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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김효정의 에로틱 시네마 게재 일자 : 2019년 06월 18일(火)
옆집 여성 훔쳐보고 죽음으로 내모는… 상류층의 ‘위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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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도의 꽃

배창호 감독의 1983년 작 ‘적도의 꽃’(사진) 오프닝은 우중충한 아파트의 거실 탁자에 엎드려 있는 한 남자의 매가리 없는 독백으로 시작된다.

“가족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불면의 밤과 싸우는 내게 매달 생활비를 보내주고 있다. 지난번 5번째로 근무하던 회사에 사표를 던지고 다시는 취직을 하지 않기로 했다. 난 명예와 욕망과 물질에 눈이 먼 사람을 경멸하고 있다. 난 순수한 아름다움을 추구하며 사랑을 찾아 헤매는 이방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한심한 독백의 화자는 ‘미스터 M’이라고 자신을 칭하는 남자(안성기)고, 그가 밝혔듯 그는 직업도, 소일거리도 없이 베란다에 서서 망원 카메라로 건너편 아파트에 사는 이웃들, 특히 여자들을 염탐하며 시간을 보낸다.

M은 어느 날 건너편 아파트에 이사 온 젊은 여자 선영(장미희)을 발견한다. 선영에게 한눈에 반한 그는 하루종일 그의 아파트를 카메라로 훔쳐보고 셔터를 눌러댄다. 선영을 훔쳐보던 M은 밤마다 그의 아파트를 찾아오는 중년 남자(남궁원)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크게 실망한다. 그러면서도 그는 망원경까지 동원해 선영과 남자가 성관계를 갖는 장면을 엿보며 침을 삼킨다. 선영과 중년 남자의 관계를 중단시켜야겠다고 결심한 그는 선영을 미행하기 시작한다. 상점, 카페 등 선영이 들르는 모든 가게, 만나는 사람들을 메모하고 그의 정보를 차곡차곡 기록한다. 결국 그는 중년 남자의 아내에게 선영과의 관계를 폭로하고 선영과 그를 떼어놓는 데 성공한다. 마침 선영의 생일을 맞아 그가 가장 좋아한다는 장미꽃을 집으로 배달하고 편지까지 남겨놓으며 본격적인 구애를 시작한다. M은 선영에게 전화를 걸어 약속을 잡기까지 하지만 끝내 자신을 드러내지 못한다.

▲  김효정 영화평론가
외로움에 지친 선영은 친구 선희(나영희)와 제주도에 놀러 갔다가 젊은 남자 준환(신일룡)을 만나게 된다. 그는 전자용품 대리점을 하는 부유한 싱글남이지만 여자를 밥 먹듯 갈아치우는 바람둥이다. M은 선영이 준환을 집으로 불러들여 관계를 갖는 것을 지켜보고는 분노한다. 결국 M의 음모로 두 번째 남자도 떨어져 나가고, 외로워진 선영은 M에게 의지한다. M만이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해줄 것이라 믿은 선영은 그를 자신의 집으로 초대한다. 그러나 M은 초대를 거부하고 비가 오던 날 선영을 강가로 끌고가 욕망과 남자들로 더러워진 몸을 씻어내라며 강 속으로 선영을 내던져 버린다. 가까스로 아파트로 돌아온 선영은 상처와 충격을 걷어내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이 영화는 최인호의 신문 연재소설을 원작으로 한 작품으로, 단관 개봉해 누적 관객 수 16만 명을 기록했다. 영화는 1980년대 초반 봇물 터지듯 만들어졌던 성애영화, 특히 아파트를 배경으로 혼자 사는 여성들의 성적 방랑기를 다룬 영화의 관습을 그대로 따른다. 정진우 감독의 ‘가시를 삼킨 장미’(1979)와 정인엽 감독의 ‘애마부인’(1982)이 대표적 예다. 그럼에도 ‘적도의 꽃’의 흥미로운 지점은 단연 안성기가 연기한 미스터 M이라는 인물이다. 그는 부유한 가정의 자제(백수인 그가 소유한 고급 망원 카메라와 망원경이 그 증거 중 하나다)고 집에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을 걸어두거나 선영에게 발레공연 티켓을 보낼 정도의 문화적 소양을 갖추고 있는 지식인이지만 영화에 등장하는 캐릭터 중 가장 교활하며 표리부동한 인물이다. M은 “물질에 눈이 먼 자를 경멸한다”고 했으나 선물 세례로 선영을 유혹하고 “순수한 아름다움”을 부르짖지만 이웃 여성의 나신과 선영의 섹스를 훔쳐보며 흥분하는 ‘피핑 톰’(관음증 환자)의 전형이다. 또한 그는 영화 ‘저주받은 카메라’(원제 ‘피핑 톰’)의 주인공처럼 직접 여자를 살해하지는 않지만 궁극적으로는 선영을 죽음으로 몰아넣는다.

그러나 M의 위선적인 행동이 모자랄 것 없는 가진 자, 즉 상류층의 표식처럼 보인다는 것은 ‘적도의 꽃’이 드러내는 행간의 변으로 보이기도 한다. ‘적도의 꽃’을 1980년대를 지배했던 수많은 관음 착취적 성애영화 중 한 편으로 볼 수만은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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