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드라마 ‘눈이 부시게’에서 어르신들의 수다방이었던 ‘행복미용실’은 실제로 인천 용현동에 자리잡고 있다. ‘올린머리, 파마 전문’이라고 쓰인 빛바랜 간판이 세월의 더께를 느끼게 하는 동시에 운치가 넘친다.
드라마 ‘눈이 부시게’ 촬영지 인천 용현동
산자락에 지은 오래된 마을에
세월의 더께 쌓인 집 다닥다닥
골목·낙서… 향수 불러일으켜
드라마 주인공 집 ‘행복미용실’
그 시절 아줌마들에겐 수다방
팍팍한 삶의 숨통 틔워준 공간
아픔마저 아름다운 추억 되듯
지금 힘겨운 삶도 훌쩍 지나가
기억 속엔 행복한 것만 남으리
어릴 적 살던 동네에 가본 적이 있는가. 그런 곳에서는 왠지 낡아진 공간이 주는 쓸쓸하지만 기분 좋은 외로움이 느껴진다. 친구와 함께 뛰놀던 골목길이며 낙서를 했던 담벼락의 반가움. 여전히 커서 넉넉한 그늘을 만들어주지만, 훌쩍 커버린 몸 때문에 어쩐지 작아져 버린 느티나무가 주는 친근함. 물론 그런 달동네에서 살았던 삶이 어찌 풍족했고, 늘 행복하기만 했을까 싶지만, 그런 일들조차 아련하고 달콤한 향수로 만들어주는 시간과 기억의 합작들이 그런 곳에선 느껴진다. 마치 그 기억은 첫사랑처럼 아름답게 왜곡된다. 당시에는 죽을 듯 아팠고 고통스러웠지만, 기억을 조작해내는 시간은 그것을 못내 아름답게 만들어낸다. 어릴 적 살던, 이제는 낡아버린 동네가 주는 노스탤지어의 정체.
JTBC ‘눈이 부시게’는 마치 그런 옛 동네의 노스탤지어가 주는 낯설지만 익숙하고, 아프지만 행복하며, 쓸쓸하지만 따뜻한 기억 같은 드라마다. 시간을 되돌릴 수 있지만 그걸 사용하면 금세 늙어버리는 대가를 치러야 하는 시계를 가진 스물다섯의 혜자(한지민)가 아버지의 사고를 되돌리기 위해 시계를 계속 돌리다 칠순의 할머니(김혜자)가 돼버리는 동화 같은 이야기로 채색돼 있지만, 그것은 결국 알츠하이머를 앓는 한 할머니가 회고하는 기억의 조작이었다는 걸 보여주는 드라마.
이 할머니는 젊어서 사랑하는 남편을 잃었고(기자였지만 경찰에 끌려갔다 의문사했다), 사고로 다리 하나를 잃어 장애를 갖게 된 아들을 홀로 키웠다. 혼자서도 살아갈 수 있게 하기 위해 아들을 눈 내리는 날에도 매몰차게 세상 밖으로 내몰면서, 할머니는 아들을 위해 보이지 않는 곳에서 혹여나 미끄러질까 눈을 쓸어놓는 삶을 살아왔다. 그러니 그 삶이 무에 아름답고 ‘눈이 부실 수’ 있을까. 하지만 할머니의 조작된 기억 속에서 스물다섯의 혜자는 풋풋한 사랑에 가슴 설레고, 친구들과 옥상 평상 위에서 술을 마시며, 시계 때문에 할머니로 늙었어도 여전히 그걸 이해해주는 친구들과 노래방에서 즐겁게 춤추며 노래한다. 젊어서 잃은 남편을 조작된 기억으로 되살려 내 다시 사랑하려 하고, 다리를 잃고 평생 장애를 가진 채 살아가는 아들과 그 아내는 아버지와 어머니로 되살려 내 그 나이에도 여전히 보살펴야 할 존재로 세워둔다. 그것은 알츠하이머를 앓는 할머니의 거짓 기억이지만 그 거짓 속에서 할머니는 나름 행복하다. 일생의 고통과 회한, 후회도 그 기억 속에서는 아름답게 채색된다. 마치 노스탤지어처럼.
인천 용현동에 실제로 있는 ‘눈이 부시게’의 혜자네 집 ‘행복미용실’은 노스탤지어를 자극한다. 빛바랜 핑크색 간판에 옛 느낌이 그대로 살아 있는 서체로 쓰인 ‘행복미용실’이라는 글자가 그렇고, 색색의 차양이 만들어내는 그늘과 옥상으로 오를 수 있는 철제 계단이 정겹다. 그 계단 위로 오르면 스물다섯의 혜자가 친구 현주(김가은), 상은(송상은)과 함께 평상을 뒹굴며 술 한잔으로 하루의 피로를 풀어내던 곳이 금방이라도 우릴 반길 것만 같다. ‘올린머리, 파마 전문’이라 적힌 그곳은 ‘눈이 부시게’에서 어르신들의 수다방이었다. 운신이 불편한 어르신들은 삼삼오오 그곳에 모여들어 동네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수다 거리 삼으며 시간을 보냈다. 물론 그곳은 혜자의 엄마(실제로는 며느리)가 일하는 일터이기도 했다. 바빠서 장갑을 끼지 않고 염색약을 만지는 통에 손바닥이 다 갈라져 버린 엄마가 애써 아무렇지도 않다며 웃던 곳. 그 모습이 못내 안쓰러워 일을 도와줄라치면 그러지 말라며 등 떠밀던 엄마의 마음이 느껴지던 곳.
그 미용실은 낡았고 지금은 문을 닫은 것처럼 보이지만, 그 낡은 미용실은 우리에게 저마다 존재할 법한 오래전 미용실들을 떠올리게 하기에 충분하다. 동네마다 몇 개씩 있었던 미용실. 그곳에는 항상 아주머니들이 머리를 한다는 핑계(?)로 모여 앉아 이야기꽃을 피우곤 했다. 그곳은 밥벌이를 위한 삶의 터전이지만, 팍팍한 삶을 하루하루 살아가는 이들이 모여 숨통을 틔우는 공간이기도 했다. 행복미용실이라 이름 붙인 주인은 아마도 자신만이 아니라 그곳을 찾는 이들이 행복해지기를 바랐을 것이었다. 팍팍한 현실과 가난 속에서 마구 방치되던 머리를 잠시 올려보기도 하고 볶아보기도 하면서 삶의 새로운 활기를 찾아보곤 하던 그런 공간.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용현감리교회에서 경사로를 따라 오르다보면 동네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원경(왼쪽 사진)을 감상할 수 있고, 경사로에서 가지 치듯 뻗어나간 골목길 곳곳에는 꽃나무 그림이 그려진 담벼락(가운데)이 자리잡고 있다. 수봉공원 입구에 설치된 인천지구 전적비(오른쪽)에 기록된 6·25 참전용사의 명비를 보며 잠시 묵념의 시간을 갖는 것도 좋다.
그리 높지 않지만 도시 한가운데에서 산과 숲의 쾌적함을 제공하는 수봉산의 남쪽 자락에 위치한 용현동 행복미용실이 있는 동네는 지하철로 직접 닿지 않는 곳이다. 그래서 가까운 제물포역에서 내려 마을버스를 타고 들어가거나 혹은 자가용을 이용하는 편이 좋다. 마치 예전 도시의 달동네처럼 경사진 도로에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동네지만, 의외로 길이 넓어서 차로 올라가도 그리 큰 불편함이 없다. 최근 들어 이곳이 드라마, 영화 촬영지로 각광받고 있는 건 아마도 이런 접근성이 좋아서가 아닐까 싶다. 차로도 들어갈 수 있어 장비를 옮기는 데 용이하면서도, 또 구석구석 골목길들이 남아 있어 옛 달동네의 정취를 카메라에 그대로 담을 수 있어서다.
하지만 역시 동네를 제대로 느끼기 위해서 걷는 것만큼 좋은 건 없다. 인주대로를 따라가다 용현감리교회 쪽으로 우회전해 들어가는 경사로에 잠시 차를 세워두고, 슬슬 골목길들을 따라 걷는 편이 용현동의 정취를 제대로 느낄 수 있는 방법이다. 산자락에 지어진 동네라 마치 계단처럼 층층이 구분돼 있는 길들과 그 길들 사이사이에 지어진 집들을 내려다보고 또는 올려다보며 걷는 길. 어느 길을 따라 걸어도 위쪽으로 향해 조금씩 오르기만 하면 행복미용실이 있는 곳에 다다르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 그래도 그곳을 찾아가는 길을 권해보라면 용현감리교회에서 경사로를 따라 오르다 보면 우측으로 꺾어지는 수봉남로18번길을 권한다. 벚꽃이 만발한 한 가정집을 보며 들어선 그 길은 고지대에 있지만 차가 세 대는 지나다닐 수 있을 정도로 넓어 한적한 평일 낮 시간대에 찾아가면 편안한 시야를 만끽할 수 있다. 잠시 카페에 앉아 더위를 식힐 겸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을 마셔도 좋을 동네다.
이 널찍한 수봉남로18번길은, 걸으며 간간이 위로 또는 밑으로 난 골목길들을 들여다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그 조금은 낡은 길과 세월의 더께가 쌓인 가정집들은 우리의 기억 한 구석에 놓인 옛 동네의 노스탤지어를 자극한다. 담벼락 옆으로 아마도 집주인들이 심어 놓았을 꽃과 채소들이 그 아기자기한 삶을 엿보게 만든다. 경사진 동네라 길에서 저편 도시를 향해 고개를 돌리면 밑으로 집들의 빨갛고 파란 지붕들이 들어오는 것도 편안한 느낌을 준다. 늘 고층 아파트와 빌딩 사이에서 살다 보니 집의 지붕을 내려다본 기억이 새삼스레 새롭게 느껴진다. 집이란 본래 그렇게 정겹고 따뜻한 느낌을 주던 곳이 아니었던가. 낡은 담벼락에 누군가 그려놓은 색색의 잎을 가진 나무 그림, 아이들 그림들이 반갑다. 그림들은 마치 시간이 침식시킨 기억의 한 자락처럼 아련하다. 수봉남로18번길에서 수봉남로24번길로 가기 위해 경사진 골목길을 오르다 문득 뒤돌아보면 저 밑으로 아득한 도시의 원경이 펼쳐진다. 드라마 속에서 칠순의 혜자가 양손 가득 물건들을 들고 오르막길을 오르던 장면이 떠오른다. 숨이 턱에 차오르는 그 길을 아마도 많은 동네 어르신들이 오르내렸을 테지.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정덕현 문화평론가·칼럼니스트
저명한 음악평론가인 사이먼 레이놀즈는 ‘레트로 마니아’라는 책에서 ‘노스탤지어’는 본래 ‘시간이 아니라 공간을 통해 돌아가고 싶은 마음’을 의미한다고 했다. 즉 모국을 떠나온 이들이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바로 노스탤지어였다는 것. 하지만 그는 노스탤지어가 공간에서 시간의 의미로 바뀌면서 ‘치유 불가능한 감정이 됐다’고 했다. 즉 고향 같은 공간이 주는 노스탤지어는 그곳으로 돌아가면 치유가 가능하지만, 과거 ‘평온했던 시절’은 돌아갈 수 없어 치유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용현동은 이 치유 불가능한 감정을 치유해주는 시공간의 중첩을 경험하게 한다. 그곳은 현전하고 있는 공간이지만 어딘지 오래된 시간을 여전히 품고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때론 고통스러웠고 아팠던 옛 시절이지만 시간의 흐름에 도움을 받아 행복했던 기억으로 만들어주는 노스탤지어의 마술 같은 저마다의 경험을 아마도 그곳을 찾는 이들은 잠시간 가질 수 있을 게다. 게다가 용현동이 그 자체로 보여주는 오랜 시간의 중첩은 당장의 현실이 힘겨운 우리에게 그 자체로 위로를 준다. 어디 힘겹지 않은 삶이 있으랴. 하지만 걱정할 것 없다. 그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힘겨운 삶은 어느새 훌쩍 지나갈 것이고, 기억 속에서는 아름답고 행복한 것들만 가득할 테니.
글·사진=정덕현
문화평론가·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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