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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하재근의 TV세상 게재 일자 : 2019년 05월 14일(火)
뻔한 사극? 예측 비껴간 스토리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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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두꽃

요즘 누리꾼들이 ‘호환마마’보다 꺼리는 게 바로 스포일러다. 작품 내용을 미리 알리는 것에 과도할 정도로 민감해져서 ‘어벤져스 : 엔드게임’ 개봉 땐 의례적인 리뷰 기사에도 스포일러라는 비난이 쏟아졌다. 최근 방영되는 SBS ‘녹두꽃’은 이런 점에서 약점을 안고 있다. 동학농민혁명을 다룬 작품이어서 최후를 다 알기 때문이다.

그 최후가 참담한 패배의 역사라는 게 특히 심각한 문제다. 밝고 기분 좋은 역사라면 몇 번을 돌려보고 되새김해도 질리지 않는다. 2002년 월드컵 4강 신화 당시 그 후에도 상당 기간 대중매체에서 월드컵을 조명했고, 출판가에서도 관련 서적이 잇따라 출시됐다. 일본에서 근대 사극이 반복적으로 환영받는 것도 그때가 일본인에겐 승리의 시기이고, 그 이야기를 보면서 시청자들이 힘을 얻기 때문이다. 반면에 참담한 패배의 역사는 사람들에게 외면받게 된다.

이런 문제들이 있는데도 SBS는 동학농민혁명을 조명한 ‘녹두꽃’을 편성했다. 요즘처럼 방송사들이 사극을 꺼리는 분위기에서 과감한 결단이었다. 정현민 작가의 작품이라는 점이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정 작가는 KBS 대하사극 ‘정도전’으로 큰 반향을 일으킨 바 있다. 바로 그 ‘정도전’ 작가의 신작 사극이기 때문에 기대작 반열에 올랐다.

정 작가는 역사가 스포일러라는 문제를 ‘현미경 전법’으로 돌파했다. 동학농민혁명이 고부 군수의 폭정에 반발해 녹두장군 전봉준의 주도로 농민군이 봉기한 사건이라는 건 누구나 안다. 하지만 고부군 안에 누가 살고 있었는지, 이방은 누구였는지, 그 시대를 살아갔던 젊은이들이 어떤 고민을 했는지, 그 구체적인 사연들은 알지 못한다. ‘녹두꽃’은 마치 현미경을 들이대듯 사람들의 삶을 구체적으로 조명, 이미 알고 있던 역사의 큰 흐름과는 또 다른 다양한 이야기들을 창조해냈다.

의외로 주인공도 전봉준이 아니었다. 동학농민혁명을 소재로 하고 제목도 녹두장군을 떠올리게 하는 ‘녹두꽃’이기 때문에 당연히 전봉준 장군의 이야기일 거라고 예측했는데 알고 보니 고부군 이방의 두 아들 이야기였다. 이 가족은 시청자들이 모르기 때문에 작품이 신선하게 다가왔다.

참담하고 어두운 역사라는 문제는, 동학혁명 초기 민초의 열기를 역동적으로 그려 상쇄했다. 민초가 봉기해 들끓는 횃불이 되고, 흰옷을 입은 거대 군중이 되며(백산), 죽창의 산(죽산)을 이루는 광경을 장대하고 생생하게 표현한 것이다. 고립돼 있을 땐 한없이 약하던 민초가 마침내 궐기해 뜻을 나누고 거대한 하나의 물결이 되는 과정엔 사람을 격동시키는 힘이 있다. 비록 마지막엔 실패했을지라도 동학농민군의 횃불바다가 형성되는 과정만큼은, 촛불집회를 겪은 시청자들에게 승리의 기억을 떠올리게 하면서 감동을 줬다.

여기에, 오랜만에 보는 선 굵은 사극의 힘이 더해졌다. 그동안 사극도 화사한 화면으로 아기자기한 이야기를 많이 담았는데, ‘녹두꽃’이 모처럼 민초의 뜨거운 이야기를 대하사극 분위기로 표현해 시청자에게 묵직하게 다가왔다. 그리하여 서사적 감동을 주는 대형 사극이 탄생한 것이다. 초반의 힘을 후반까지 이어갈 수 있다면 올해의 명작으로 자리매김할 것으로 보인다.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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