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효정의 에로틱 시네마>우리가 사랑하고 우리가 버린 女子… 영자의 ‘슬픈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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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자의 전성시대

“영자? 우리가 만난 女子, 영자? 우리가 사랑한 女子, 영자? 우리가 버린 女子.”

아마도 가장 많은 수의 영자들이 살았을 1960∼1970년대는 박정희 정권이 이끄는 정부 주도의 산업화로 제조업이 육성되면서 노동력이 집중되는 많은 공장이 지어졌고 이는 시골에 있는 청년인력들까지도 도시로 유입되게 했다. 아마도 수없는 ‘영자’들이 공장촌에서, 혹은 유흥가에서 일하며 고향의 가족을 부양했을 것이다. 위의 문구는 김호선 감독의 1975년 작 ‘영자의 전성시대’(사진)의 포스터 카피다.

영화는 산업화 기간 서울로 상경해 여러 직업을 전전하다가 결국 집창촌으로 흘러드는 시골 처녀 영자(염복순)의, 혹은 1970년대 산업화에 동원됐던 수많은 젊은 여성의 고난 가득한 도시 상경기를 기록한다.

시골에서 갓 올라온 영자는 부잣집 식모살이로 서울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주인집 아저씨의 공장에서 일하는 창수(송재호)라는 남자는 영자만 보면 좋아 어쩔 줄을 모르는데 그게 싫지가 않다. 그럭저럭 시골집에 돈도 보내고 이제 좀 서울 생활에 적응해 보려는 그때, 영자에게 비극적인 사건이 일어난다. 주인집의 망나니 아들이 영자를 강간한 것이다. 적반하장으로 사모는 아들에게 꼬리를 쳤다며 영자를 내쫓아 버리고, 오갈 데 없는 그는 공장에서 여공으로 일하게 된다.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김효정 영화평론가

하루 종일 작업반장의 욕지거리를 들어가며 미싱을 돌리지만 한 달이 지나 영자의 손에 쥐어지는 것은 푼돈이다. 같이 사는 언니에게 빚을 갚고 남은 동전 몇 개를 보며 영자는 허탈한 웃음을 쏟아낸다. 그런 그에게도 영롱한 꿈이 있는데 그것은 버스차장이 되는 것이다. 버스도 몇 번 타보지도 못한 영자에게 ‘오라이’라고 악을 박박 쓰며 기사를 지휘하는 버스차장은 잔 다르크에 가까운 영웅이다.

영자는 공장을 그만두고 간신히 버스차장으로 일을 시작하게 돼 꿈 같은 나날을 보낸다. 그러나 머지않아 그는 교통사고로 인해 한쪽 팔을 잃는다. 이젠 부릴 몸뚱이도, 품고 살 희망도 없이 끝내는 집창촌의 작부로 전락하고 만다. 쪽방 한쪽을 지키고 있는 영자에겐 ‘비너스’라는 별명이 붙여진다. 팔이 없는 미인이라며 한 손님이 지어준 별명이다. 밤이 되면, 뭇 남성들이 영자의 생기 없는 몸을 파고든다.

이 영화는 1973년에 발표된 조선작의 소설을 바탕으로 만든 영화다. 영화산업 전반이 텔레비전의 부상과 영화 검열로 인해 질식해 갈 무렵 개봉 당시 단일 극장에서만 36만 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했다. 영자의 플래시 백으로 보이는 과거가 지나면 영화는 현재로 돌아와 그의 지리멸렬한 일상을 비춘다. 시뻘건 립스틱에 우스꽝스러운 가발을 쓴 영자는 쪽방촌 귀퉁이에서 취객을 유혹한다. 간신히 건져온 손님마저도 팔이 없는 영자를 보면 살을 대기는커녕 기겁하고 내빼기 마련이다. 이쯤 되면 관객은 궁금해진다. 도대체 영자의 전성시대는 언제인가. 아마도 그가 약간의 안위를 찾게 되는 시점은 베트남전쟁에 파병됐다가 돌아온 창수와 우연히 마주치면서부터일 것이다. 창수는 만신창이가 된 영자를 보며 아연실색하지만 이내 그의 동반자가 되기로 한다. 모은 돈을 다 털어 영자의 방을 찾아간 창수는 수많은 사내가 거쳐 간 영자의 몸에 손을 얹는다. 분노와 처연함이 마음을 옥죄지만 그는 영자의 옷을 벗겨 품에 안는다. 안고 또 안고…창수는 밤새도록 세상의 모서리마다 찔리고 짓이겨진 영자의 볼품 없는 몸을 어루만진다. 영자도 창수를 사랑하게 되지만 그에게 걸림돌이 되고 싶지 않아 떠난다. 몇 년 후에 창수가 영자를 찾았을 때 그는 장애를 가진 남자와 결혼해 아이도 낳고 평범한 주부가 돼 있었다.

결국 영자의 ‘전성시대’는 오지 않은 셈이다. 다만 창수와 보냈던 온기 가득한 몇 밤이 영자에겐 일평생 기억할 행복의 순간이다. 만나고 사랑했지만 버릴 수밖에 없었던 영자는 절망과 패악이 지배하던 한국 현대사의 한 귀퉁이를 지켰던 슬픈 초상(肖像)으로 남았다.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