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와 시각>판문점 회담과 비핵화 ‘행동’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김석 워싱턴 특파원

“행동(action)과 움직임(movement)을 절대 혼동하지 마라.”

미국 내 한반도 문제 전문가인 로버트 매닝 애틀랜틱카운슬 선임연구원이 지난 6월 30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판문점 정상회담에 대한 평가를 묻는 기자에게 보내준 답변 중 가장 첫 줄에 인용한 격언이다. 이 격언을 보면서 온갖 수사에 가려진 판문점 미·북 정상회담의 공허함에 딱 들어맞는 말이라는 생각에 감탄했다. 이 격언은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미국의 문호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여배우 마를레네 디트리히에게 얘기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행동’은 목적을 추구하기 때문에 실질적이고 의미 있는 변화를 가져오는 반면 ‘움직임’은 목적이 없기에 이러한 변화를 가져오지 못한다. 배가 가라앉을 때 사람들의 탈출로를 만들기 위해 의자를 옮기는 것(행동)과 단지 할 수 있는 일이 이것뿐이라며 의자를 옮기는 것(움직임)은 가져올 결과가 다를 수밖에 없다.

트럼프 대통령과 김 위원장이 당시 만남에서 수없이 강조했던 말은 ‘훌륭한 관계’다. 트럼프 대통령은 김 위원장에게 “아주 짧은 시간 내에 김 위원장에게 연락했는데 만남이 성사돼 기쁘다”며 “지난 몇 년간 우리는 많은 진전을 이뤄냈고, 훌륭한 우정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김 위원장은 “만약 우리 각하와 나 사이에 존재하는 훌륭한 관계가 아니라면 하루 만에 이런 상봉이 전격적으로 이뤄지지는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며 “앞으로도 이런 훌륭한 관계가 남들이 예상하지 못하는 좋은 일들을 계속 만들어낼 것”이라고 화답했다. 아무리 친한 친구라고 해도 갑자기 약속을 잡고 만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니 두 정상의 자랑에 시비를 따질 수는 없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과 김 위원장은 이처럼 훌륭한 관계에 근거한 만남에도 정작 중요한 비핵화에 대해서는 어떠한 일치된 의견도 내놓지 못했다.

양 정상이 판문점 남측 자유의 집에서 1시간 가까이 단독회담을 하고 합의한 사항은 실무협상 재개인데 이는 지난해 6월 싱가포르 1차 정상회담 직후로 돌아간 것에 불과하다. 미국과 북한은 싱가포르 정상회담에서 △새로운 미·북 관계 수립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 △전쟁포로와 실종자 유해 송환 등 4가지에 합의했지만, 이를 위한 실무협상은 제자리를 맴돌았다. 가장 중요한 비핵화에 대한 정의가 내려지지 않은 상황에서 진전이 이뤄지기는 어렵다. 지난 2월 하노이 2차 정상회담 결렬이 이를 잘 보여준다. 이런 상황에서 비핵화라는 목적이 보이지 않는 트럼프 대통령과 김 위원장의 만남은 ‘행동’이 아닌 ‘움직임’에 그칠 수밖에 없다. 많은 미국 전문가가 트럼프 대통령과 김 위원장의 만남을 ‘사진 촬영 행사’나 ‘리얼리티 TV 쇼’에 불과하다고 비판하는 이유다. 두 정상의 만남이 ‘행동’으로 평가받으려면 실질적인 비핵화 성과가 나와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미국의 철저한 비핵화 협상 전략도 중요하지만 한국의 협력 역시 필수적이다. 대화 재개 분위기에 편승해 개성공단이나 금강산 관광 재개와 같은 남북 경협에 치중하며 엇박자를 내면 비핵화는 멀어지고 판문점 정상회담은 그저 의미 없는 ‘움직임’으로 남을 것이다.

su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