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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파워인터뷰 게재 일자 : 2019년 06월 14일(金)
“군대 줄이는 게 개혁인가… 편협한 이념에 자주국방 길 잃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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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영길 전 국방부 장관은 12일 경기 성남의 한국군사문제연구원 연구실에서 가진 문화일보와의 파워 인터뷰에서 “조선이 망한 것은 국정 방향을 바로 세울 큰 그릇이 없었고, 문명의 흐름이 바뀌는 역사적 전환기에 나라의 흥망을 내다보는 통찰력과 결단력을 지닌 국가 지도력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김낙중 기자 sanjoong@
조영길 前 국방부 장관

30년 걸린 軍전력강화 계획
문민정부 3개월 구상에 제동

북한군 100만명과 대치하는데
일방적 감축은 무책임한 발상

정권마다 자주국방 정치적 이용
국가지도력 결핍이 안보 위협


참여 정부 초대 국방부 장관을 지낸 조영길(79) 전 장관이 12년간의 집필 끝에 내놓은 저서 ‘자주국방의 길’(플래닛미디어)에서 국내에 알려지지 않았던 수많은 국방 비사(秘史)와 자주국방이 태동한 배경과 추진 내용 등을 처음으로 공개했다. 1972년 4월 한국군의 독자적 전쟁수행계획인 ‘태극 72계획’이 한·미연합사령부의 ‘작전계획(작계) 5027-74’에 전폭 반영됐던 일화부터 한국을 세계 7번째 미사일 개발 국가 반열에 올려놓은 극비사업 ‘지대지 유도탄 백곰(NHK-1) 사업’ ‘현무(NHK-2) 사업’ 추진과 임시수도 건설계획(백지계획) 및 3군본부 계룡대 이전을 비롯, 한국의 핵연료주기(우라늄의 농축-가공-사용후재처리) 자립화를 둘러싼 한·미 정부 간 의견충돌, 노태우 정부의 북방정책과 한반도 긴장완화를 위한 노력 및 경과, 북한 핵문제 대두와 한·미 정부의 대응과정, 신군부 이후 6개 단임정부의 국방개혁의 허와 실 등이 사실적으로 정리돼 있다.

조 전 장관은 주요 결정 때마다 직·간접적으로 관여하거나, 자주국방 핵심인물들과 교유했다. 이처럼 ‘자주국방’ 건설에 일조한 조 전 장관은 2000년 이후 일방적 군비 축소를 상당히 우려했다. 조 전 장관은 “국민의 정부 시절 3개월 만에 마련된 군구조 개혁안과 군 내부의 공론화 과정을 거치지 않은 ‘일방적 군비축소계획’은 위험한 발상”이라며 “참여정부 들어 ‘국방개혁 2020’을 통해 일방적 군비 축소안이 되살아났으며 이는 자칫 역방향으로 치닫는 기관차와 같은 ‘불안한 역행군(逆行軍)’이 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며 일침을 가했다. 하지만 조 전 장관은 문재인 정부의 국방 및 대북정책에 대해서는 직접적 언급을 삼가면서도 “문명이 바뀌고 있는 전환기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 고민하는 게 지도력”이라고 강조했다. 조 전 장관과의 인터뷰는 지난 12일 경기 성남 한국군사문제연구원 연구실에서 진행됐다.


―1970년대에 ‘태극 72계획’을 비롯해 1971년 한국군 최초의 긴급병기개발 계획인 ‘번개 사업’, 한국군이 작성한 최초 기획문서인 합참의 ‘현대화 5개년 계획’ 등 자주국방 사업에 잇따라 시동이 걸렸는데, 그 배경이 궁금합니다.

“1967년부터 북한의 계획적이고 공격적인 도발이 시작됐습니다. 56함(당포함) 격침 사건이 시초로, 1967년 1월 19일 동해 북방한계선(NLL) 부근에서 명태잡이 어선단을 호위하던 해군의 초계정(PCE) 56함을 동굴 진지의 122㎜ 해안포 집중사격으로 격침시켜 우리 승조원 79명 중 39명이 전사했습니다. 이후 1968년 1·21 청와대 기습 사건, 이틀 후에 미군 정보함 푸에블로호 납북, 1월 25일 비무장지대(DMZ)에 침투한 북한군이 미군 14명을 살상하고 도주한 사건, 4월 초 북한 무장 공작조가 울진항 인근에 상륙해 지하당 조직건설을 획책했으나 안내를 맡았던 월북자의 자수로 사전에 발각된 사건 등도 있었습니다. 나중에 드러나지만 1967년 초부터 1969년 사이에 지상·해상·공중에서 파상적으로 전개된 북한의 대담한 도발 행위는 바로 북한 정권의 전쟁에 대한 자신감의 표현이었습니다. 북한이 전쟁에 대한 자신감을 갖고 공세적으로 행동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고, 이게 자주국방 사업을 시작한 계기였습니다.”

―첫 국산 무기 개발사업인 ‘번개 사업’이 자주국방 대장정의 시초였는데, 어떻게 시작이 된 겁니까?

“1971년 11월 10일 박정희 대통령이 신응균 국방과학연구소(ADD) 소장에게 ‘긴급병기개발지시’를 하달합니다. 연말까지 소총·기관총·박격포·수류탄·지뢰·소형고속정·경항공기의 시제(試製)를 제작하라는 요구였습니다. 총포는 고사하고 대검 하나 만들지 못하고, 소총의 총구를 청소하는 꽂을대마저 군사원조에 의존하는 실정에서 많은 종류의 기본 병기를 2개월도 안 되는 기간에 국산으로 시제품을 제작한다는 것은 상식을 초월하는 허황하고 무모한 과욕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사업 명칭을 번개 사업으로 정한 건 ‘번갯불에 콩 튀기기’식이라는 과학자들의 속마음을 함축하는 것으로, 청천벽력과도 같은 얘기로 들렸습니다. 아마 성공 가능성을 믿는 사람도 없었을 겁니다. 참여한 업체들은 주로 농기구·재봉틀·라디오·자전거 등을 생산하는 회사로, 당시에는 한국을 대표하는 산업체들이었습니다. 1972년 4월 3일 경기 의정부 26사단 사격장에서 대통령과 3부 요인, 군 지휘관과 생산업체 대표들이 참석한 가운데 2차 시제장비들의 공개 시범사격을 했습니다. 건국 후 최초로 우리 기술로 제작한, 그것도 4개월이라는 단기간에 번개처럼 만들어진 번개 사업 장비의 성능을 공개적으로 확인하는 자리였습니다. 역사적인 시범 사업은 대성공이었습니다. 마지막 박격포 효력사(일제사격)에서 전방 능선에 원형으로 그려놓은 표적에 전 박격포탄이 일제히 명중했을 때 모든 사람이 일어서 박수를 치고 환호했습니다. 감격해서 눈물을 흘리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조 전 장관은 “사업 성공에 힘입어 ‘우리도 할 수 있다’ ‘하면 된다’는 자신감과 자주국방 의지를 공유하는 순간이기도 했다”고 회고했다. 특히 조 전 장관은 이를 “우리의 자주국방이 시작됐으며, 험난한 대장정의 첫 이정표를 세우게 된 사건이었다”고 규정했다. 그는 “소총 한 자루 만들 능력이 없는 세계 최빈국 처지에서 당장 눈앞에 밀어닥친 전쟁의 공포를 이겨내고 국가의 생존과 자주권을 지키기 위해서는 불가피한 선택이었다”며 “한반도를 에워싼 주변 열강들의 끊임없이 변화하는 이해관계 속에서 더 이상 나라의 안보를 외세에 의탁하고 살아갈 수 없다는 절박한 상황인식에서 내린 결단이었다”고 말했다. 당시 박 대통령의 ‘결단’이 있었다는 이야기다.

―박 대통령이 자주국방을 주창하고 자주국방의 터전을 닦은 사실은 산업화 기여도에 비해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박 대통령은 당시 한국이 북한에 비해 군사력이 약한 상태에서 북한의 도발 위협을 억제하고 방어하기 위한 자주국방력 건설을 강한 리더십으로 추진했습니다. 이후 진보정부가 국정철학으로 내세운 자주국방은 전시작전권(전작권) 전환과 한미연합사령부 용산 이전 등 주권 문제를 강조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어 보입니다.

“저는 요즘 흔히들 얘기하는 보수 성향의 정부나 진보 성향의 정부 양쪽에서 다 근무를 했습니다. 일단 이데올로기적 차원에서 정부마다 서로 생각하는 각도에 편차가 있다는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저는 그보다는 자주국방의 큰 물줄기를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일부에서 제 책을 두고 박 대통령 개인을 너무 부각시키는 것 아니냐고 하는 분도 있지만 그건 오해입니다. 저는 있는 사실 그대로, 북한의 대담하고 공격적인 도발이란 안보 상황이 자주국방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던 걸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당시는 굳이 자주국방이란 캐치프레이즈를 걸지 않더라도 살기 위해서는 북한의 도발에 대비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닉슨독트린까지, 우리가 기대한 것과는 완전히 거꾸로 상황이 전개됐습니다. 국제 냉전 체제, 범세계적 흐름에서 보면 당시는 시대적 전환기에 접어들었지만 가난해 먹고살기에 바빴던 우리 정부는 그걸 제대로 감지하지 못했던 게 사실입니다. 막상 맞닥뜨리고 보니 사고무친(四顧無親), 고립감을 느끼게 됐습니다. 우리가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이냐는 고민을 하며 나온 것이 1970년 1월 9일 박 대통령이 연두 기자회견에서 발표한 ‘자립경제와 자주국방’이었고, 창설지시가 내려온 지 4개월만에 국산무기 개발의 산실인 ADD가 급히 신설됩니다.”

하지만 조 전 장관은 이후 정부의 국방정책에 대해서는 쓴소리를 내놓았다. 조 전 장관은 “국민의 정부 출범 후 국방개혁추진위원회가 군 구조 개편과 방위력 개선 및 국방관리 개선 등 국방의 골격을 바꾸고 태(胎)를 갈아 끼우겠다는 거대한 구상을 불과 3개월 만에 마련했다”면서 “이도 놀랍지만 더욱 충격적인 것은 군 내부의 공론화 과정을 거치지 않은 ‘일방적 군비축소계획’이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공식 문서화됐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군사력의 양을 줄이고 질을 강화해서 ‘작지만 강한 군대’를 만들겠다고 했지만, 군사력 질을 강화할 특별한 대안을 제시하고 있지 않아 참으로 위험하고 무책임한 발상”이라며 강도 높게 비판했다.

―위험하고 무책임한 발상이라고 판단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군이 자주국방(율곡)에 착수한 1970년대부터 합참은 해병 2개 사단을 포함한 지상군 50개 사단을 목표로 전력구조를 발전시켜왔습니다. 이같은 군사력 건설은 한·미 합동 워게임 등을 통해 장기간에 걸친 분석과 검증을 거쳐 1980년에 최종적으로 확정됐고 2차 율곡계획으로 문서화됐습니다. 북한의 120만 상비전력과 200여만 예비전력에 대비한 최소한의 대응 소요 구조를 갖추는 데 30년 가까운 시간이 걸렸고, 1996년 말에야 그 기본골격이 만들어졌습니다. 그것이 실제 전투력으로 제 능력을 완비하려면 앞으로도 추가 시간과 자원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바로 그런 시점에 사단과 군단 수를 대폭 감소하고 야전군을 해체하자는 감군 이론이 일방적으로 제기됐습니다. 이게 국민의 정부 시절 5개년 계획으로 확정돼 군사력 건설에 심혈을 기울여온 군사기획 전문가들은 분노와 허탈감을 억제할 수 없었습니다. 국민의 정부 이후 국방개혁 과정에서의 일방적 전력 감축 계획은 적의 위협에 노출될 위험성이 있습니다. 핵무기와 같은 절대무기가 제공되지 않는 한 전투부대의 감축으로 형성되는 전선의 늘어난 공간과 취약 부분은 공군의 폭격이나 해군의 함포지원으로 메울 수 없습니다. 그 치명적 위험에 대한 정밀한 분석이나 심각한 고민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조 전 장관은 북핵 문제에서도 해결의 기회를 놓쳤다면서 상당히 아쉬워했다. 조 전 장관은 “1989년 말 북한이 조선반도 비핵지대를 위한 남·북·미 3자회담을 제안했을 당시만 해도 북한이 단독으로 핵무기를 제조할 수 있는 수준에는 이르지 못했던 게 사실”이라며 “당시 한·미의 국가 전략이 상충하는 바람에 핵 문제도 해결하지 못하고, 남북 회담도 깨져버려 한반도는 결과적으로 더 위험한 상태가 됐다”고 아쉬움을 표했다.

―1993년 북한의 핵비확산협정(NPT) 탈퇴와 경수로 지원 등 초기 북핵 대책에 실패했습니다. 당시 노태우 정부가 주한미군의 전술핵무기 철수와 비핵화 선언을 일방적으로 하기보다 협상용 카드로 활용했어야 했다는 비판도 있습니다. 한국이 대북 협상에 너무 낙관적 기대를 가졌다는 비판입니다. “북한의 핵 개발을 원천적으로 봉쇄하기 위해서는 남북한이 한반도 비핵화 선언에 합의하고, 북한이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찰을 수용하던 그 시기가 최적의 타이밍이었는데 미국과 한국 정부가 이를 놓쳐버려 아쉬움이 큽니다. 1993년 핵통제공동위원회(JNCC) 회담 결렬과 1994년 제네바 합의에 이르는 2년의 기간은 북한으로 하여금 미국의 위협과 국제사회의 압력에 견딜 수 있는 내성을 강화하는 한편, 핵무기야말로 북한의 생존에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닫도록 하는 혹독한 체험 기간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 50대 초반의 김정일이 국가 운명을 떠맡고 군부가 권력의 표면에 떠오른 상황에서 북한이 어렵게 획득한 핵기술과 능력을 모조리 포기한다는 것은 군사 전문가들의 판단으로는 전혀 기대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한국의 핵무기 접근이 철저히 봉쇄되고 미국의 전술 핵무기마저 철수해버린 상황에서 장차 재래식 군사력을 바탕으로 북한의 핵 위협에 어떻게 대응해나갈 것인가가 군사전략의 당면과제가 된 상황이었습니다. 이때 이양호 합참의장을 중심으로 제한된 인원이 모여 전략 상황과 대응 방안 평가회의를 통해 북한의 핵 및 생화학무기 위협에 대비한 군의 전력구조 보강 방안과 전장 감시·조기경보능력 및 응징보복능력에 바탕을 둔 억제전략 발전 방안, ADD의 전략무기 개발능력 확대 방안 등을 집중 토의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북한 종심 표적 타격 능력을 보강하기 위해 국산 지대지 유도무기의 사거리를 500㎞ 이상 연장하도록 한·미 미사일협정 개정을 추진해나간다는 내부 방침을 세우기도 했습니다.”

―미·북 비핵화 협상은 현재 교착상태입니다. 북한이 정말 핵을 포기할 의도가 있다고 보십니까? 북한의 진정한 목표는 핵보유국입니까?

“핵은 북한 및 북한 정권의 생존 문제입니다. 그래서 북한이 핵을 포기한다는 문제는, 우리가 단순하게 ‘가능하다, 불가능하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닙니다.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도 사고가 단순한 것이고,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생각이 완전하지 못한 사람이라고 봅니다. 쉽게 단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고 대단히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입니다. 이 문제를 단순화해서 이야기하는 건 맞지 않습니다. 단지 생존의 문제이기 때문에 그렇게 말 몇 마디로 쉽게 해결될 사안이 아닌 겁니다. 어깨 잡고 두드리고, 포옹 한두 번 한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는 절대 아닙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쉽게 쉽게 가는 것 좋아하는데, 단순하게 이야기할 사안은 아닙니다.”

―정부가 지금 남북관계 진전에 너무 힘을 소진하다 보니 외교관계 등이 종속변수화돼 국제사회의 큰 흐름에 대처하지 못한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군 출신 안보 담당자로서, 남북문제는 남북문제대로 해결할 필요가 있습니다. 남북 간에 전쟁이 다시는 일어나선 안 됩니다. 지금은 6·25전쟁 때와는 사정이 다릅니다. 남북한 전쟁, 무력 충돌은 한민족의 절멸을 의미합니다. 그렇기에 전쟁은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전제하에서 남북 관계를 발전시켜야 합니다. 그렇다고 북한에 굴종적으로 하라는 이야긴 아닙니다. 우리 주변에 여러 강대국이 있지만 그들에 의해 남북 관계가 해결되진 않습니다. 반드시 우리 스스로 해결해야지, 절대 남이 해결해줄 수 없습니다.”

―북한 핵무장이 현실적 위협으로 대두하며 미국의 전략 목표가 한반도 평화보다는 미국 본토 안보 쪽으로 중심이 이동하면서 ‘코리아 패싱’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습니다.

“걱정이 큽니다. 그동안 우리가 어떻게 살아왔고, 우리가 어떤 사람인가를 통렬하게 되돌아보고 성찰하며 그 바탕 위에서 당면과제나 우리 미래를 생각하고 설계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조 전 장관은 30여 년에 걸친 자주국방의 불길이 꺼져가고 있다고 진단하면서 ‘국가 지도력 결핍’을 첫 번째 이유로 꼽았다. “신군부 이후 6개의 정권이 바뀌는 동안 자주국방의 참뜻을 이해하고 원대한 장정을 이끌어줄 국가지도자는 한 사람도 없었다”는 지적이다. 그는 “어떤 정부는 정통성이 빈약한 정권의 안정을 위해 자주국방의 기반을 훼손하기도 했고, 어떤 정부는 성급한 공명심과 근거 없는 자신감 속에서 국방력을 경시하고, 또 어떤 정부는 편협한 이념의 벽에 가려서 자주국방에 재갈을 물리기도 함으로써 자주국방은 방향감각을 상실하고 동력을 잃어가게 됐다”고 비판했다.

조 전 장관은 두 번째 이유로는 ‘군인의 본분과 가치관의 혼란’을 지적했다. 그는 “스스로 국가안보의 보루를 자처하는 군인들이 앞장서서 군대를 마구 줄이고 군의 전력구조를 해체하면서 그것이 국방개혁이고 나라를 위하는 일이라고 강변하는 것은 세상에서 유일하게 이 나라에서만 일어나고 있는 현상”이라며 “정부가 자주 바뀌고 정권의 성향이 뒤바뀌는 급박한 변화 속에서 생겨난 현상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그 일차적 원인은 군의 내부에서 찾아야 하며 무엇인가 크게 잘못되고 있다”고 질타했다.

“지금은 문명의 흐름이 바뀌는 전환기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18세기 이후 한 방향으로 흐르던 서세동점의 문명이전현상이 둔화되면서 새로운 변화의 조짐이 보이고 있습니다. 무역갈등을 포함한 미국, 중국과의 크고 작은 갈등 현상도 그런 맥락의 일부로 볼 수 있습니다. 중국이 ‘일대일로’를 내걸고 미국이 동아시아 인도양 지역에서 힘의 재균형(rebalancing)을 추구하는 것도 그러한 변화에 대비한 장기적인 포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본의 국가적 변신과 군사대국화도 점차 가시화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변화의 조짐들이 장기적으로 우리의 안보와 생존에 어떤 환경을 가져오고, 어떤 변수로 작용할지는 알 수 없습니다. 나라를 이끄는 지도자들이나 학자들이 깊이 통찰하고 고심해야 할 문제입니다. 그리고 이런 때일수록 강력한 국가 지도력 하에 국가 경제와, 과학 기술력과 국방력을 꾸준히 길러서 예상되는 각종 위협에 자주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국가위기대응능력을 강화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자주국방 건설의 참뜻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터뷰 = 정충신 정치부 부장 csjung@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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