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논단>‘혁신조달’ 생태계 조성의 시급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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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무경 조달청장

지난 5월 영국의 무인 화물선 ‘시 키트(Sea-kit)’가 세계 최초로 원격조종만으로 영국해협을 왕복해 벨기에로 화물을 운송하는 데 성공했다. 영국이 자율운항 선박 분야에서 앞서가는 데는, 정부가 침체된 해운산업의 혁신을 위해 새로운 비전을 제시한 것이 큰 역할을 했다. 자율운항으로 화물을 운송하거나 장기간 해양 정보를 수집하는 등 도전적인 목표를 경쟁을 통해 제기하고 여기에 많은 영국 선박 업체가 참여해 개발에 나서면서 이뤄진 혁신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영국뿐만 아니라 세계 각국의 정부가 새롭게 주목하는 분야가 공공혁신 조달이다. 정부가 한 단계 높은 도전적인 목표를 제시해 업체의 연구·개발(R&D) 의지를 끌어내고, 정부의 구매력으로 초기 시장을 창출해 주는 역할을 한다. 즉, 조달의 세계적 흐름은 기존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절차와 형식 중심의 전통적인 패러다임에서 ‘무엇을 살 것인가’ 또는 ‘조달을 통해 공공 서비스의 수준을 어떻게 향상시킬 것인가’ 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변화하고 있다.

우리나라도 세계적인 흐름에 맞춰 공공조달 제도의 혁신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다. 국내 공공조달 시장은 연간 약 120조 원을 웃도는 막대한 규모다. 정부가 국내총생산(GDP)의 7%에 이르는 공공구매력을 활용해 신기술·융복합의 혁신제품을 선도적으로 구매한다면 혁신성장의 마중물이 될 수 있다. 기존의 조달 방식은 규격이 명확하게 정해져 있는 제품 중심의 구매로, 혁신제품 개발 업체에는 진입 장벽이 높았다. 그런데다, 정부기관이 필요로 하는 혁신 수요와 업체가 제공할 수 있는 제품 정보의 창구가 없었다.

최근 정부는 공공부문이 혁신제품의 첫 번째 구매자로서 역할을 해 공공서비스의 질 향상과 혁신성장을 지원하기 위한 ‘혁신지향 공공조달 방안’을 발표했다. 그 기본 방향은 도전적 공공 수요 발굴→혁신조달 기반(제도·사업) 강화→혁신조달 플랫폼(통합몰) 구축 등 공공조달 제도 전 주기에 걸쳐 혁신을 추진하는 것이다.

먼저, 혁신제품이 공공구매에 연계되도록 조달 절차를 대폭 개선한다. 국가 R&D 결과물이나 창업·벤처기업이 개발한 상용화 전 시제품이라도 ‘혁신성 평가’를 통과한 경우 공공조달 시장에 신속히 진입할 수 있는 ‘패스트트랙’ 절차를 운영할 계획이다. 예를 들면, 국가 R&D 사업 중 혁신제품으로 인정될 경우 공공기관이 수의계약할 수 있도록 허용하게 된다. 이 패스트트랙 절차는 혁신제품의 공공 판로 확대에 크게 기여할 것이다.

더 나아가, 정부는 혁신 수요 발굴부터 공공구매까지 통합 지원하는 열린장터(Open Market) 형태의 ‘혁신조달 플랫폼’을 구축할 계획이다. 혁신조달 업체들은 플랫폼을 통해 기존 조달 시장에 등록되기 어려웠던 혁신 시제품, 우수 R&D 제품 등을 등록하고 거래할 수 있게 돼 조달 시장의 진입 장벽이 크게 완화될 것이다.

혁신조달의 궁극적인 목표는 국민이 낸 세금을 혁신 지향적으로 사용해 국민이 체감하는 공공서비스의 수준을 개선하는 것이다. 혁신조달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공공부문이 기존보다 한 단계 높은 도전적인 수요를 제시하고, 이에 부응하는 혁신제품의 판로를 지원해 기업이 기술 개발에 적극적으로 투자할 수 있는 건전한 혁신조달 생태계를 조성해야 한다. 기업들은 R&D를 통해 혁신적인 제품을 개발해 놓고도 상용화 단계에서 판로를 개척하지 못해 도산하게 되는 ‘죽음의 계곡(Death Valley)’을 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혁신 지향 공공조달’은 ‘실험실의 제품을 시장으로 나아가게’ 하는 데 크게 기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