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생각하며>격투·암투·혈투 중지 건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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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철수 만화가, 방송작가

싸움만 하고 고액임금 챙기는
대한민국 최상위 완장, 정치인

논리적 주장·반박보다 화염·분노
시청자 염증 내도 휴일도 TV 출연

‘닭 모가지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
옛 정치인도 싸웠지만 철학적 구호

TV 요리 프로를 볼 때마다, 웃고 떠드는 출연자들이 참 부럽다. 맛있는 음식 먹고 돈도 벌고…. 신선놀음 같은데 속사정은 다르다. 수많은 식재료, 빠듯한 제작 일수, 다른 방송과의 차별화…. 밑천이 꽤 드는 진땀 승부가 ‘먹방’이다.

진땀은커녕 싸움만 하고 고액 임금을 챙기는 이들이 있다. 말쑥한 정장의 중장년 전사들. 대한민국 최상위 완장. 정치인이다.

처리해야 할 법안이 산더미인데 나 몰라라 팽개치고, 자고 깨면 당리당략 이전투구다. 링 안에서 싸우고 링 바깥에서 싸우고, SNS·유튜브·라디오 방송국에 앉아 혼자서도 싸운다. 주장이나 논리적 반박보다 사람의 가슴을 후벼 파는 ‘화염과 분노’가 대부분이다. 정치 선후배도 없고 넘지 말아야 할 선도 없다. 정치 난맥상을 자인하면서도 ‘민생 난맥상’은 전혀 모른다. 무슨 청문회라도 있는 날, TV 속의 정치인이 별안간 탁자를 치며 소리를 질러대면, 라면 먹던 아이가 화들짝 놀라고 애완견이 TV를 향해 미친 듯 짖어댄다. 안방 할머니는 ‘누가 또 지랄 같은 뉴스 틀었냐’고 고함을 친다. 단란 파괴, 민생 난맥상이다. 도대체 왜 그렇게 싸울까? ‘나는 선, 너는 악’ ‘나는 애국자, 너는 바보’ 단지 그것이 반목과 쟁투의 이유다. 교실에서 싸우는 초등학생과 별로 다르지 않다. 아이들 싸움은 선생님이 오면 바로 끝나지만, 완장들의 혈투는 정해진 시간도 없고, 심판도 없다. ‘말리는 시누이’도 없다. 이들이 꼬박꼬박 타가는 돈을 세비라고 하면 안 된다. 파이트머니다.

원래 싸움보다 배우로 대성할 사람들이었다. 선거철 장바닥에 엎드려 ‘일 잘하는 머슴이 되겠다’고 큰절 올리는 명연기가 외신에서까지 호평받았기 때문이다. 덕분에 무소불위 상전이 됐고 백성들이 거꾸로 머슴이 됐다.

옛날 정치인도 많이 싸웠다. 그러나 ‘행동하는 양심’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지 말라’ ‘닭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는 구호에는 철학이 있었고, 시정(詩情)이 넘쳤다.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에는 문학적 향기마저 살짝 느껴진다. 그러나 작금의 막말 폭탄을 보라. 입에 담기도 낯뜨거운 독설을 누가 더 잘하나, 누가 더 세게 하나 경쟁을 벌이고 있다. 막말 잘하는 ‘저격수’가 공천을 받는 데 유리하다는 소문까지 나돈다. 그게 사실이면, 단기필마(單騎匹馬)로 적장의 목을 베어 출세하던 ‘삼국지’의 후예들이다.

그토록 서로 불구대천 원수들같이 싸우면서 수시로 통합과 협치를 말한다. 채식주의자가 불고기 파티를 하겠다는 소리일까. 고사성어 ‘불구대천(不俱戴天)’은 하늘을 같이 이고 살 수 없다는 뜻인데, 웃기게도 같은 하늘 같은 건물 지붕 아래서 피 터지게 싸우고 있다. 참 야릇한 것은 TV 방송이다. 다수 시청자가 염증을 내면 누구든 곧바로 퇴출인데, 정치인은 일 년 내내 토·일요일도 안 쉬고 ‘출연’한다.

오랜 기간 서러운 찬밥만 먹다가 타이틀을 거머쥔 현 챔피언. 분루를 삼키며 타이틀을 내놓았던 전 챔피언이자 현 도전자. 이들 양대 산맥의 수성이냐 고지 탈환이냐, 타이틀 매치 한판 승부가 어느새 시작된 것이다. 눈치 빠른 백성들이 ‘경제도 어려운데 벌써 콩밭에 가 있다’고 한숨을 내쉰다. 실제로 그 잘난 챔피언 뽑는다고 내 편 네 편 갈가리 찢어져 싸우던 그 악몽. 어디 한두 번 겪어 봤나. 그런데 다시 고질병처럼 피어오르는 검은 연기. 사전 선거 과열 조짐.

비싸다는 소주를 두 병이나 사 들고 후배가 찾아왔다. 안주는 신변 잡담과 시사 토론. ‘이대로 가면 또 난장판 된다. 의식 있는 여야 완장들이 빨리 지혜를 모아야 한다.’ ‘그 옛날 목로주점에 모여 결단해야 한다. 막말 철폐! 창칼, 다 내려놓자! 오늘 당장 막걸리 잔을 높이 들고 도원결의를 하라!’ 내가 열변을 토하자 후배도 박수를 치며 동의했다. ‘그냥 썩히기 아까운 지금 아이디어를 즉각 당정에 반영시킵시다!’ ‘응? 당…정?’ 나는 후배의 조카가 의원 보좌관인 것을 그날 처음 알았다. 그러니깐 나는 주변 인물 중에서 제일 지위가 높은 현역 의원의, 보좌관님의, 삼촌의 선배였다. 그러나 나는 솔직히 믿음이 전혀 안 갔다. 실제로 그가 방 안 이곳저곳을 오가며 계속 메일을 조카한테 보내는데 반응이 신통치 않았다. 그런데 중국집에 짜장면을 시키려 했을 때. 아! 세상에 이런 일이! 내 우국충정을 하늘이 알았을까. 그 조카가 마법이라도 부렸을까. ‘높은 분’께서 직접 전화를 걸어온 것이다. ‘옛, 접니다 의원님.’ 후배의 두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고, 높은 분의 목소리는 하도 커서 내 귀에까지 쩌렁쩌렁 다 들렸다.

‘나잇살 들어 가지고 왜 조카 들볶고 그래요? 목로주점은 또 뭐야. 말도 안 통하는 ××들 하고 무슨 놈의 막걸리! 백날 만나 봐야 열불만 터지지! 당신 조카 실업자 만들고 싶지 않으면 쓸데없는 전화 걸고 그러지 말아요.’

큰길까지 후배를 배웅하고 오면서, 아까 휴대전화 뺏어 대거리하지 않길 잘했다 싶었다. 괜히 까불다가 고소·고발 잘하는 선수들한테 무슨 변을 당하려고…. 그러나 힘없고 백 없는 서민도 뒷담화 정도는 때릴 줄 안다.

‘여보슈, 높은 분! 도대체 국가를 위해 그 정도 열정도, 배포도 없냐? 정치 초년병 시절 목로주점을 벌써 잊어버렸다고? 당신 정치 헛했다. 기원에 가서 바둑이나 두면서 마음공부 좀 해라! 그러나 바둑이라고 만만할 줄 아슈? 자기 진영 자기 돌은 보지 않고 상대 약점만 캐고 마구잡이 때려잡기로 백날 해보슈. 백전백패. 한 판도 바둑을 이길 수 없을 거야. 깨끗하게 지는 법도 영영 알지 못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