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작의 공간>가난했지만 아름다웠던… 부젓가락 추억이 담긴 ‘그리운 땅’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강원 양양군 현북면 하광정리 하조대해수욕장. 이경자 작가의 고향인 양양은 작가가 소설 창작을 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감수성의 원천이 됐다. 자료사진

이경자 장편소설 ‘순이’ 배경 강원 양양

웃풍 심한 방엔 화로 부젓가락
감자와 밤 묻었다가 꺼내 먹곤
얼다가 굳다가 하는 인절미도

38도 선 두고 이웃이 갈라졌고
논밭 뙈기도 아래위로 나누어져
그을린 집터가 우리들의 놀이터

이제는 찾아볼 수 없는 옛 모습
그래도 산과 냇가 풍경은 남아
화가가 붓 칠하듯 소설로 그려

◇슬픔의 뿌리를 더듬는 일, ‘순이’에 대해 = 부모님이 안 계신 어버이날, 서울에서 만날 수 있는 육친 중에 어버이 버금가는 분을 찾았다. 아버지의 막내 여동생이신 고모. 근처 백화점의 중식당에서 단둘이 마주 앉자마자 고모가 말했다.

“널 보면 그거부터 생각난다. 부젓가락으로…….”

이 한마디로 우린 단박에 1950년대 초중반으로 돌아갔다. 우리는 더 말하지 않았지만 더하고 뺄 것 없이 아름답고 슬프고 가난했던 모든 것들 속으로 깃털처럼 가볍게 들어갔다. ‘부젓가락’으로 상징되는 그 시절은 아무렇지 않게, 아직, 거기 있었다. 아마 고모와 내가 지구에 있는 동안엔 그럴 것이다. 겨울의 웃풍 심한 방에는 늘 화로에 부젓가락이 있었다. 감자도 넣었다 먹고 밤도 묻었다가 꺼내 먹곤 했다. 설이 보름이 되도록 광의 커다란 소쿠리에 담겨서 얼다가 굳다가 하는 인절미를 구워 먹었다. 누워 있는 아가 이외엔 모두 일을 하던 시절이었다. 그 시절의 부젓가락. 추억의 공간은 강원 양양군 양양면 성내리. 북위 38도에 위치한 곳. 정확한 38도 선의 위치는 군청과 면사무소 등이 있는 곳으로부터 남대천을 건너 남으로 내려가면 현남면 기사문리 어름이다. 선을 가운데 두고 이웃이 갈라졌고 허리 굽히고 농사를 짓던 논밭 뙈기도 선의 아래위로 나뉘었다. 갈린 건 그것만이 아니었다. 남은 자본주의 이승만, 북은 공산주의 김일성. 이밥 먹고 등 따습고 불행한 일 안 생기는 것으로 충분히 평화롭던 사람들에게 ‘자본’은 뭐고 ‘공산’은 뭔가! 우습지도 않은 일이다. 그 선을 경계로 나뉘었던 땅은 전쟁하며 살아있는 것들에게 참혹한 고통을 주다가 1953년 7월 휴전을 하며 이제 남과 북은 휴전선으로 갈라섰다. 그 덕분에 양양은 군 전체가 남으로 편입됐다.

여든을 바라보는 고모가 일흔 넘은 조카를 보자마자 꺼낸 부젓가락 얘기. 고모는 머릿니가 하얗게 서캐를 슬고 이가 슬슬 기어 내려오는 나의 기다란 머리를 툭하면 부젓가락으로 꼬불꼬불 볶아놓았었다. 따갑다고 울고 싫다고 도망쳐도 고모는 악착같았다. 유치원에 다니던 여섯 살 무렵의 나는 고모의 인형이었다. 그리고 1953년 무렵의 양양은 휴전협정 전후로 설악산 인근이나 동해안 여기저기에서 작고 큰 전투가 부지기수로 벌어졌다고 했다.

양양읍내의 집들은 1·4 후퇴 때 미군에 의한 초토화 작전으로 모두 불타서 대개 다시 지은 집들이었다. 집안에 남자들이 있으면 집을 쉽게 지었을 것이다. 우리 집엔 이상하게도 ‘빨갱이’가 없고, 미군부대가 주둔한 속초로부터 가까워서 불안하지 않게 지냈다. 여기저기 불탄 집, 아직 돌아오지 못한 가족들의 검게 그을린 집터와 텃밭들은 우리들의 놀이터였다. 하지만 어른들은 기이해 보였다. 부엌에서 무언가 시냇물 흐르는 소리로 소곤거리는데 내가 궁금해하면 갑자기 무서운 표정을 지으며 삽질하듯 떠내는 손짓을 했다. 아버지가 없거나 집이 없어서 세를 들어 사는 동무들. 하지만 그땐 가난이라는 게 뭔지, 불행이라는 게 뭔지 몰라서 아무렇지 않게 지냈다. 그러나 부엌의 시냇물 흐르는 소리는 우리 집 부엌에서만 있는 게 아니라 양양읍내 전체가 다 그런 소리를 내는 것 같았다. 그 현상은 내게 ‘두려움과 공포와 비굴과 비겁’의 씨앗이 되었다. 성내리엔 혼자 사는 할머니들도 있었다. 아들 가족이 모두 북으로 가서였다. 어느 동네엔 누가 간첩으로 내려와서 일가친척이 양미리 엮이듯 경찰서에 잡혀갔다는 소문이 뒤숭숭하게 들려왔다. 마을의 여기저기엔 폭격에 허물어진 건물들의 잔해가 무더기로 쌓여 있었다. 우린 그곳에 기대어 소꿉을 놀곤 했다. 구호물자로 군것질을 했고 꿈을 꿨다.

이 시절의 비극을 여섯 살 아이들의 생활에서 복원해놓은 것이 ‘순이’라는 장편소설이다. 요즘도 가끔 그 시절을 돌아본다. 아마 내 삶에서 그 시절이 가장 아름다웠기 때문이리라. 가난했지만 가난이 무언지 모르고 가난이 부끄럽지도 않았으며, 가난의 반대인 부자를 동경하거나 질투하지 않았던 시절.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를 몰랐고 대통령과 수령을 몰랐던 시절. 사람들의 생각이나 행동에 악과 선이 따로 있다는 걸 이해하지 못했고, 그저 주어진 대로 살았다. 아프면 울고 무서우면 숨고 두려우면 움츠리기만 해도 되었던 시절. 세상에는 좋은 천당, 나쁜 지옥이 있다며 천당을 상상하던 시절. 이런 시절 속에 드리운 아름다움과 그리움의 시원(始原) 같은 시대를 글자로 또박또박 눌러 쓴 것이 ‘순이’다. 내가 열여덟 살 가을에 떠나와 다시 돌아가지 못한 양양. 그러나 내 모든 것의 뿌리가 아직도 그곳에 내려진 채 그대로인 곳. 고향의 모든 것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의 마음을 담아서 썼다.

1980년대까지 양양은 내가 살던 때의 모습에서 많이 달라지지 않았었다. 그러나 지금은 찾아볼 수 없다. 도시 열등감이 보여서 안쓰러운 고향. 그러나 산천은 의연한 곳. 설악산과 남대천, 낙산의 의상대와 툭 터진 동해의 아득한 수평선. 그리고 사람들의 역사와 그 얽힘들. 그 모든 것이 내겐 풍경이어서 화가가 그렇게 하듯, 나는 글자로 그려냈다. 소설을 쓰면서 책 제목은 신영복 선생님께 받고 싶었다. 선생님이 내 소망을 들어주셨다. 조건이 없었다. 책이 안 팔린다고 작은 선물도 사양하셨다. 순이를 쓸 때 행복했다. 그 시절의 수많은 순이를 불러내 늙은 손으로 쓰다듬어 준 기분이었다. 책 표지의 순이. 순수하고 호기심이 깊게 드리운 표정. 보기만 해도 미소가 지어진다. 아직도 독자들의 사랑을 받는 그 순이. 사랑한다.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사진 왼쪽부터 강원 양양군 강현면 전진리 낙산사의 홍련암과 남대천. 강원 양양군을 흐르는 남대천은 국내에서 연어가 가장 많이 돌아오는 장소로 유명하다. 자료사진

◇‘시인 신경림’ = 여행 중에 불현듯 간직하고 싶은 풍광을 향해 카메라 렌즈를 대고 바라보다가 셔터를 눌러서 사진으로 남기는 일, 혹은 그림을 그리거나 메모로 남기는 일 등. 이렇게 하는 사람들을 꽤 보아왔다. 나는 사진도 잘 안 찍고 그림은 애당초 그릴 줄 모르고 단지 글만 쓸 줄 아는데 순간순간 메모를 하지는 않는 편이다. 그런데도 사물이든 사람이든 어떤 대상이 마음에 들어와 사라지지 않을 때가 있다. 그건 반드시 내가 세상에 말하고자 하는 ‘주제’를 품은 ‘소재’들이다. 그 대상을 마음에 담고 오래도록 간직하다 보면 곰삭게 되고 그렇게 돼서 이야기로 만들어져 소설 한 편을 완성한다. 이게 대강 나의 작품 활동 방식이다. 주제를 말하고자 할 때 그 주제를 가장 잘 간직한 대상이 보모이든 나 자신이든 일단 객관화해 이야기를 만들고 그 이야기로부터 해방된다. 글을 끝냈을 때 개운한 기분이 들면, 성공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럼 아직도 우리 곁에 계신 시인 신경림 선생님에 대한 글은 어떻게 쓰게 됐을까? 사람들이 그것이 알고 싶은지 가끔 묻는다.

나는 사춘기 이후 시를 써 본 적이 없다. 1988년 채광석 평론가가 새벽에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 날, 부엌에서 아침쌀을 씻는데 시가 떠올랐다. 불현듯 풀빛 출판사에서 낸 ‘한국민중사’ 표지 뒷장에 떠오른 문장을 썼다. 그리고 그게 시라고 생각했지만, 누구에게 보여준 바 없고 지금은 ‘한국민중사’와 더불어 사라져버렸다. 이후 화가 박수근에 대해 그가 어떤 사람이며 어떤 생각으로 그림을 그렸는지, 그 생애와 그림의 사상을 직조(織造)해서 소설로 쓴 적이 있었다. 그럼 시인 신경림은 왜?

어느 날 아무 목적 없이 선생님을 소설로 쓰고 싶어졌다. 무언가 평론가들은 들여다보지 못하는 신경림 생명의 갈피들을 나라면 소설로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런 생각이 마음에서 떠나지 않았다. 선생님이 나의 ‘소재’가 된 것이었다. 이유도 목적도 없고 다만 ‘쓰고 싶을 따름’이었다. 물론 살아계신 대선배님의 시와 생애에 대해 글을 쓴다는 건 아무리 잘해봐야 본전도 못 찾을 게 뻔했다. 공연한 오해와 술안주로 씹힐 가능성도 있었다. 그런데도 쓰고 싶었다. 더군다나 나는 선생님이 수십 년을 살아오신 미아리 고개 넘어 길음동과 정릉 이쪽저쪽 동네의 근처에 살고 있었다. 또 하나, 사람들이 선생님을 잘 모르는 것 같았다. 시와 삶이 어떻게 어울러 들어 우리에게 깊은 서러움과 움츠린 분노와 수줍은 열정을 선물하는지, 글로 표현하고 싶었다. 왠지 그런 일은 나만큼 잘할 사람이 없을 것 같았다. 이건 물론 착각이며 무식해서 용감한 꼴에 가까웠다.

어느 날 선생님께 나의 욕심을 말씀드렸다. 처음엔 불신에, 겁먹은 소년처럼 거절하셨지만, 나의 간절함이 진실해 보였는지 허락해주셨다. 말하자면 초상화 그리는 화가 앞에 잠깐 앉아 주시는 것과 같다고 말씀드렸다.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이경자 소설가

취재는 반드시 해야 했다. 취재 없이 소설을 쓸 수가 없다. 선생님께서 당신의 어린 날 이야기, 집안 이야기 등을 대강 해주셨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를 믿어주셨다. 초상화가 앞에서 한동안 얼굴을 맡기고 앉아 있다가 완성된 얼굴 그림을 보고 실망하거나 화가 치밀거나 또는 실제보다 잘 그려져서 부끄럽기까지 할 일도 생길 거란 이야기도 했다.

세상이나 사람에 대한 사유의 깊이는 내가 감히 선생님을 흉내 낼 수조차 없다. 하지만 선생님이 당신의 살아오신 이야기를 해 주실 때 나는 작가로서 점점 더 마음이 뜨거워졌다. 너무도 맘에 사로잡혀서 무언가 작품이 잘 나올 것 같은 예감마저 들었다. 그때까지 쓰신 선생님의 작품들과 산문들을 읽었다. 그리고 쓰기 시작했다. 쓰는 동안 몸은 힘이 들어도 마음은 편안했다. 좋은 징조라는 건 경험으로 알았다.

‘시인 신경림’은 이렇게 완성됐다. 책이 가볍고 얇아서 들고 다니는 가방에 쏙 들어가도 무겁지 않은 책. 출판사에 부탁한 건 이것이 전부였다.

벌써 몇 년이 흘렀다. 앞으로 이런 책을 몇 권 더 낼 생각이다. 내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 만난 분 중에 그 삶을 존경했고 사랑했던 분들을 그림 그리듯 써내려가는 소설. 세상을 떠나기 전에 하고 싶은 일 중 하나다.

이경자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