea@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