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생각하며>알지 못하고 가는 길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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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수 고려대 명예교수·형법학

사법연수원 수료 뒤 검사직 지원
그러나 내가 갈수있는길 아니었다

스승님의 서양법사상사 강의 듣고
법학 세계 눈떠… 獨서 7년간 공부

죄와 벌은 인간 이해가 전제돼야
사랑의 힘이 끝내 증오 극복할 것

누군가가 인생이 길 위의 삶이라고 말한다면 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이겠다. 어쩌다 나는 50년 가까이 형법을 배웠고, 30년 가까이 형법을 가르쳐 왔으며, 형법학의 숲길을 지금도 걷고 있다. 형법학자가 되는 길은 내가 어릴 적부터 원해서 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내게 퍽 생소한 길이었다. 그러나 어느새 이처럼 친숙한 길이 됐다. 그러니 그저 나를 지으신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이라고 생각할 뿐이다.

대학을 졸업한 그 이듬해 사법고시에 합격하고, 2년에 걸친 사법연수원 과정을 수료했다. 어디로 갈까 망설이다가 검사직을 지원했다. 그러나 거기는 내가 갈 수 있는 길이 아니었다. 지금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지만, 그때만 해도 연좌제가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었다. 할 수 있는 게 신출내기 변호사로 법정을 드나드는 일이었다. 겉모습과 달리 좌절감에서 오는 마음의 서글픔은 말로 형언하기 힘들었다.

나도 모르게 발걸음이 가 닿은 곳이 책 향기가 물씬 풍겨 나는 은사님들의 연구실이었다. 독일에서 학위를 마치고 오신 김형배 선생님은, 눈물 골짜기를 지나던 당시의 나를 지탱해준 정신적인 멘토였다. 김 선생님의 권유로 뒤늦게 대학원에 진학하긴 했지만, 앞이 잘 보이지 않는 학문의 숲길을 헤치고 나간다는 것은 드넓은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는 모험같이 보였다.

마침 그 무렵 독일에서 법철학과 형법을 연구하고 돌아오신 심재우 선생님의 서양법사상사 강의를 듣게 되었다. 그 열정 넘치는 강의를 접하면서 나는 비로소 법학이라는 학문의 세계가 내 청춘을 쏟아부어도 아깝지 않을 길이라는 사실에 눈을 떴다. 말하자면, 지식을 암기하던 수험 법학의 지경을 넘어서, 생각하며 삶의 의미를 추구하는 학문으로서의 법학을 경이로운 눈으로 바라보게 된 것이다.

학문 수학의 유년기에 이런 은사님들을 만나게 해주신 하나님께 늘 감사하고 있다. 특히, 심 선생님은 변호사 업무 때문에 토요일에도 사무실에 나가 있는 나를 선생님의 연구실로 불러내시곤 하셨다. 그리고 시간 가는 줄도 모른 채 밤늦도록 한 손에 원서를 들고서, 마치 유모가 갓난아기에게 젖을 먹이듯, 도제식으로 나의 발을 한 걸음씩 학문의 세계로 인도해주셨다. 독일의 법철학자요 형법학자인 구스타프 라드브루흐가 독일 위인전에 수록된 그의 스승 프란츠 폰 리스트에 관해 쓰면서, ‘나의 잊을 수 없는 은사’라고 지칭한 말은 내가 심 선생님께 올려드리기에 합당한 말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석사 후 박사 과정 1년을 지나고, 또 변호사 경력 4년에 접어들 무렵, 김 선생님과 심 선생님은 숙의 끝에 나를 다시 독일 유학의 길로 밀어 넣으셨다. 변호사 생활을 더 하게 되면 학문의 길에서 멀어질까 염려하신 일이었고, 학문의 전통이 깊은 독일 대학의 학풍을 몸으로 직접 체험해 보는 게 장래에 큰 유익이 되리라는 점을 고려한 때문이었다. 김 선생님은 아데나워장학금까지 주선해주시고, 심 선생님은 독일 형법학계의 최고 권위자인 클라우스 록신 뮌헨대 교수에게 지도를 부탁하는 장문의 추천서를 손에 들려주시며 두 분께서 함께 등을 떠밀었다.

31세의 나이로 떠난 유학의 길은 예상했던 것보다 험난했다. 언어의 장벽을 극복하는 일 외에도 오래 축적된 학문 방법론과 사유 논리를 익히는 일은 온갖 심혈을 쏟아부어도 따라잡기 힘들 것만 같았다. 밤낮없이 모든 감각기관을 동원해 언어 장벽 뛰어넘기에 몰입한 지 3년이 지나 가까스로 귀가 열리고 말문도 열렸다. 떠나올 때 은사님들이 학위에 연연하지 말고 제대로 공부해 오길 바란다던 당부 말씀이 늘 좌우명처럼 내 가슴에 아로새겨져 있었다.

5년 반, 햇수로는 7년 만에 공부를 마치고 귀국했다. 하지만 정작 뼈를 깎는 공부는 바로 이제부터라는 생각이 나를 사로잡았다. 형법학의 세계에서 나의 길을 찾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을 직접 보고 들었기 때문이다.

유럽에서 형법학의 길에 본격적으로 들어선 1970년대는 자유주의 사상이 형법학을 지배하던 시기였다. 전통 깊은 응보형법에서 범인의 사회 복귀에 초점을 둔 재사회화형법의 융성기였다. 그러나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환경, 생태계, 경제, 정보 및 사회 안전과 같은 이슈가 형법의 영역에서도 점차 중요한 과제가 됐다. 산업화시대에 겪어 보지 못했던 인류의 생존 기반을 뒤흔들 만한 새로운 위험 앞에 선제적인 형법이론가들은 위험형법, 안전형법, 적대형법 같은 구상들을 내놓기 시작했다. 그것은 전통적인 자유 법치국가적 형법 질서의 한계를 넘어가는 비상조치법적 성격을 띤 것이었다. 특히, 적대형법엔 인간 적대적인 측면도 없지 않았다.

죄와 벌의 문제는 언제나 인간 이해가 전제돼야 하며, 그 인간 이해는 인간 신뢰와 사랑을 바탕으로 해야 한다는 전제에서, ‘사랑의 형법’을 그 대안으로 제시하는 데 많은 시간과 생각과 노력을 기울였다.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인간은 때로 흉악에 빠질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사나운 맹수나 악마같이 취급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민영 교도소인 ‘소망교도소’는 바로 이 이념에서 출발한 것이다. 인간의 삶에 때론 증오가 기승을 부릴 수도 있다. 하지만 사랑의 힘이 끝내 증오를 극복하리라는 확신을 가지고, 전에 알지 못했던 이 좁은 길을 한결같은 발걸음으로, 아무런 후회 없이 즐겁게 걸어가고 있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