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카페>“그런 큰 사랑은 누구도 줄 수 없으리”… 佛 천재 작가의 思母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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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프랑스 공쿠르상을 2번이나 받았던 천재 작가 로맹 가리에겐 가난과 멸시 속에서도 아들의 성공을 위해 헌신한 엄마 니나 카체프가 있었다. 연극배우였던 니나는 어린 아들과 함께 종종 영화를 보곤 했다.

■ 윤성은의 스크린 인물학 - ⑪ ‘새벽의 약속’속 작가 로맹 가리와 어머니

1960년 발표한 ‘새벽의 약속’
가리의 성장기 담긴 자전소설

佛이민한 러 출신 유대인 모친
차별·가난 속 홀로 아들 키워
주위 멸시에도 당당하게 맞서

어머니와의 약속 지켜나가며
맹목적인 희생·은혜에 보답
‘공쿠르상 수상’ 세계적 작가에
‘에밀 아자르’ 필명으로도 활동
死後에 동일인물 사실 밝혀져

바르비에作 영화, 소설에 충실
해골가면 쓴 사람들 거리 행진
가리 여러 모습 반영한 메타포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 오랜만에 떠올려보는 고사(故事)다. 교육에 관심이 많았던 맹자의 어머니가 주체여서일까. 인간에게 환경이 중요하다는 의미도 있지만 내게는 어머니의 정성이 자식의 미래를 바꿔놓을 수 있다는 의미로 더 각인돼 있다. 현대에도 입시에 어머니의 정보력이 본인의 노력만큼 중요하다고 하지 않는가. 그러고 보면 입시생이 줄고, ‘소확행’이 사회 전반의 가치로 자리 잡아가고 있음에도 일류대를 향한 한국의 교육열은 좀처럼 식지 않는 것 같다. 올 초에 큰 인기를 모았던 드라마, ‘스카이 캐슬’(JTBC)은 소위 대한민국 상위 0.1% 가정들을 배경으로 그 비상한 실태를 잘 반영하고 있다. 그 중심에 어머니들의 눈물겨운, 아니 살벌한 뒷바라지가 있는 것은 물론이다. 그런데 이 분야에서 맹자의 어머니도, 스카이 캐슬의 어머니들도 울고 갈 만큼 극성스러운 여인이 있었으니, 프랑스 총영사를 지냈고, 프랑스 최고 권위의 문학상인 공쿠르상을 (결과적으로) 두 번이나 받은 작가 ‘로맹 가리’의 어머니, 니나 카체프다.

로맹 가리는 1960년에 발표한 ‘새벽의 약속’에서 니나 카체프와 자신의 성장기에 대해 상세히 서술하고 있다. 자전소설이라는 장르의 태생이 그렇듯 이 책을 구성하는 진실과 허구의 비율을 정확히 재단할 수는 없다. 분명한 것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마흔네 살의 로맹 가리가 기억하고 있으며 계속 기억하기를 원하는 어머니에 대한 단상들, 그리고 독자들에게 전달하고 싶은 어머니의 모습이 뒤섞인 채 이 책에 담겨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비평가들은 물론 로맹 가리 자신도 ‘새벽의 약속’에 허구적인 부분이 많음은 인정하고 있다. ‘흰 개’(1970), ‘밤은 고요하리라’(1974)와 함께 이 책 또한 자서전이 아닌 로맹 가리의 자전소설로 분류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로맹 가리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어머니의 교육과 사랑이 자신의 삶에 미친 영향에 대해 토로하는데, 그 양가적 감정의 위태한 균형감이 이 작품을 읽어가는 재미라 할 수 있다.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던 해(1914)에 모스크바에서 태어난 로맹은 어머니와 함께 폴란드를 거쳐 프랑스로 이주한다. 연극배우였던 니나는 로맹이 태어나면서부터 돈이 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하며 혼자 로맹을 양육했고, 로맹은 그런 어머니에게 전적으로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니나 이외에 로맹과 함께했던 것은 유대인으로서의 차별, 가난한 자로서의 궁핍, 이민자로서의 고독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러시아 출신의 유대인으로서 이들의 정체성은 소설에 명시된 것보다 훨씬 혹독하게 이들을 옭아맸을 것으로 예상되며, 니나가 프랑스에 대한 맹목적인 애국심을 보이고, 프랑스를 최종 정착지로 상정한 것도 1890년대 드레퓌스 사건 이후 유대인의 입지가 좋아졌다는 판단에서일 것이다.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로맹 가리는 제2차 세계대전 중 공군으로 복무했다. 영화에서는 피에르 니네이가 연기했다.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아들을 파리로 유학 보내며 끝까지 배웅하는 엄마. 샤를로트 갱스부르가 맡았다.

불편한 환경과 시선 속에서도 니나는 로맹이 어렸을 때부터 아들 본인에게는 물론이요, 주변의 모든 사람에게 로맹이 프랑스 대사가 될 것이고,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을 것이고, 위대한 작가가 될 것이라고 큰소리친다. 특히, 폴란드 윌노에서 니나가 불친절한 입주자들을 모두 층계참으로 불러내 아들에 대해 선언했던 일은 로맹의 일생에 있어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으로 기억된다. “감히 너희가 누구와 이야기하고 있는 줄이나 아는 게야? 내 아들은 프랑스 대사가 될 사람이야!”라고 외치는 니나에게 사람들은 폭소하며 조롱과 멸시를 보낸다. 이 경험은 로맹의 정서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게 되는데, 놀랍게도 로맹은 이후 점차 조소에 전혀 개의치 않는 법을 배우게 됐다고 회상한다. 게다가 그는 실제로 미국 주재 프랑스 총영사가 됐고,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았으며, 세계적인 작가가 되지 않았는가. 어머니들의 세뇌와 확신이 실현되는 경우는 극히 드물기 때문에 니나는 이 분야에 재능이 있었다고밖에 볼 수 없다.

로맹이 작가가 되기로 결심한 데도 니나의 역할이 컸다. 없는 살림에도 니나는 로맹의 손에 바이올린을 들려줬고, 발레를 가르치면서 어느 분야에 재능을 발휘할 것인지 유심히 지켜봤다. 사실 로맹은 그림을 좋아했고, 곧잘 그리기도 했지만 그 꿈만은 화가에 편견을 갖고 있었던 어머니에 의해 좌초됐다. 만약 니나가, 고흐가 평생 가난에 시달리다가 서른일곱에 자살했다는 사실을 몰랐다면 로맹 가리는 화가로 이름을 떨쳤을지도 모른다. 남은 것은 글쓰기였다. 그렇게 로맹은 어머니가 좋아하는, 생전에 부와 명예를 얻었던 빅토르 위고의 뒤를 따르게 된다. 말하자면, ‘새벽의 약속’은 로맹이 어머니와의 약속을 하나씩 이행해가는 과정을 기록한 책이다. 그것은 니나 사후까지도 계속된다. 그만큼 이 소설은 기본적으로 사모곡의 성격이 강하다고 볼 수 있는데, 로맹은 마치 그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의심하는 사람이 있을까 두려운 듯 끊임없이 어머니에 대한 자신의 사랑이 얼마나 절절한지를 강조한다. 그것은 에릭 바르비에가 연출한 동명 영화의 회상 신 첫 부분에서 “그런 큰 사랑은 누구도 줄 수 없으리. 어머니라 해도”라고 표현한 것처럼, 니나의 거대한 모성과 직결된다. 로맹은 그 희생과 은혜에 보답하는 길은 곧 자신을 향한 어머니의 목표에 도달하는 것으로 여기고, 그 약속을 향해 살아왔던 것이다. 그러나 로맹은 소설 곳곳에서 어머니가 애인 없이 자신에게만 집중했던 것이나 과도한 사랑과 보호를 받은 것 등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기도 한다. “나는 무엇보다도 내 사랑은 어머니를 위해 못 할 것이 없지만, 단 하나, 사나이로서의 인생을 포기하는 것만은, 맘먹은 대로의 인생을 살 수 있는 권리를 포기하는 것만은 할 수 없다고 말하고 싶었다.”(새벽의 약속, 문학과 지성사, 203p) 이것이 니나의 사랑에 대한 그의 정확한 속내일 것이다.


에릭 바르비에는 영화 ‘새벽의 약속’을 원작의 영상 버전이라 할 만큼 소설에 충실하게 만들었다. 영화에는 책에 등장한 크고 작은 에피소드들, 아홉 살 때 첫사랑이었던 발랑틴의 환심을 사기 위해 구두 한 짝을 먹었던 일이나 파리에 유학 가기 전 어머니와 러시아 정교회 성당을 방문한 일 등까지도 생생하게 묘사돼 있다. 분량상 삭제, 축약된 부분을 제외한다면 영화에서는 ‘새벽의 약속’을 쓸 무렵 아내 레슬리 블랜치와 멕시코에서 있었던 일을 삽입해 액자식으로 구성한 것이 가장 눈에 띄는 차이점이다. 영화의 첫 장면에는 멕시코의 축제인 ‘망자의 날’ 풍경이 등장하는데, 화려한 색깔의 해골로 분장하거나 해골 가면을 쓴 이들이 거리를 가득 메운 채 행진하는 모습은 짧지만 매우 인상적이다. 이 이미지들은 로맹이 18년 전에 세상을 떠난 어머니를 추억하며 글을 쓰고 있다는 점, 이 글을 ‘유언장’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점 등과 맞물려 내연을 구축한다. 전쟁을 체험했던 로맹은 일련의 소설들에서 느껴지듯 늘 죽음을 가까이 두고 있었는지 모른다.


각양각색의 해골 가면은 작가로서 로맹 가리의 다양한 모습을 반영하는 메타포로 볼 수도 있다. 영화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로맹은 어릴 때부터 자신의 필명으로 쓸 이름을 찾는 데 공을 들인다. 그가 예순이 넘어서 ‘에밀 아자르’라는 또 다른 이름으로 작품을 발표한 것은 이러한 경험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사실, 비평가의 입장에서 로맹 가리는 진땀이 나게 만드는 이름이다. 이 엉큼한 실험이 그를 퇴물 취급하며 그에게 작가로서의 죽음을 선언했던 당대의 비평가들을 충격과 곤란에 빠뜨렸기 때문이다. 로맹 가리가 완전히 새로운 탄생을 갈망하게 만들었던 바로 그 비평가들은 에밀 아자르라는 이름으로 발표된 ‘자기 앞의 생’(1975)에 로맹 가리가 이미 ‘하늘의 뿌리’(1956)로 수상한 바 있는 공쿠르상(한 작가가 일생에 한 번만 받을 수 있는 상)을 또 한 번 수여함으로써 그들의 무지와 편견을 만천하에 드러냈다. 로맹 가리와 에밀 아자르가 동일인물이라는 사실은 그가 자살한 후 6개월 뒤 발표된 유서와도 같은 글을 통해 밝혀졌다. ‘에밀 아자르의 삶과 죽음’이라는 제목의 이 글은 소책자로 출간(1981)됐는데, 로맹 가리는 두 개의 필명으로 발표한 작품들 간의 여러 확실한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비평가들이 동일인의 저작임을 알아내지 못했음을 지적하면서 “내가 얼마나 통쾌했을지 상상해보시라. 나의 작가 인생 전체에서 가장 달콤한 즐거움이었다”고 속내를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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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독자의 입장에서 로맹 가리는 흥미롭고, 신비롭고, 안타까운 이름이다. 그의 작품들은 지적이면서도 유머러스하고 따뜻하다. 로맹 가리는 그와 어머니, 이웃의 ‘웃픈’ 경험담을 소설 속 인물들에 오롯이 새겨놓는다. 일례로, ‘자기 앞의 생’에서 로자 부인을 바라보는 모모의 시선은 니나를 바라보는 로맹의 시선과 많이 닮아 있다. 생명에 대한 맹목적인 애정은 역시 어머니에게 배운 미덕일 것이다. 그러나 ‘새벽의 약속’을 발표한 지 약 20년 후, 그는 스스로 생을 마감한다. 그의 재혼한 아내이자 저 유명한 누벨바그의 대표작 ‘네 멋대로 해라’(장 뤼크 고다르)의 히로인이었던 진 세버그의 자살 후 1년 3개월 만의 일이다. 어쩌면 어머니와의 약속을 이행하는 것을 목표로 살았던 그는 개인적으로 별로 행복하지 않았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가 성취한 타인의 욕망은 조건 없는 사랑에서 싹텄기에 이타적인 사랑으로 열매 맺을 수 있었다. 활자가 존재하는 한 로맹 가리의 작품들만큼은 전 세계 독자들에게 영감과 감동의 샘이 돼줄 것이다.

윤성은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