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왼쪽부터 새로운 007을 맡은 라샤나 린치, ‘킬링이브’의 한국계 샌드라 오, 영화 ‘인어공주’의 주인공으로 낙점된 할리 베일리.
- ‘본드걸’ 아닙니다…‘본드’입니다
58년만에 등장한 ‘007 女본드’
낡은 시리즈 이미지 쇄신 나서
알라딘·인어공주 파격 캐스팅
샌드라오, 아시안 첫 단독주연
인종·성별·연령 등 경계 파괴
미디어가 왜곡한 정체성 개선
“원작 훼손하는 캐스팅” 반발 등
변화에 대한 저항도 만만찮아
드디어 흑인 여성 007의 등장이다. 자메이카 출신의 흑인 영국 배우 라샤나 린치(32)가 007 25번째 시리즈 ‘본드 25’의 주인공을 맡게 되면서 인종·성별·성정체성·연령·체형에서 기존 경계를 깨고 새로운 서사를 만들어가려는 전 세계 미디어계의 흐름이 더욱 분명해졌다. 앞서 영화 쪽에서는 마블 역사상 첫 여성 단독 영웅(캡틴마블), 재스민 술탄(알라딘), 흑인 인어공주(인어공주)가 나왔고, 미국 BBC 아메리카가 제작해 한국에서도 큰 인기를 끌고 있는 드라마 ‘킬링 이브(Killing Eve)’에서는 백인 남성들의 전유물인 첩보·스릴러물의 원톱 주인공이 여성, 그것도 아시아계 여성(샌드라 오)에게 넘어갔다. ‘백인 이성애자 남성이 세상을 구하는’ 이야기가 더 이상 새롭지 않은 시대, 미디어가 왜곡해 재현해온 다양한 정체성의 스테레오타입을 개선하려는 움직임과 새로운 시장에 대한 가능성이 맞물린 결과다.
1962년 ‘007 살인번호’가 나온 후 처음 등장하는 ‘흑인 여성 007’은 상징적 사건이다. ‘본드 25’가 개봉되는 2020년을 기준으로 하면 58년 만에 벌어진 혁명적 변화인 셈이다. 지금까지 007 시리즈에서 여성의 역할이 ‘본드걸’이라는 전형적이고 선정적인 캐릭터로 소비됐다는 건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 수십 년을 이어오던 시리즈가 낡아지자 ‘007 시리즈’는 귀족적 이미지의 백인 남성(숀 코너리, 로저 무어, 피어스 브로스넌)에서 벗어나 야생마 같은 이미지의 백인 남성(대니얼 크레이그)을 내세웠고, 이번엔 피부색과 성별까지 바꿨다. 이 작품에서 6대 제임스 본드인 대니얼 크레이그는 중간에 MI6에서 퇴임하고 라샤나 린치가 맡은 요원 ‘노미’에게 자신의 살인면허를 넘겨주게 된다. 이른바 007 제임스 본드 시대에 마침표를 찍는 ‘우먼 본드’의 탄생이다.
왓챠플레이에서 인기리에 방영 중인 드라마 ‘킬링 이브’는 한국계 배우 샌드라 오가 타이틀 롤 이브 역을 맡고 있다. 해외 첩보 스릴러 중 아시아계 여성 배우가 단독 주연을 한 것은 샌드라 오가 처음이다. 그동안 백인 남성이나 여성의 조력자, 또는 상대 역으로 나왔던 아시아 배우가 메이저 작품을 이끄는 것만으로도 놀라운 일이다. 극 중에서 이브는 명석한 추리력과 판단력으로 팀을 이끌며 사이코패스 범죄자를 추적한다. 이브의 MI6 상관이었다가 같은 팀원으로 일하게 된 백인 중년 남성 빌이 “왜 자존심 상하냐”는 이브의 추궁에 “나도 지금 적응하는 중이야”라고 하는 말은 현재 진행 중인 변화와 맞물린 매우 상징적인 대사다.
하지만 이 같은 변화에 대한 저항도 만만찮다. 디즈니 ‘인어공주’의 흑인 캐스팅 이후 전 세계적으로 논란이 사그라지지 않고 있다. 애니메이션 속 빨간 머리, 흰 피부의 공주 아리엘을 검은 머리, 검은 피부의 할리 베일리로 낙점한 데 대해 한쪽에서는 파격이라고 환호하는 반면, 다른 한쪽에서는 원작을 훼손하는 지나친 캐스팅이라며 반발하고 있다. 급기야 디즈니는 “‘인어공주’ 동화의 배경인 덴마크 사람도 흑인일 수 있고 따라서 흑인 인어공주도 가능하다”며 이번 캐스팅이 원작의 전통성을 깨뜨리는 일이 아니라고 밝혔다. 디즈니의 명확한 입장 표명 이후 미국 등에서는 논란이 다소 진정되는 반면 한국에서는 댓글 등을 통해 반발이 더 거세지는 형국이다.
문화평론가 최태섭 씨는 “어느 순간부터 할리우드 영화에서 백인 남성들이 악당, 알고 보니 진짜 나쁜 악당으로 등장한 지 오래됐다. 백인 이성애자 남자들을 위한 이야기는 이제 더 이상 비평적으로도 상업적으로도 힘이 없다”며 ‘미투 운동’으로 탄력을 받은 이 같은 변화의 흐름은 앞으로 더욱 강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다만 ‘팬보이’라고 불리는 남자 팬들을 중심으로 계속해서 과격한 저항이 벌어지고 있는 상황인데 서구에서는 이들에 대해 단호하게 대처하는 반면, 한국 등 아시아에서는 여전히 그러지 못하고 있다”며 “이제 변화를 제대로 직시하고 받아들일 때가 되지 않았나 생각한다”고 밝혔다.
이런 가운데 할리우드, 나아가 전 세계 미디어는 보다 더 파격적인 설정과 캐스팅을 진행하고 있다. 성평등과 인종차별 철폐에 관한 세계인들의 전환된 인식을 반영한 결과이고 기존의 전통적 성 역할이나 인물 구도에 싫증을 느낀 시청자와 관객들을 불러모으기 위한 적극적 조처로 풀이된다. 할리우드 톱 여배우 스칼릿 조핸슨은 최근 이 같은 캐스팅 논란에 대해 의미 있는 발언을 했다. 그는 ‘애즈 이프’ 매거진과의 인터뷰에서 “배우로서 나는 어떤 사람, 어떤 나무, 어떤 동물이라도 맡아서 할 수 있다. 그게 내 일이기 때문”이라며 “예술은 모든 제약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김인구 기자 clark@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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