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작의 공간>틀을 깨고 자유롭게… ‘제주의 자연’ 속에 내가 들어갔다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이왈종 화백이 왈종미술관 앞 정원에서 포즈를 취했다. 정원의 꽃과 나무는 이 화백이 직접 가꾼 것이다. 왈종미술관 제공

이왈종 화백 작품의 산실 ‘제주’

1979년부터 대학서 강의하다
1989년 안식년 받아 ‘제주行’
자전거 타고 숲속 돌아다니다
‘中道와 緣起’의 세계에 눈 떠

작품속 현실과 비현실의 공존
하늘위의 물고기,나무속 사람
사물크기 멋대로 원근법 파괴
자연과 하나가 된 무심의 경지

1998년 시작한 골프소재 그림
일출봉 분화구와 접목해 호평
극락·천당보다 머물고픈 제주
죽어도 자연과 함께 섞이고파

아침 작업 중에 내가 즐겨 흥얼거리는 시는 황진이의 ‘청산리 벽계수’다. 그림은 황진이와 함께 시작된다. ‘청산리 벽계수야 수이감을 자랑마라／일도 창해하면 다시 오기 어려 왜라/ 명월이 만공산 하니 쉬어간들 어떠리’ 황진이의 무덤을 알 수 있다면 찾아가 술 한잔 올리고 싶다. 또 이생진 시인의 시집 ‘그리운 바다 성산포’도 좋아해서 이따금 그의 시를 읊조리며 작업을 한다. ‘성산포에서는 설교는 바다가 하고 목사는 바다를 듣는다/ 기도보다 더 잔잔한 바다 / 꽃보다 더 섬세한 바다’

1979년부터 추계예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다가 ‘작업만 해보고 싶다’는 생각에 1989년에 안식년으로 내려온 것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지난 2013년 5월에는 서귀포의 정방폭포 인근에 오랜 꿈이었던 ‘왈종미술관’도 건립해 운영하고 있다.

제주에 와서 처음 자리를 잡은 곳은 남원이다. 혼자 생활하며 작업하는 일이 쉽지 않았다. 그래도 복잡한 일을 잊고, 작업에 집중할 수 있는 것은 좋았다. 작업 시간 외에는 소일거리 삼아 자전거 타고 숲 속을 돌아다녔다. 자연을 접하며 많은 것을 느꼈다. 야생 잡초 하나에도 그 안에 다 질서가 있었다. 문득 사시사철 식물들이 성장하고 소멸하는 게 다 인연에 의한 것인데 집착하고 살면 안 된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러한 생각들이 후일 작품에서 어느 하나에 치우치지 않는 ‘중도(中道)와 연기(緣起) 세계’로 이어졌다.

나의 작업은 일상과 항상 맞물려 있다. 굳이 그동안의 화업을 연대기순으로 정리한다면 초기 수묵화 작업인 ‘생활 속에서’, 1985년 이후의 ‘생활 속의 중도’, 1990년부터 지금까지의 ‘제주생활의 중도’로 나눠 볼 수 있다.

이러한 작업 과정에서 인간에게 행복과 불행은 어디에서 오는가 생각해봤다. 인간이란 세상에 태어나서 잠시 머물다 덧없이 지나가는 나그네란 생각도 해봤고, 세상은 참으로 험난하고 고달픈 것이 인생이란 생각도 해봤다. 나는 새로운 조건이 갖춰지면 새로운 것이 생겨나고 또 없어지는 자연과 인간의 모습들에서 ‘연기’라는 삶의 이치를 발견하고 중도와 더불어 그것을 표현하려 했다.

서울에서의 작업은 일상 속에 있는 평범한 것을 그리되 직선과 삼각형 등 기하학적 구도로 1970년대부터 도시의 일상을 해학적으로 그려봤다.

중도의 세계관이 작업에 본격적으로 반영된 것은 제주에서부터다. 내 작품에는 현실과 비현실이 공존한다. 하늘로 물고기가 날아다니고, 인간보다 큰 새가 등장하며, 나무 속에서 사람이 뛰어논다. 일상 속 각양각색의 모습들이 한 화면 속에 원근법을 뛰어넘어 자연스럽게 어울려 표현된다.

여기에는 반야심경에 나오는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 개념도 크게 작용했다. 모든 것은 공(空)하다는 주장이다. 반야심경은 내게는 중요한 ‘화론(畵論)’이 됐다. 기존의 형식에서 벗어나, 자유스럽게 부담 없이 그려도 된다고 알려줬다. 사물의 크기가 ‘왔다 갔다’ 하면서 원근법도 깨졌다. 모든 것은 생명의 선상에서는 평등하다는 생각 가운데서 ‘제주생활의 중도’라는 작품 세계가 구체화됐다.

나는 행복과 불행, 자유와 구속, 사랑과 고통, 외로움 등을 캔버스 위에 꽃과 새, 물고기, TV, 자동차, 동백꽃, 노루, 골프 등으로 표현한다. 그 중심에 중도라는 화두가 있다. 이는 집착을 버리고 자연과 하나가 돼 무심(無心)의 경지에 이른 상태인 동시에 내가 궁극적으로 도달하고자 하는 세계관이다.

화단 일각에서는 나를 ‘상업적인 화가’라고도 하고, 민화 형식에서 영향을 받은 ‘현대풍속화’를 그리고 있다는 평가들도 한다. 아마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자연과 일상을 밝은 색채로 그려내기 때문에 그런 것 같다. 농촌 출신인 중국화가 치바이스(齊白石)가 그린 농기구 그림을 보면 왠지 마음이 편해지고 정화가 되는 느낌이 든다. 치바이스도 ‘보이지 않는 것은 그리지 않는다’고 할 정도로 주변 일상을 중요시했다. 그는 아마도 ‘일상의 응시’야말로 공감의 세계로 내딛는 첫발자국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행불행은 사람의 마음에 달려 있다고 생각한다. 긍정적으로 살면 그림도 밝게 표현되는 것 같다. 제주도에 내려오면서부터 차츰 그림도 밝아지기 시작했다. 내 주변 제주의 아름다운 것들을 열심히 그렸다. 제주는 기후가 좋고, 주변이 전부 꽃이고 아름다운 게 너무 많다. 종교에서 말하는 천국과 지옥이 실재한다면 내게는 이곳 제주가 천국이다.

작업실에 오면 그림 속으로 들어가 앉아 있는 느낌이 든다. 내가 동백나무 속으로 들어가고 그러면 새도, 집도, 물고기도 나무 속으로 들어온다. 나무 속에 오늘 내가 생활하는 모습을 집어넣기도 한 그림을 알아주든지 안 알아주든지 내게는 상관없었다.

절대자유의 세계는 ‘인간과 자연의 평등이 이뤄지는 세상’이다. 이 같은 모습이 내가 추구하는 ‘제주생활의 중도’일 터다.

골프는 제주에 내려와 1998년 시작했다. 어느 날 성산 일출봉에 올랐더니 분화구가 멋지게 보여 골프 그림에 상상의 공간으로 등장시켰더니 반응이 좋았다. 일출봉의 분화구와 중문CC의 해변 코스를 접목해 그림을 그렸는데 느낌이 괜찮았다. 굳이 분류하자면 1990년도에 제주에 내려와 ‘제주생활의 중도’로 첫 번째 전환기를 맞았다면 골프 작품이 등장하는 2000년대 이후는 ‘두 번째 전환기’인지도 모른다. 골프 그림은 2000년대 서울 현대화랑 등에서 전시해 호평을 받았다.

요즘은 몸이 예전 같지 않아 골프를 즐기지 못해 아쉽다. 그러나 20년 전 친구를 잃은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제주에 처음 내려와 외롭고 힘들던 시절 힘이 돼준 사람이 당시 작업실 근처에서 ‘소라의 성’이라는 음식점을 운영하던 김철우라는 친구였다. 혼자 어려운 시절을 보내던 나를 다독여주고, 이방인을 서귀포와 이어주던 친구였다. 문화 예술에 대한 애착도 컸고, 현재의 미술관 부지도 그 친구가 소개해줘서 구입했다.

너무 고마운 사람이다. 그런데 둘이 점심 약속이 있던 어느 날 약속 시간 1시간 전에 갑자기 쓰러져 저세상 사람이 됐고 아직도 그의 빈자리가 믿기지 않는다. 그 친구에게 항상 감사하고 살고 있다. 아마 그 친구도 좋은 곳에 있을 것 같다. 내 작품 중에 향로가 많아 의아해하는 사람이 많다. 먼저 간 친구가 그리워 그리운 마음을 담아 향로를 만들었다. 향로 하나 빚으면서 먼저 간 친구를 위로했고, 또 하나 빚으며 스스로를 위로했다.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2018년 완성된 작품(‘제주생활의 중도’, 장지에 혼합재료, 130×163㎝)으로 요가하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 왈종미술관 제공

몇 년 전부터 요가를 시작했다. 열심히 참석해서 몸과 마음을 집중한다. 요가를 시작하며 요가에 관한 그림도 그렸고, 지난해 홍콩 전시에서 호평을 받기도 했다. 굳어 있는 몸을 풀어 바른 자세를 만들어내는 것이 요가다. 이 같은 요가의 원리를 내 작품에서도 ‘중도의 세계’로 표출하려 한다.

작품의 상징인 사람과 새와 나무, 자동차와 집까지 모든 주인공은 서로 평등하다. 자연과 교감하는 생활. 이것이 바로 제주에서 찾아낸 생활의 중도의 단면이면서 내 그림 주제다. 중도는 해석하기에 따라 다르지만 내가 생각하는 중도는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인정해주는 것이다. 그 마음으로.

미술관 옥상에 올라가면 섶섬과 문섬이 한눈에 들어온다. 또 뒤편으로는 한라산 영봉이 손에 잡힐 듯 가깝게 느껴진다.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미술관 앞 작은 꽃밭에서 각종 꽃이 초여름의 싱그러움을 일깨워 주고 있다.

옥상의 높은 망루 위에 제주의 돌을 깎아 만들어 올려놓은 ‘피리 부는 남자’ 조각상이 있다. 내 자화상이다. 이 망루 아래 공간에 화장한 나의 흔적을 제주 흙이랑 섞어 도자기로 빚게 해 안치시킬 예정이다. 시간이 지나도 피리 부는 사나이로 제주의 물소리 바람소리와 함께할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편안하다.

‘중도’와 ‘연기’를 알고부터 제주 생활이 행복해졌다. 죽어서도 극락보다, 천당보다 나는 서귀포에 머물 것이다.

이왈종 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